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화. 푼수
버팅거 시티 중심부로 하루에도 수백 명의 시민이 지나가는 폭풍성 대로(大路)가 텅 비었다.
골목 사이로 쿼럴이 날아들고 배수로를 따라 핏물이 졸졸 흐르면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간이 다른 장기보다 비대하거나 호기심이 여타 본능보다 강렬한 사람은 어디 가나 있었다. 세 블록쯤 떨어진 옥상과 고층 발코니에 모여 양측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누가 이기고 있어?”
“거의 비슷해.”
불구경보다 재미난 것이 싸움구경이었다. 세 자릿수의 무장 용병이 서로 죽고 죽이니까 관객 입장에서 흥미진진했다.
“저쪽이 왕의 군대지? 역시 대단하네.”
숫자는 도시 용병의 절반, 아니, 절반의 절반밖에 안 되는데 무서운 기세로 밀어붙였다. 반면, 평소 무시무시해 보이던 폭풍성의 병사들은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근데 누가 이기는 게 좋은 겁니까요?”
하루 세끼 먹는 것 외에 관심 없는 반푼이 노동자가 물었다. 옥상에 여러 눈이 모였다가 흩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랭스터 남작이 혼쭐났으면 하지만...”
지혜로운 공장장이 중얼거렸다. 하루 벌어 하루 산다고 세상 사는 지혜가 모자라지 않았다. 영주가 쫓겨나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더 많은 피가 흐를 것이다. 왕이 죽거나 다치면 말할 것도 없었다. 각지의 제후들이 복수의 깃발을 걸고 쳐들어올 것이다. 영주의 폭정을 막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그 결과가 피 웅덩이와 잿가루로 남길 바라지 않았다.
“우리의 왕은 무적이고 무패라지 않소?”
“그 왕이 어디 있는데? 성 안에 숨어 있잖아?”
전쟁터에 불려간 적 없는 도시민이라 ‘무적무패’가 와 닿지 않았다. 오늘까지는 말이다.
유독 주의가 산만한 소년이 멀찍이 떨어진 무언가를 발견했다. 겁도 없이 폭풍성 대로를 가로지르는 기사들이었다.
“하얀 말... 하얀 갑옷...”
“맞아! 무적무패 왕이 그리 입고 나타나면 반드시 승리한다... 한다고...?”
말발굽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가 빠르게 멀어졌다. 호기심 하나로 뭉친 시선들이 뒤늦게 쫓아갔다. 오후 햇살에 반짝이는 갑옷과 투구. 갈기와 꼬리 빼고 새하얀 전투마. 수직으로 세운 원뿔모양 창과 허리 아래 기다란 칼집이 현실보다 동화에 가까운 ‘기사’ 모습이었다. 그 자태에 감탄한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무적무패 왕이다!”
“그랜드 챔피언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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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폴라 경은 폭풍성 언덕을 돌며 조금씩 속도를 올렸다. 전장의 소음이 커지고 피 냄새가 짙어지자 호흡이 빨라졌다. 그러나 반대로 머리는 차가워졌다. 시속 30마일 속도로 달리면서도 주위의 풍경을 하나하나 관찰할 수 있었다.
가을바람에 시들어가는 꽃잎. 방치된 지 사흘쯤 된 가축 배변. 빨간 벽돌 사이에 간간이 끼어 있는 갈색 벽돌. 넋 놓고 구경하는 창가의 꼬마와 그 꼬마를 화급히 숨기는 중년 부인 등이 한눈에 들어왔다.
“...보인다.”
전장의 주역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전투마에서 내려 칼질하는 랭스터 경과 울프 용병단을 독려하는 호른 경이 보이고, 거기에 맞서 창과 분노와 괴성을 찌르는 앙겔스 경 패거리가 보였다.
초반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싸움이 난잡했다. 폭풍성의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하고 있고, 전열이 사라진 울프 용병단은 사격을 포기하고 냉병기로 버티고 있었다. 앙겔스 경 이하 반란군도 성치는 않았다. 전열은 방진을 뚫지 못해 압사할 것처럼 뭉쳐있고, 후열은 쿼럴에 맞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무방비하게 흩어져 있었다.
로벨과 폴라 경은 시선을 한번 교환하고-겉보기에는 폴라 경 혼자 힐끔하고- 표적을 정했다. 목청껏 소리 지르는 반란군 기사들이었다.
