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01화 (501/605)

501화. 토끼

로벨 일행은 전리품과 부상자를 챙겨서 호수성으로 출발했다.

조금 서두르는 감이 있지만, 폭풍성에 남아도 딱히 할 일은 없었다. 도시의 정책이나 향후 방침은 조언할 수 있으나 세 자릿수 이상의 복잡한 숫자가 오가고 공용어로 보이지 않는 난해한 법률용어가 등장하는 실무는 도울 수 없었다. 그것은 폭풍성의 유능한 행정관과 헌금이란 이름의 생활비를 받아온 옛 신의 사제들 일이었다.

“새로운 헤르만 백작은 보통이 아니더군요.”

호른 경이 스쳐 간 풍문을 되새기며 말했다.

치정 싸움으로 불명예스럽게 죽은 몰드 헤르만 백작을 대신해 볼트 헤르만 전(前)백작의 이종사촌 데이드 ‘텅스턴’ 자작이 헤르만 가문에 입적하여 새로운 호수성 백작이 되었다.

“으... 머리 아파...”

최소 300년 묵은 볼탄 반도 호족 가문이라 족보가 복잡했다. 따지고 보면 버팅거 가문과 랭스터 가문도 헤르만 가문의 방계였으니 뿌리가 참으로 깊고 단단했다. 더스틴 폴라 경이 기죽은 늙은 말의 목덜미를 두드리며 말했다.

“성격이 안 좋소?”

로벨과 호른 경은 로드릭 시티에서 만난 데이드 ‘헤르만’ 백작을 떠올렸다.

“좋게 말하면 헤르만 가문 사람 같지 않소.”

“나쁘게 말하면?”

“...헤르만 가문 사람 같지도 않소.”

핏줄에 대한 편견일 수 있지만, ‘헤르만’이라 하면 어쩐지 음흉하고, 치사하고, 기회주의자 같았다. 물론, 대놓고 그리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음흉하고 치사한 적은 피곤하니까.

“흐음... 새 백작은 그렇지 않단 말이군.”

로드릭 시티 토너먼트에서 몇 번 마주쳤지만, 뱀파이어 군주와 마상시합 때문에 주의 깊게 살피지 못했다. 더스틴 폴라 경은 저쪽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희망사항이었다.

“공왕 폐하, 패트릭 호른 경, 더스틴 폴라 경, 호수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데이드 헤르만 백작은 호수성 3마일 밖까지 마중 나왔다. 지나치게 과한 환대지만, 딱히 굽신거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귀찮게 귀한 분이 오셨으니 성가셔도 성의를 다해주마’ 느낌이었다.

“수준 낮은 제후들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더군요.”

“아... 음. 그렇게 말할 것까지 있소?”

“제 딴에는 ‘저급하고 저능하여 혈통 외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제후들’을 점잖게 표현한 것입니다.”

데이드 헤르만 백작은 선대들과 달리 솔직했다. 좋은 뜻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욕설을 넘어 고혈압 공격이라 칭할 만했다. 로벨은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 포기했다. 데이드 헤르만 백작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제 성과 제 마을은 경제적으로 안정적입니다.”

로벨 뿐만 아니라 울프 용병단도 기뻐했다. 이제야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했다.

“제 아랫사람들은 그렇지 못하지요.”

“백작의 아랫사람이면... 혹시 호수성의 기사들을 말하는 거요?”

호른 경이 당황해서 물었다. 백작 얼굴에 짜증이 보였다.

“그 외 다른 사람이 있겠소?”

그러자 호른 경 얼굴에 당혹감이 피어났다. 어느 성, 어느 영지나 말썽이 있었다. 로벨은 고삐 채워진 망아지처럼 마지못해 물었다.

“본인이 도울 일이 있소?”

그 말을 기다렸을 것이다. 괜히 3마일이나 마중 나온 것이 아니었다.

“호수성에 보름만 머물러 주십시오. 그걸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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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쉬운 부탁이었다.

도적떼를 잡아 달라, 반란군을 잡아 달라, 토너먼트만 허락하고 빨리 사라져 달라 등등에 비하면 정말 쉽고 간단했다. 성격은 안 좋아도 능력은 좋은 데이드 헤르만 백작은 왕의 힘과 지혜가 아닌 권위만 빌렸다.

“역시 정통성이 문제지요.”

