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화. 대사
사냥은 기대 이상으로 즐거웠다.
시야가 탁 트인 평야라 그런지, 신경 쓸 게 없는 손님이라 그런지 기분이 몹시 좋았다. 로벨이 기분 좋으니 로벨을 따르는 기사들과 용병들도 기분이 좋았다.
호수성 하인들이 사냥터 한쪽에 천막을 치고 불을 피웠다. 은화 두 닢으로 하루 고용한 요리사와 도축업자가 갓 잡은 고기를 손질해 노릇노릇 구웠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타고 고기냄새가 멀리멀리 퍼져갔다. 호른 경이 고기를 받으러 가서 머쓱하게 말했다.
“짐승들이 전부 도망가겠습니다.”
“바람 방향을 잘 잡았으니 괜찮은 것이오.”
사실 괜찮은지 관심 없었다. 사냥감을 못 잡거나 부족하게 잡았을 때를 대비해 양을 몇 마리 끌고 왔다. 기사들이 배불리 먹고 남아서 아랫사람들한테 나눠줄 정도였다.
사슴무리를 쫓아 지평선까지 달려간 더스틴 폴라 경 패거리가 돌아왔다. 멀리서 봐도 의기양양한 것이 기어이 몇 마리 잡은 모양이다. 오늘 사냥의 최대 성과였다.
“불을 크게 피워라! 수사슴을 잡아 왔다!”
“머리는 박제해서 왕에게 바치고 가죽은 손질해서 장갑과 부츠로 만들어라. 고기는 마음껏 먹어도 좋다!”
기사들을 따라간 몸종들이 포대자루에 싸서 끌고 온 사슴을 펼쳤다. 가시덩굴 같은 뿔을 가진 우람한 수사슴이었다. 어린 종자들이 소리 내어 감탄했다. 사냥에 성공한 기사들 다음으로 좋아했다.
“이 정도 크기면 험블 파이(Humble Pie:사슴 내장 요리. 고기를 배당받지 못한 하급자에게 주어진다)는 만들 필요 없겠는데?”
“영주님께 물어봐. 통째로 구울 건지, 썰어서 구울 건지.”
통째로 굽는 것이 박력 있어 좋지만, 자칫 내일 아침에나 먹게 될 수 있었다.
머리와 가죽을 떼어내고 내장을 제거한 후 부위별로 토막 쳤다. 가장 크고 맛있는 가슴은 손님이 아니어도 왕인 로벨의 몫이었다. 갈비 양쪽은 왕의 수행기사인 호른 경과 사냥감을 잡은 폴라 경, 다리 네 짝은 호수성의 기사들에게 돌아갔다. 그래도 남은 고기가 꽤 있어 기사 종자와 시종에게도 한 접시씩 돌아갔다.
“인정해야겠소.”
“무엇을 말입니까?”
“들판에서 사냥하는 것도 좋소.”
로벨은 헛기침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헤르만 백작은 누구보다 강하기에 누구보다 순진할 수 있는 왕을 위해 독설을 삼켰다.
“다음에 오시면 매사냥(Falconry)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매사냥? 매를 잡아서 무엇하오? 맛이 좋소?”
“...매를 잡는 게 아니라 매로 잡는 겁니다. 아니, 매를 잡아도 좋긴 한데, 그걸 먹을 생각은 한 적 없군요.”
순진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건지도 모른다. 바꿔 말하면 멍청해도 왕이 될 만큼 무지막지하게 강하다. 그래서 목구멍까지 올라온 조롱을 필사적으로 눌러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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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과 달리 하루 더 호수성에 머물렀다.
헤르만 백작이 사슴 머리와 가죽을 간단히 손질해 진상할 테니 기다려 달라 부탁하고, 더스틴 폴라 경의 늙은 말과 망아지처럼 뛰어다닌 세 용병이 지쳐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린 집사가 좋아하겠어.”
초원에 사는 우두머리 사슴이라 그런지 크기도 크고 빛깔도 고왔다. 솜씨 좋은 무두장이가 제대로 손질하면 가치 있는 상품이 될 것이다.
“가만, 폴라 경이 잡은 거니까 폴라 경에게 줘야 하나?”
로벨이 불안한 눈빛을 보냈다. 우정 하나로 볼탄 반도를 누벼온 동방의 기사는 욕심이 없었다.
“본인은 됐소. 늑대성에 가면 화살이나 몇 개 챙겨주시오.”
그러고 허전한 전통(箭筒)을 가리켰다. 사냥꾼과 달리 상시 임전태세를 갖춘 기사라 ‘무려’ 30발을 가지고 나왔는데, 계속되는 전투와 사냥으로 대부분 소진했다. 기회가 될 때마다 회수한 것이 그 정도였다.
“흠... 뱀파이어 놈들한테 쫓길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우리 폐하가 좀 그래요. 곁에 있으면 바람 잘 날이 없죠.”
허풍쟁이가 이죽이죽 웃으며 말했다. 여행 중에 제법 친해진 듯 농담을 주고받았다. 사실 농담이 아니란 것은 몰랐다.
