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화. 내전
폭풍성은 버팅거 시티 정중앙 가파른 언덕에 위치했다.
진입로는 남동쪽의 굽이진 비탈길과 북서쪽의 경사진 돌계단이 있는데, 계단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도 좁은 폭에 헛발 한 번이면 요단강 나루터로 직행할 높이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용하지 않았다.
“즉, 남쪽 입구만 틀어막으면 100명이 아니라 1,000명, 10,000명이 몰려와도 끄떡없지!”
“그래도 1만 명은 좀...”
성벽을 따라 여덟 방위로 세워진 성탑에 오르면 버팅거 시티 외벽 밖까지 훤히 보이고, 그 아래 설치된 호딩과 마시쿨리는 발아래 사각도 허락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천혜의 요새였다. 과거 후계자 전쟁 당시 류트 프란시스 공자가 최후까지 저항했으면 에릭 프란시스 공작군은 상당한 출혈을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그치만, 우리 폐하는 꼴랑 셋이서 점령했는데?”
“그거야! 그거야, 뭐, 우리 폐하니까?”
지하 배수로를 통한 기습이라 가능했지만, 어쨌든 그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하나였다. 난공(難攻)은 있어도 불락(不落)은 없었다.
“동부평야의 영주들이 군대를 보내면 싸움은 더욱 어려워집니다.”
호른 경이 전황을 정확히 분석했다. 지금은 백 명 남짓한 도시 용병이지만, 영주들이 가세하면 천 단위의 전쟁 부대로 늘어날 수 있었다.
“공왕 폐하의 충직한 기사들이 오지 않겠소? 구릉성의 마튼 경, 늪지 성의 메튜 경, 바람성의 맥기 경이...”
“저들이 성문을 봉쇄했는데 어찌 알고 군대를 보내겠소? 설령 풍문을 전해 들어도 진위를 파악하고 군대를 모으려면 족히 보름은 걸릴 것이오. 사전에 작당한 저들보다 빠를 수 없소.”
로벨은 폭풍성 기사들을 질타하는 호른 경을 대견스럽게 보았다. ‘에헴! 내 사람이 이렇게 똑똑해! 기사치고 말이야!’ 그런데 기사치고 똑똑한 기사가 하나 더 있었다.
“선제공격을 하자는 것이오?”
더스틴 폴라 경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외지인을 보는 탐탁지 않은 눈과 정치적으로 경계하는 눈,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이었다. 우호적인 눈은 많지 않았다.
“그렇소. 적의 숫자는 많지 않으니 공세로 나가도 충분하오.”
용감한 기사들은 이제야 이해한 듯 환한 얼굴로 동조했다. 호른 경을 비롯해 셋이었다. 그러나 지휘권을 가진 로벨과 객장(客將) 더스틴 폴라 경은 침묵했다.
“아군은 울프 용병단을 포함해도 55명이오. 적의 절반이지.”
“시티 가드가 있지 않소?”
“지금껏 소식이 없는 것 보면... 저들에게 구금됐거나...”
저들 중 일부가 시티 가드일 것이다. 로벨 일행은 ‘참 개판이구나’ 생각하며 표정 관리에 힘썼다. 이미 수치스러워하는 사람을 놀리면 안 된다. 호른 경이 속전속결을 주장했다.
“적들도 부상자를 제외하면 100명이 안 되오. 기습을 하면 승산이 있소.”
“몰래 해야 기습이지. 우리가 지켜보는 만큼 저들도 지켜보고 있는데, 어찌 기습할 수 있겠소?”
야간 기습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적이 찾지 못할 만큼 깜깜한 밤이면 아군도 아군을 찾지 못한다. 성 밖에 나서는 순간 뿔뿔이 흩어져 자의든 타의든 그대로 사라질 가능성이 짙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해가 지지 않은 저녁이나 동이 막 트는 새벽인데, 전투 직후 긴장감이 높아진 지금은 그조차 성공하기 힘들었다. 설왕설래가 오고갔다.
“그러니까 그냥 성 안에서 기다리자고!”
언성이 한 옥타브쯤 높아졌을 때, 로벨이 빨간 입술을 떼었다.
“꼭 기습일 필요 없소.”
흥분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직위로도 무시할 수 없지만, 연륜이 더욱 크게 작용했다. 무적무패 왕이 상황을 정리했다.
“아군을 둘로 나누어 양쪽에서 공격할 것이오.”
“안 그래도 부족한 병사를... 쪼갠다는 말씀입니까?”
성을 지킬 병사도 필요하니 최소 세 부대로 나눠야 한다. ‘무적무패’가 아니었으면 비웃음이 날아들 발언이었다. 로벨은 어색한 표정들을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랭스터 경, 제9시에 전 병력을 이끌고 적을 공격하시오.”
폭풍성의 전 병력이라 해봐야 30명 남짓이다. 로벨은 즉시 숫자를 보충해주었다.
“호른 경과 울프 용병단이 도울 것이오.”
“그 말씀은...”
여기까지만 들어도 평범한 양동작전이 아니었다. 가용 가능한 병사를 몽땅 정면에 배치하고 무슨 ‘양동’인가. 하지만 로벨은 자신이 있었다.
“싸움이 시작되면 본인과 폴라 경이 북문으로 나가 적의 뒤를 칠 것이오.”
“고작 둘이서, 아니, 두 분이서 말입니까? 안 됩니다! 불가능합니다!”
호른 경이 기겁해서 소리쳤다. 로벨은 감정이 상한 듯 팔짱을 끼었다.
“본인이 적들을 못 당해낼 것 같소?”