10년도 안 되어 호수성의 주인이 두 번 바뀌었다. 게다가 새 주인은 ‘진짜 헤르만’이 아니었다. 봉신들 사이에서 말이 많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방계’의 불만이 많을 것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더 큰 정통성이었다. 로벨이 에릭 프란시스 공작을 꺾고 볼탄 반도의 주인이 됐을 때 괜히 포비아 국왕을 만나러 간 것이 아니었다.

“본인이 볼 때 정통성보다 성격 탓이 더 큰 것 같소.”

“부정은 못 하겠군.”

기사들이 피식- 웃었다. 그러나 반쯤은 진담이었다. 페르젠 ‘주니어’ 백작이 치를 떠는 이유가 있었다. 대놓고 욕하고 직설적으로 조롱하는데, 명문가의 기사가 아니었으면 일찍이 칼빵 맞고 옛 신의 품을 찾아갔을 것이다.

그래도 손님 입장에서 지내기 나쁘지 않았다. 데이드 헤르만 백작은 들숨 날숨 중 절반을 ‘공왕 폐하를 위해서...’에 할애했고, 그 결과 파도성, 구릉성보다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매 끼니마다 후추가 한 숟가락씩 사용되고, 추출하다 싶으면 설탕과 계피를 넣은 쿠키를 한 바구니씩 가져다주었다. 헨리 상회장에게 은밀히 부탁해도 구하지 못한 에르나 왕국의 최신 기사 소설 ‘돈 키졸테’ 신간도 선물 받았다.

“에르나 왕국 기사들이란... 깔깔!”

“...에르나 왕국 기사만 조롱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튼 경제적 어려움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동부평야의 넓은 농토를 차지하고 10년간 굴렸으니 당연했다. 조단 랭스터 경이 땅을 되찾고 싶어하는 게 이해됐다.

“그런데 벌써 닷새입니다. 보리를 많이 심은 뉴 로드릭 마을은 지금쯤 수확을 시작했을 겁니다.”

로벨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다 멈칫했다.

헤르만 백작은 보름간 머물러 달라 했지만, 로벨은 일정이 바빠 힘들 것 같다고 거절했다. 추수제를 준비하고 겨울맞이를 갖추려면 할 일이 많았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성주가 성을 오래 비우면 안 좋았다.

“어린 집사랑 펄프 대장이 있으니까 도둑 걱정은 없지만...”

로벨은 책을 덮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짓는데, 입가에 과자 부스러기가 가득해서 멋있지 못했다.

“잉그비아 왕국의 일을 전했으니 슬슬 늑대성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소.”

“덩굴성에 들리지 않고 말입니까?”

“여름에 입은 피해가 큰데 우리가 찾아가면 민폐잖소.”

붉은 산도 비슷한 이유로 방문을 취소했다.

“그러면 곧장 늑대성으로 가면 되겠군요?”

길고 긴 볼탄 반도 순행이 끝났다. 그러나 로벨의 권위를 알뜰살뜰 써먹고 있는 헤르만 백작의 생각은 달랐다.

“벌써... 벌써 가신단 말입니까?”

로벨은 미리 준비한 대사를 읊었다.

“백작의 얼굴을 보았고 호수성의 건재함을 확인했으니 더 머물 이유가 없소.”

“그러나... 내일은 사냥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여러 기사들이 공왕 폐하를 뵙고자 찾아올 겁니다.”

“사냥?”

로벨의 두 눈이 반짝였다. 자고로 사냥을 싫어하는 기사는 없었다. 쇠붙이와 가죽이 기량으로 교환되고 피와 고기가 승리감을 고양시키는 즐거운 축제였다. 바위처럼 딱딱한 머리가 모처럼 매끄럽게 돌아갔다.

‘더스틴 폴라 경이랑 애꾸눈 볼포스가 있으니까...’

늑대성이 망신당할 일은 없었다. 로벨은 뒷짐 쥐고 못 이기는 척 말했다.

“그럼 사냥에만 참석하겠소. 기사들이 멀리서 온다니까 어쩔 수 없군. 아, 어쩔 수 없네.”

호른 경은 미소 짓고, 폴라 경은 한숨 짓고, 솔직해서 짜증나는 헤르만 백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사냥 장소와 시간을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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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성의 사냥은 늑대성의 사냥과 달랐다.

겨울에 쓸 식량과 가죽을 구하는 목적은 비슷하지만, 대상이 숲짐승이 아니라 들짐승이었다.