로벨은 화살쯤은 얼마든지 가져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화살 하나 가격도 그리 싼 것은 아니라 어린 집사가 들으면 쌍심지를 켜겠지만, 그 정도는 우정으로 감당할 수 있었다.
로벨 일행은 메튜 경의 늪지성을 지나 다시 북쪽으로 올라갔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영주와 지주가 찾아와 잘 익은 술과 살찐 짐승, 기름과 모피 따위를 진상했다. 20명 남짓한 일행이 배불리 먹기 충분한 양이었다.
그렇게 나흘이 지나자 낯익은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키 작은 초목들과 불규칙한 바위들과 먼지 나는 흙길이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말할 수 있지만, 로벨의 눈에는 분명 낯이 익었다.
“저기 멧돼지처럼 생긴 바위 뒤에 허리가 굽은 참나무가 있을 거야.”
로벨의 말은 300야드 뒤에 사실로 판명되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마침내 돌아왔군요.”
“드디어 돌아왔소.”
로벨이 나고 자란 고향, 로드릭 공왕령에 도착했다. 집에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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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들의 지혜가 대부분 그렇지만,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것은 진리였다. 전령도 보내지 않았는데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리암 수사, 펄프 대장, 그람 형제 등등을 비롯해 백여 명이 마중 나왔다.
“공왕 폐하가 오셨다!”
“공왕 폐하 만세! 우리 폐하 만세!”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개선장군이라 오해할 것이다. 하지만 잘 알고 보면... 알고 봐도 이해가 안 되었다.
“왜 저러는 거야?”
“그, 글쎄요?”
로벨의 인기가 좋다고 하지만, 서른 날 정도 자리를 비웠다고 생업을 팽개치고 만세 부르러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아, 그래. 나 왔어. 잘 지냈지? 뚱보 징수관은 더 쪘네?”
“그람 징수관입니다! 그람이요!”
어쨌든 환영해주니 기쁘게 호응했다. 내킨 김에 시장도 한 바퀴 돌고 북문까지 올라가 병원도 한 바퀴 돌았다. 시민들 얼굴에 지루함과 짜증이 살짝살짝 보일 때쯤 제1중대 1소대 울프 용병단을 해산하고 측근들과 함께 늑대성으로 향했다. 주위에 눈이 줄어든 후에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잉그비아 왕국의 사절이 찾아왔어요. 자기가 새로운 대사(大使)래요.”
흑태자가 파견한 이전 대사는 귀국하고, 리처드 2세가 임명한 새로운 대사가 찾아왔다. 아니, 존 오브 곤트 공작이 임명한 대사였다.
“그럼 아까 환영인파는?”
“공왕 폐하께서 도적을 소탕하러 갔다고 했거든요.”
“응?”
“잉그비아 왕국 사람한테 전쟁 준비하러 바쁘다고 할 수 없잖아요. 그리고 뭐, 거짓말도 아니잖아요. 도적 소탕했잖아요?”
“도적‘도’ 소탕했지. 그럼 진짜 개선식이었네?”
로벨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다가 점점 심각해졌다. 그저 대사 하나가 교체됐을 뿐이지만 의미하는 바가 컸다. 리처드 2세와 존 곤트 공작이 정권이 장악하고 내실 다지기에 들어간 것이다.
“그 대사는?”
“오늘은 피곤하니까 내일 오라고 했어요. 아니면 승전축하연회 때 오던가.”
“또 연회야?”
“또라니요?”
“응? 아니야. 아니야. 말이 잘못 나왔어.”
아무튼 어린 집사다운 현명함이었다. 실제로 손님을 만나지 못할 만큼 바빴다. 고작 22명 동원했을 뿐이지만 전투가 잦았던 탓에 포상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리고 밀린 서류도 한 더미였다.
가을 작황에 따른 예상 소출과 사용처, 철광산, 금광산, 소금광산의 정기결산, 늑대도로와 북부대로의 상반기 통행세, 인어해 상단의 운항 보고서, 크레타 시티 총독의 상반기 보고서, 로드릭 상회의 정기 보고서, 공식·비공식 외교 서신들과 제후들의 탄원서 등등.
시장 상인들의 소송이나 황금보리 수도원의 행사 요청이나 마녀 키르케의 놀아달라는 징징거림은 어린 집사와 리암 수사 선에서 정리하고, 굵직한 서류만 모아 이 정도였다. 사실 유능한 행정관이 도와주니 하루나 이틀이면 처리할 수 있지만, 게으른 왕은 그 짧은 시간조차도 괴로워했다.
“그리고 이건 추수제 예산안이요.”
“아직도 남았어?!”
“이것도 최대한 줄여준 거예요. 성벽 보수공사 자금 내역이나 병원 유지비 지원항목이나 노스폴드 시티 상인의 항의서 같은 것도 직접 보실래요?”
“아, 아니... 미안...”
“처신 잘 하시라고요.”
집무실 책상 앞에서는 상하관계가 바뀌었다. 로벨은 열심히 할 테니 봐달라는 듯 서류를 넘겼다. 어차피 작년하고 비슷할 테니 최종 예산만 확인하면...
