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05화 (505/605)

505화. 동맹

기사 소설과 영웅 소설을 보면 ‘반드시’라 해도 좋을 만큼 명검(名劍)과 명창(名槍)이 등장한다.

커다란 쇠붙이에 로망이 있는 젊은 독자의 니즈 때문이기도 하지만, 좋은 무기=좋은 실력이 보편적인 상식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깃펜 하나로 깡패 셋을 처치하고, 앙상한 나뭇가지로 칼든 자를 멋지게 제압하는 것은 실제 싸울 일이 없는 공상가의 멋이었다. 현실의 멋은 누가 뭐라 해도 더 좋은 무기, 더 좋은 갑옷이었다. 그래서 영웅보다 영웅의 무기가 더 유명할 때도 있었다.

“흐룬팅...!”

요정의 검으로 소문난 흐룬팅도 그중 하나였다. 야닉 경이 손잡이를 쥐고 중얼거렸다.

“이 서늘하고도 묵직한 감각...”

“그거 엄청 가벼운데?”

“아, 왠지 이 대사를 해야 할 거 같아서... 잘못된 정보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야닉 경은 딱딱한 마룻바닥에서 흐룬팅을 뽑았다. 진흙에서 뽑아내는 것처럼 부드럽게 쓱- 뽑혔다. 그야말로 '전설적인' 예리함이 느껴졌다. 칼날을 직접 만져보고 싶지만 주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참았다. 그 대신 상하로 한 번, 좌우로 두 번, 팔(八)자로 다시 한 번 휘둘러보고 감탄했다. 가볍기만 한 게 아니라 휘두를 때 무게가 앞으로 실려 손맛이 있었다. 공기 가르는 소리가 관악기의 독주 같았다.

“그럼 다시 합시다.”

“아니, 음... 그, 그럽시다.”

해리 경은 떨떠름하게 마주 칼을 들었다. 사실 해리 경의 롱소드도 잉그비아 왕국의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명검이었다. 오른손 왼손 번갈아 던져 받아도 될 만큼 균형이 좋으며 수차례 쇳덩이와 맞대어도 이가 나가지 않을 만큼 튼튼했다. 그러나 상대우위란 게 있었다. 흐룬팅과 맞붙는 순간 와자작-! 소리와 함께 한 마디쯤 파였다. 로벨이 크게 감탄했다.

“와! 대단해!”

“그렇습니다. 역시 폐하의 애병다운...”

“내 거 말고. 해리 경의 롱소드를 말이오.”

공격을 흘리거나 물러나 방어한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그러고도 잘려 나가지 않은 것은 대단했다. 호른 경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야닉 경이 어설픈 탓입니다. 무기를 부술 작정으로 때렸으면 쉽게 부러트렸겠지요.”

어설픈 것은 해리 경도 비슷했다. 칼이 부러질 뻔 하자 소극적으로 변했다. 무기가 버틸 때 빠르게 승부를 보거나 가까이 파고들어 레슬링을 유도했어야 했다.

야닉 경은 신이 나서 칼춤을 추었고, 해리 경은 한 걸음 두 걸음 물러나다 기둥에 등이 닿아 화급히 항복을 선언했다.

“승부가 났어요!”

로벨, 어린 집사, 호른 경이 동시에 잉그비아 왕국 대사를 보았다. 거울이 없어도 자신의 표정을 알 수 있었다. 매우 얄미울 것이다.

“거, 아까 뭐라고 했소? 정신이 없어서 까먹었는데?”

“무적무패가 어쩌고 한 거 같은데, 다시 한번 말씀하시겠어요?”

대사도 할 말은 있었다. 칼날을 이리저리 비추며 우쭐거리는 야닉 경을 가리키며 따졌다.

“저건 반칙 아닙니까!”

“무슨 반칙?”

“그, 그, 무기를 빌려주는 것이... 조금...”

대사는 말을 하다가 말이 안 되어서 말았다. 결투나 시합을 위해 무기를 빌려주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전례로 보나 관례로 보나 아무 문제없었다. 전설 속의 마법검만 아니면 말이다. 호른 경이 위로를 가장해 약 올렸다.

“전초전이니 모의전이니 입방아를 찍었지만, 진짜 피를 본 것은 아니잖소? 친선시합에 너무 열 내지 마시오.”

“뭐, 우리가 이겼지만요.”

“응. 우리가 이겼지만.”

왕과 집사가 한마디씩 거들며 더욱 약 올렸다. 이것이 가식 없는 기사들의 나라 볼탄 반도였다. 대사의 볼살이 부르르 떨렸다. 오늘은 잠자리가 편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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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제 마지막 날은 거리 행사가 성대했다.