“호수 주변의 숲은 늪이 많아 위험합니다. 사냥감도 작고 초라하지요.”

“하지만 이곳은...”

로벨이 난색을 보였다. 평야에서 사냥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방팔방 지평선뿐인 허허벌판은 아니지만, 살아있는 것은 인간과 인간이 타고 온 짐승 외에는 보이지 않는 황량한 평야이기는 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오. 숨어있는 것들이 상당히 많소.”

더스틴 폴라 경이 활과 화살을 준비하며 말했다. 기사 체면이 상할까봐 울프 용병단 셋을 붙여주었는데 어지간한 것은 혼자 다 했다. 사냥감을 분해하고 옮길 때나 일을 시킬 것 같았다. 사냥감이 있으면 말이다.

“어디에 숨어있다는 것이오?”

“지금 공왕이 보는 모든 곳에 숨어있소.”

로벨은 폴라 경의 늙은 말 엉덩이를 뚫어져라 보았다. 이상한 시선을 느낀 폴라 경이 뒤늦게 돌아보았다.

“아니, 거기 말고. 지금 웃기려고 그러는 것이오?”

솔직히 웃기긴 했다. 호른 경이 머리를 돌리고 숨소리를 삼켰다. 로벨은 얼굴을 붉히고 따져 물었다.

“어디에 있고, 어떻게 찾을 수 있소?”

“우선 냄새를 잘 맡는 짐승이 필요하오. 예를 들어...”

때마침 헤르만 백작의 시종이 성 밖에서 가져온 마차를 열었다. 인간의 오랜 친구이자 사냥 동지, 양치기의 동업자이며 문지기의 라이벌이 맹렬한 기세로 뛰쳐나왔다.

“컹! 컹컹!”

“왈! 왈! 왈! 왈!”

큰 개도 있고 작은 개도 있었다. 아야와 이야카에 비하면 빈약하지만, 제법 사납게 생긴 사냥개였다.

“매, 독수리, 올빼미 따위를 이용하기도 하는데, 이곳은 개를 사용하는군.”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세히 들을 수 없었다. 헤르만 백작이 사냥개를 풀었다.

“크르르릉-! 컹! 컹!”

“저쪽입니다! 나으리들! 저쪽이요!”

더스틴 폴라 경의 말대로 많은 짐승이 숨어 있었다. 사냥개는 사람의 눈높이에서는 보이지 않는 땅굴에 주둥이를 박고 열렬히 짖었다. 그래도 나오지 않자 앞발로 사정없이 파헤쳤다. 겁에 질린 야생짐승은 이럴 때를 위한 반대쪽 굴로 도망 나왔다. 짐승에게 안 된 일이지만, 그렇게 행동하기를 기다린 인간이 한 다스였다.

“이야! 토끼다!”

“시작이 좋소이다!”

첫 사냥감치고 나쁘지 않았다. 쥐나 두더지가 나올 때도 많기 때문이다. 기사들이 신나서 말을 몰아갔다.

토끼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시끄러운 사냥개를 피해서 도망 나오니 덩치 큰 인간과 더욱 큰 말(馬)이 자기 잡겠다고 몰려오는 것이다. 심지어 뾰족한 막대기까지 쏘아댔다. 재빨리 다른 굴에 숨으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아니, ‘한 발’ 늦었다.

“맞았다! 맞았다!”

“누가 쏜 화살이냐?”

자기 화살을 못 찾을 만큼 어리숙한 기사는 없었다. 부정, 부정, 부정의 제스처가 차례로 나오고 마침내 긍정이 나왔다. 제일 뒤에서 쫓아온 더스틴 폴라 경이었다.

“오오, 왕의 대리인다운 솜씨요.”

“과연 동방출신은 다르군.”

울프 용병단이 달려가 토끼와 화살을 챙겼다. 잘 먹은 가을 토끼라 덩치가 제법 컸다. 스코어를 매기는 사람은 없지만 경쟁심에 불이 붙었다. 호수성에서 호수성 기사 명성에 흠을 낼 수 없었다.

“다음! 다음 사냥감은 어디냐!”

“사냥개를 더 풀어라!”

로벨은 떠들썩한 사냥을 흡족하게 보았다. 저 정도 기상이면 잉그비아 왕국과 싸울 때 크게 활약할 것이다.

“갓 잡은 토끼가 맛있고 말이야.”

“그 이유가 더 큰 것 같군요.”

로벨은 부정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즐거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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