“아니네?”
“뭐가요?”
“작년하고 다르잖아? 뭐가 이렇게 많아?”
“...앞장부터 꼼꼼히 보시라구요.”
어린 집사는 ‘정말 나 없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툴툴거린 후 펜이 아니라 혀로 설명했다.
“추수제 기간에 어제 말한 승전축하연회도 함께 할 거예요. 그리고 겸사겸사 잉그비아 왕국의 대사를 초대하고요.”
“그 대사가 승전에 무슨 기여를 했는데?”
“그게 아니라요. 그냥 같이 축하하라고 부르는 거죠. 아니, 아니, 이상한 걸로 낚지 마세요. 외교잖아요. 외교!”
어려운 단어가 나왔다. 뜻이 어려운 게 아니라 사용이 어려웠다.
“외교?”
“리처드 2세 왕, 사실은 존 곤트 섭정의 속내를 알아내야죠. 저쪽도 뭔가 할 말이 있으니 만나자고 했을 테고요. 오늘도 알현 요청이 들어왔어요.”
“그래? 그럼 불러와.”
로벨은 서류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 싶어 승낙했다. 그러나 종이와 숫자의 악마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국정업무가 밀려서 오늘도 힘들다고 했어요. 이것도 거짓말은 아니죠.”
“왜? 대사를 만나는 것도 국정이잖아?”
“물론! 잠깐 짬을 내서 만나는 건 어렵지 않죠. 하지만 기왕이면 위세를 보여야죠.”
“그런 건 실례인데...”
“얕보이는 것보단 낫죠. 그래서 승전축하연회에 초대했어요.”
로벨은 추수제 예산에 슬그머니 끼워져 있는 늑대성 연회 예산을 보았다. 페닝의 앞자리가 대단했다.
“허세 떨 때는 정말 안 아끼는구나?”
“허세가 아니고 위세요. 만만하게 보이지 않아야 우리 걸 욕심내지 않죠.”
혹은 젊은 왕을 모시는 젊은 집사의 오기일지도 모른다.
로벨은 작년보다 2배 가까이 많은 축제 비용을 쭉 살핀 후 사인했다. 어린 집사 말은 대체로 옳으니까 이번에도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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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그 후로도 사흘 동안 집무실에 감금당했다. 대체로 옳지만 딱히 정의롭지는 않은 어린 집사는 계속해서 새로운 결제 서류를 끼워 넣었고, 정신 차렸을 때는 처음에 보기로 한 서류보다 2배 가까이 처리한 뒤였다.
“이렇게 부지런히 일하시다니! 위대한 왕! 훌륭한 왕! 무적무패의 왕! 끔찍하게 많은 종이 악당조차 우리의 왕을 이길 수 없다!”
“에헴! 에헴!”
어린 집사는 로벨의 약점을 마구 공략한 후 결제된 서류를 챙겨 1층으로 도망갔다. 100개의 칼과 1,000개의 창으로도 막지 못하는 무적무패 왕이 칭찬에 쉽게 무너진다는 것을 누가 믿어줄까. 화낼 타이밍을 놓친 로벨은 찝찝한 기분으로 아성을 나왔다.
가을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햇살은 자상하게 살갗을 어루만지고 바람은 상쾌하게 머리를 빗어 넘겼다. 일찍부터 식곤증에 빠진 초병은 창대에 기대서 꾸벅꾸벅 졸았고, 옛날 같으면 득달같이 달려가 엉덩이를 깨물어줄 아야와 이야카도 게으른 얼굴로 하품을 터트렸다.
“역시 바깥 공기가 좋아.”
로벨은 뒷짐을 쥐고 경쾌하게 정원을 가로질렀다. 마구간을 몰래 빠져나온 모닝스타가 입술을 뒤집고 반가워하다 처지를 깨닫고 여물통에 머리를 숨겼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가 감정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앗, 폐하! 안녕하세요?”
“어머! 공왕 폐하시잖아?”
저녁거리를 가져온 마을 아낙들이 로벨을 보고 꾸벅 인사했다. 오래된 로드릭 마을 주민이라 하나하나 반가운 얼굴이었다.
“부엌에서 쉬었다가 가. 치즈가 조금 남았을 거야.”
“에이, 폐하 드실 거에 어떻게 손을 대요. 어린 집사가 알면 머리채 뜯겨져요.”
깍쟁이 어린 집사라도 아침저녁으로 매일같이 음식을 가져다주는 원조 로드릭 주민을 괴롭히지는 못했다. 로벨은 손짓으로 작별 인사하고 열심히 조는 초병을 지나 성문을 나갔다. 모닝스타를 두고 온 만큼 멀리 갈 생각 없었다. 그리고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반가운 얼굴은 늑대성 주변에서 전부 찾을 수 있었다.
“공왕 폐하,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로벨은 마침 말을 타고 돌아온 기사를 반겨주었다.
“그대가 보여서 그런 모양이오.”
로벨치고 애틋한 말이었다. 저물어가는 여름꽃 사이로 웃음꽃이 살포시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