어린 집사의 일관성 있는 반대로 대형 모닥불은 실패했지만, 거리공연과 가면행진이 기획되어 초저녁부터 사람이 북적였다. 축제에 관심이 없는 투박한 아저씨와 아줌마도 술잔을 들고 테라스에 나와 올해 마지막 행사를 구경했다.

무적무패 왕의 노래로 두둑한 팁을 받은 프란시스 시티 악단이 경쾌한 행진곡을 연주했다. 불장대를 높이 든 청년들이 앞장서고, 깃털과 무명으로 멋을 낸 처녀 총각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불빛을 쫓았다.

화려한 연등도 있고, 조잡한 횃불도 있고, 어두운 등잔도 있고, 멋쟁이 신사도 있고 아리따운 숙녀도 있고, 코흘리개 소년과 주근깨 소녀도 있었다.

해가 저물자 도시를 밝히는 불빛이 더욱 환해졌다. 기름을 아까워하는 사람도 없고, 숙취를 걱정하는 사람도 없었다. 큰길의 구두쇠 할아버지도 웃고, 뒷골목의 지저분한 꼬마아이도 웃었다. 오늘만큼은 기쁜 일, 좋은 일, 행복한 일이 가득했다. 늑대성 첨탑에서 내려다보면 특히 그러했다.

“손님들은?”

“지금 나간 네일 공국 기사가 마지막이에요.”

잉그비아 왕국 대사 일행이 마지막까지 뭉개며 버틸 줄 알았는데, 연회가 파하기 무섭게 머무는 시외 대사관으로 빠져나갔다. 조만간 공식적인 자리를 잡겠노라 약속했기 때문인지, 해리 가문의 수치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조만간이 언제야?”

“글쎄요? 첫눈이 내릴 때쯤 어떨까요?”

북해무역협정이 공식적으로 파기되면 북해는 해군을 가장한 해적이 거리낌 없이 약탈을 벌이는 옛날로 돌아갈 것이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그 시절로 회귀하는 것을 최대한 늦출 생각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트로 가문이 움직일 때까지 미룰 생각이었다.

“북해 교역이 어려워지면 손해 보는 것은 사트로 가문 영주들도 같아요. 우리보다 더 손해 보죠. 우리는 인어해와 자유도시가 있지만, 저쪽은 북해뿐이니까요.”

로벨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고, 긍정적인 답신도 받았다. 그러나 볼프 사트로 후작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포클랜드의 눈치도 봐야 하고, 휘하 봉신들의 동의도 끌어내야 했다.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겨울이에요. 잉그비아 왕국의 제후들이 단체로 광대버섯 먹은 게 아닌 이상 당장 배 타고 넘어오지 않겠죠. 해상을 장악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하겠지만, 공식적으로 흑태자의 조약이 파기된 게 아니니 눈치는 볼 테고요.”

로벨은 시 서펜트 망토를 여미고 늑대성 언덕 아래 시가지를 보았다. 크고 작은 불빛이 망토의 본래 주인처럼 꾸물거렸다. 귀를 기울이면 멀지 않은 곳에서 음악과 웃음이 들려왔다.

“내가 할 일은 뭐야?”

로벨이 진지하게 물었다. 어린 집사는 로벨이 보는 것을 따라 보았다. 평소에는 기름과 땔감 아낀다고 불을 피우지 않았는데, 오늘은 달랐다. 축제의 열기가 골목골목 가득했다. 어린 집사는 고개를 돌려 로벨을 보았다.

살짝 삐뚤어진 알루미늄 왕관 아래 깊고 차분한 눈과 자존심으로 우뚝 솟은 코와 고집스럽게 닫힌 입술이 보였다. 4, 50가구의 작은 농촌을 크고 화려한 도시로 바꾸어낸 왕의 얼굴이었다.

“충분히 하셨어요.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으니까 이제 좀 쉬세요.”

괴물들을 소탕하고, 봉신들을 다독이고, 잉그비아 왕국 사절의 콧대를 꺾은 것만 말하지 않았다. ‘로벨 로드릭’이란 이름으로 달려온 모든 시간을 말했다. 그런데 좀 감성적이었던 모양이다. 로벨의 표정이 이상했다. 로벨을 경호하기 위해 따라온 애꾸눈과 첨탑 근무자 표정도 이상했다.

“세상에... 어린 집사 입에서 쉬라는 말이 나오다니...”

“화난 거 아니야? 화나서 아무 말이나 하는 거 같은데?”

“아니, 폐하. 또 무슨 잘못을 하신 겁니까?”

“나, 나 아니야. 진짜 아니야.”

어린 집사는 이마를 짚었다. 생각을 잘못했다. 저 도시를 만든 것은 왕이 아니라 아무래도 자신인 듯했다.

“가서 뒷정리나 하세요! 아닛! 공왕 폐하는 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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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가쁜 가을이 지나자 숨넘어가는 겨울이 바쁘게 찾아왔다.