“킹(King)을 잡으면 이기는 것이 체스의 룰이지!”
킹으로 킹을 잡으러 가니까 억울할 것 없었다. 로벨을 잡으면 단숨에 이기는 것은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킹이 최강의 말 퀸이란 것은 비밀이었다.
로벨은 해비 랜스를 앞으로 기울여 랜스 레스트에 끼우고 모닝스타의 옆구리를 세게 때렸다. 네 발이 땅을 스칠 때마다 점차 빨라졌다. 시속 33마일, 시속 35마일, 시속 40마일... 평범한 전투마가 낼 수 있는 속도를 넘어섰다.
“어, 어어? 어! 어!”
앙겔스 경 패거리가 로벨을 발견했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제대로 된 상황 묘사가 나오지 않았다. 머리보다 몸이 빠른 기사는 즉시 칼을 빼들었고, 관성에 젖은 기사는 창을 가져오라 소리쳤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한발 늦었다. 최고속도로 달려오는 그랜드 챔피언을 막을 수 없었다.
“로드릭 가문의 로벨 로드릭! 볼탄 반도의 왕!”
이 와중에도 기사다운 소개를 빼먹지 않았는데, 정신이 없어 들은 사람이 없었다. 로벨의 창이 조를 앙겔스 경의 가슴을 찔렀다. 아니, ‘때렸다’가 옳았다. 건장한 체구의 앙겔스 경이 마른 옷가지처럼 날아올랐다. 낙마의 고통은 없었다. 날아오르는 순간 기절했으니까.
로벨은 창을 놓고 앙겔스 경의 비행을 조금 따라가다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버팅거 호수의 요정이 선물한 칼이 버팅거 시티 심장부에서 자태를 뽐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기사도, 말도, 무기도 모두 아름다웠다.
“반란의 주동자가 쓰러졌다!”
기사들 들으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언덕길에서 밀고 당기는 용병들 들으란 소리였다. 고용주가 사라지면 싸울 이유가 1온스도 없는 게 용병이었다.
“크윽...! 무적무패 왕!”
풍운을 꿈꾸는 기사가 재빨리 도전했다. 곧장 로벨을 쓰러트리면 무너진 균형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그랜드 챔피언, 공인 소드 마스터, 무적무패 기사라 해도 혼자였다. 다 함께 덤비면 이길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로벨은 혼자가 아니었다.
핑-
쇠촉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섬뜩하다. 표적이 된 당사자라면 그냥 무서운 정도가 아니었다. 눈구멍에 한 발이 박히고, 고짓 플레이트 옆에 한 발이 박혔다. 전부 치명상이었다. 비명보다 빠르게 말에서 떨어졌다.
로벨은 쓰러진 기사를 피하는 세 번째 기사를 모닝스타로 들이박아 나란히 눕혀주고 반대쪽으로 아론다이트를 뿌렸다. 쇠와 쇠가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내었다.
“몽트 가문의 닥스 몽트!”
“좋은 결투였소!”
로벨은 칼자루를 슬쩍 밀었다가 도로 당겼다. 반사적으로 힘겨루기에 도입한 몽트 경은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로벨의 말대로 ‘좋은 결투’였다. 이기는 쪽은 항상 기분 좋으니까.
반란군 진영은 기사들이 뒤엉켜 난장판이 되었다. 더스틴 폴라 경을 잡기 위해 뛰쳐나간 기사와 기사 종자가 혼란을 가중했다. 그러자 전투보다 전쟁이 먼저 끝났다.
“계, 계속 싸워야 하나?”
“포위된 거 아니야?!”
앙겔스 경에게 고용된 용병들이 슬금슬금 발을 뺐다. 고용주가 죽었으니 이겨도 페닝을 받기 힘들었다. 고용주가 멀쩡한 용병도 비슷했다. 앞에서 칼질하는데 뒤에가 신경 쓰이면 싸울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칼침을 맞거나 체력이 바닥난 용병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감정의 골이 깊지 않으니 몸값만 지불하면 쉽게 풀려날 거라 생각했다. 그리 잘못된 생각은 아니었다.
“우리가 졌소! 항복이오! 항복!”
“아, 항복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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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팅거 시티 반란은 사흘 만에 완전히 진압되었다.