저녁에 입김이 맺히나 싶더니 새벽에 서리가 앉고 아침에 진눈깨비가 내렸다.

“어? 눈이다.”

콩을 쑤어 마구간으로 가져가던 로벨이 하늘을 보았다. 자연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새하얀 것이 코끝에 닿았다. 겨울을 알리는 첫눈이었다. 때 이른 첫눈에 여기저기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집사님! 집사님! 첫눈이에요!”

“아, 좀! 눈 처음 봐요?”

“아우우우- 아우우-”

“오오! 천사님의 비듬이다! 빗자루 가져와!”

“금방 그칠 것 같은뎁쇼?”

“가져오라면 가져와! 빙판길에 자빠져서 꼴사납게 은퇴하기 싫으면!”

“푸히히히힝-! 푸르- 푸르릉-!”

로벨은 익숙한 소음에 미소 짓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모닝스타 이하 심심한 말들이 여물 냄새를 격하게 반겼다.

“워. 워워. 진정해. 차례대로 줄게.”

축사 울타리 아래 여물통을 밀어 넣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겨울 특식’을 부었다. 유일한 낙이 먹는 것인 말들은 콧바람을 일으키며 여물을 들이마셨다. 과장이 아니었다. 씹는 동작이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먹어. 안 뺏어 가.”

로벨은 모닝스타의 등을 두드린 후 축사 안으로 들어갔다. 신수(神獸)니 뭐니 해도 먹은 게 있으면 나오는 게 있는 법이었다. 간밤에 내놓은 덩어리가 가득했다. 쇠스랑으로 짚과 함께 긁어냈다.

“푸히잉-!”

먹이고, 치우고, 깨끗한 짚을 깔아주자 모닝스타가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덩치 때문에 부담스러운 애교였다. 그래도 아무나 볼 수 있는 애교가 아니었다.

“공왕 폐하! 공왕 폐하!”

왕이 머물 아성을 건너뛰고 곧장 마구간으로 달려온 전령이 있었다. 무슨 왕이 천한 마구간지기 노릇을 하느냐고 어이없어하지 않았다.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당연한 일이었다.

“크르르르르르...”

주인과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받은 모닝스타가 으르렁거렸다. 늑대 남매한테 배운 듯한 하울링이었다.

“나야! 나! 이제 좀 알아보자!”

로벨은 쇠스랑을 치우고 낯익은 전령을 보았다. 허풍쟁이가 모닝스타를 피해 뒷걸음쳤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아침은 로벨의 개인 시간이었다. 마녀 키르케도, 펄프 대장도 어지간히 큰일이 아니면 찾지 않았다. 그것을 모를 허풍쟁이가 아니었다. 필히 중요한 소식일 것이다.

“사트로 가문에서 사람이 왔습니다요! 볼프 사트로 후작의 사람이요!”

역시는 역시 역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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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공왕과 볼프 사트로 후작은 좋게 말하면 숙적이고, 정직히 말하면 원수였다.

두 가문의 직접적인 전쟁만 세 번이고, 마상시합과 봉신들의 싸움을 합치면 두 자릿수로 마찰을 빚었다. 대부분, 아니, 전부 다 로벨이 이기긴 했지만, 그것이 평화나 화해를 뜻하지 않았다. 세간의 평은 오히려 최악을 달렸다.

“로드릭 가문과 사트로 가문이 손을 잡는다? 포클랜드의 겁쟁이들이 기겁하겠군.”

“뭘 새삼스럽게.”

그러나 현인의 말마따나 소문은 믿을 게 못 되었다. 세간의 인식과 달리 로벨과 볼프 후작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네일 공국 내전이나 악마추종자 준동으로 여러 번 협력했으며, 가끔씩이지만 안부편지도 주고받았다. 정확한 평은 라이벌에 가까우며, 조심스럽게 부르면 친구라 할 수 있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협력할 수 있었다.

로벨은 왕관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다가 어린 집사 따가운 눈총을 받고 슬그머니 머리에 올렸다. 백만 페닝짜리 보물로 손장난하는 것은 보기 좋지 않았다. 말똥 냄새를 풍기면 더욱 그랬다. 사트로 가문의 기사가 웃음을 참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럼 후작님께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그러시오. 아, 급한 것 없으니 며칠 쉬었다 가도 되오.”

로벨은 계속해서 눈총을 받으며 예의를 차렸다. 그러나 사트로 가문의 충직한 기사는 정중히 거절했다.

“두 가문의 동맹을 적이 알아서 좋을 것 없습니다. 지켜보는 눈이 많지 않을 때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적이라... 그렇소. 볼탄 반도의 적이오.”

첫눈이 내리는 날, 적의 눈을 피해 동맹이 성사되었다. 볼탄 반도 역사에서 의미 깊은 동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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