앙겔스 가문을 비롯한 반란 주동자는 작위와 재산을 몰수당했고, 그에 동조한 상인과 시민들은 가담 정도에 따라 교수형과 추방형에 처해졌다. 조기 진압된 탓에 쌍방 모두 피해가 크지 않았다. 그러나 깊어진 감정의 골은 쉬이 해결되지 않았다.
“조를 앙겔스 경은?”
“조금 전 사망했습니다.”
“시신과 무구를 돌려주고 장례의 편의를 봐주시오.”
어느 나라처럼 삼족을 멸하니 구족을 멸하니 호들갑 떨지 않았다. 우선 로벨에게 반기를 든 것이 아니라 랭스터 가문에 반기를 든 것이고, 우두머리가 ‘기사답게’ 전사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여론이 안 좋기 때문이지요.”
“...맞소.”
버팅거 시티 시민과 동부평야 기사들 사이에서 동조론이 강했다. 오죽하면 그랬겠냐 말이 심심찮게 나왔다. 여기서 본보기를 보이겠다고 기사 가문 사람들을 매달면 제2, 제3의 반란이 일어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지난 잘못을 만회할 때까지 피는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다.
“그것은 랭스터 경의 일이지요.”
“우리 일이기도 하오.”
로벨이 최초 목적을 상기시켰다. 봉신 가문이 이 모양 이 꼴이면 군사를 모으기는커녕 군대를 지원해야 할 판이었다.
“그럼 어찌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도울 것이오. 허나, 그래도 랭스터 경이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면...”
호른 경이 마른침을 삼켰다. 조단 랭스터 경의 작위를 몰수하고 새로운 영주를 임명...
“...회복하지 못하면, 뭐, 동부평야의 지원 없이 잉그비아 왕국과 싸워야지 않겠소?”
“그, 그렇군요. 역시 그럴 수밖에 없지요.”
충성맹세를 저버린 것도 아닌데, 그저 무능하단 이유만으로 영지를 몰수하면 다른 영주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현실적인 정치이자 봉건제도의 한계였다. 로벨이 할 수 있는 것은 ‘강도 높은 조언’밖에 없었다.
“어린 집사와 리암 수사가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쉬운 대로 늑대성의 정책을 알려주었소. 인두세와 토지세를 절반으로 줄이고, 곡물세를 걷지 않는 대신 짐말과 당나귀의 통행세를 늘리라 했소. 농민들이 많이 좋아할 것이오.”
동부평야의 주 수입은 밀과 보리였다. 곡물세를 걷지 않으면 곡물상인과 농민에게 돌아가는 것이 많아졌다. 가을추수가 코앞인 만큼 단번에 지지도가 올라갈 것이다. 그에 따라 부족해진 세수는 도시 밖 상인에게 받아내도록 했다. 외지 상인을 홀대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좋은 일이 아니지만, 급한 불을 끄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경이 말했듯 포클랜드의 흉년이 계속되고 있소. 예전 같으면 인어의 바다 남쪽에서 부족한 식량을 구하겠지만, 그쪽도 전쟁이 장기화되어 물자가 귀하오.”
“그렇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가져가 판매할 정도지요.”
호른 경이 감탄했다. 대학가의 고양이는 천문과 지리를 볼 줄 안다더니, 어린 집사의 잔소리가 마냥 헛짓은 아니었다.
“가을 식량을 구할 곳이 많지 않으니 이곳으로 상인이 모일 것이오. 곡식을 많이 사는 상인은 부유한 상인이고, 그만큼 가져온 짐승도 많을 테니 그들에게 세금을 걷는 것이 옳소.”
어린 집사가 뽕하고 나타나도 흠잡을 곳이 없는 계획이었다. 볼일 보고 손만 씻어도 칭찬을 퍼붓는 호른 경이니 이런 일에 어찌 반응할지 뻔했다.
“역시! 역시 공왕 폐하! 지혜롭기가 태고적 현자 못지않으니 그 위엄에 두 눈이 멀 것 같습니다! 지식 왕! 지혜 왕! 현명 왕이라 불려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에헴. 에헴. 좀 더 하시오.”
옆에서 지켜보던 더스틴 폴라 경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영 쉽지 않았다.
“현명 왕이 아니라 푼수 왕이겠지. 푼수 왕과 소갈머리 기사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