“적에게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주군이 위험하면 꼭 해야 하는 대사처럼 안 된다는 뜻입니다!”
“아... 걱정해 준 것이오?”
로벨은 오해한 것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따로 있지만, 아무튼 오해 때문이었다.
“더스틴 폴라 경은 본인이 만난 활잡이 중 최고의 활잡이며 기사 중의 기사요. 그러니 경들은 걱정하지 마시오.”
“정 그러면 폴라 경에게 용병단을 맡기고, 제가 폐하와 함께...”
로벨은 작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호른 경을 보았다. 주변에 많은 기사와 용병이 있지만, 지금 로벨의 눈에는 호른 경 하나만 보였다.
“본인을 믿으시오. 상처 하나 없이 돌아올 테니 믿고 기다려 주시오.”
저런 표정으로 저리 말하는데,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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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중천이 지나 서쪽으로 비딱하게 기울어진 시간. 하얀 밀빵과 말린 고기로 든든히 배를 채운 폭풍성의 병사 52명이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성문을 여닫을 늙은 하인 3명 외에 성내의 모든 병력이었다.
“저들이 미쳤나? 고작 저 병력으로 공격한다고?”
앙겔스 경이 모두 들으란 듯 ‘크게’ 중얼거렸다. 숫자는 반란군이 훨씬 많지만, 악명 높은 울프 용병단의 솜씨를 겪은 뒤라 사기가 낮았다.
“저들 중 절반은 아바레스터다! 성벽 뒤에 숨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겁쟁이들이다!”
반란군 소속 아바레스터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일일이 기분을 맞춰줄 상황이 아니었다.
“스피어맨! 다섯 걸음 앞으로! 간격을 좁혀라! 더 붙어! 더! 첫발만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 아처! 사격준비해라! 내가 명령할 때까지 준비하고 기다려라!”
개개인의 솜씨는 우수하나 손발을 맞춘 지 얼마 안 된 전형적인 용병부대였다. 경험 많고 인망 좋은 용병대장을 고용했으면 조금 나았겠지만, 기사 작위 외에 가진 것이 없는 젊은 앙겔스 경은 그다지 신뢰받지 못했다. 앞서 한 번 패배한 탓도 있었다.
그에 비해 오랜 세월 동고동락한 호른 경과 울프 용병단은 친형제 같았다. 길고 복잡한 명령은 필요 없었다.
“사격대열로.”
펄프 대장의 갈굼과 두 자릿수의 실전으로 단련된 용병답게 알아서 앞뒤로 자리를 잡고 정확한 간격으로 파비스를 설치했다. 한 명이 방패를 세우며 한 명이 대못을 가져다 대고 숙달된 망치꾼이 순식간에 때려 박아 고정했다. 평생 파비스 세우는 일만 했다고 해도 믿을 속도였다.
“사격준비.”
파비스에 바짝 붙은 아바레스터는 미리 찍어둔 쿼럴을 몸체에 올렸다. 시위는 진작 감아두었다. 쿼럴이 떨어지지 않게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들고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울프 용병단 훈련 메뉴얼을 따르면 ‘표적 확인’, ‘표적 조준’, ‘사격 개시’로 이어지지만, 실전에서 절차대로 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제1중대 1소대는 칼몸과 칼자루를 구분 못하는 어설픈 신병이 아니었다. 최고라 불리는 울프 용병단에서도 최고만 모인 부대였다. 한 마디면 충분했다.
“쏴라.”
팡- 팡팡- 파앙-!
폭풍성 내전 2일차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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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남쪽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살포시 감은 두 눈을 떴다. 생각보다 조금 이르지만 이쪽도 준비가 끝나 있었다. 더스틴 폴라 경이 허리 굽은 하인에게 눈짓했다.
“고, 공왕 폐하, 무운을 빕니다요.”
전장에 나가는 것은 로벨인데, 하인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로벨이 죽거나 사로잡히면 폭풍성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천천히 가시오. 당장은 싸울 필요 없으니.”
빨리 가라고 해도 못 가는 길이었다. 어찌어찌 돌을 심어 계단을 만들긴 했지만 그 폭이 좁고 높낮이 불규칙해서 몸놀림이 산양에 가까운 모닝스타조차 신경을 곤두세우고 발을 내디뎠다. 건장하긴 하지만 나이가 많은 폴라 경의 말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고삐를 단단히 쥐고 한 걸음 한 걸음 보조를 맞춰야 했다.
“인간이 말의 보폭을 따라야 한다니...”
더스틴 폴라 경이 갑자기 실소했다. 모닝스타가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야?’하고 푸르릉 거렸지만, 오만한 인간들은 말의 말을 배우지 않았다.
마도의 길에 오른 기사와 마도의 존재를 사냥하는 기사가 조용히 언덕길을 내려갔다. 간간이 멈춰서 긴장된 근육을 풀고, 남쪽 시가지에서 벌어지고 있을 싸움에 귀를 기울였지만, 대체로 걷는데 집중했다. 그것이 지루했을까, 아니면 점자 커지는 병장기 소리가 신경 쓰여서일까, 폴라 경이 조금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잉그비아 왕국과 전쟁이 끝나면 무엇을 할 것이오?”
“응? 갑자기 인생 계획을 묻는 것이오?”
“...그게 인생 계획까지 되시오?”
로벨은 고삐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계단에 익숙해졌는지 한발 한발 이끌지 않아도 알아서 잘 걸었다. 조금 지나면 제법 빨리 뛰기도 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다는 보장은 없지만... 일어난다면 향후 30년은 볼탄 반도를 넘보지 못하게 혼내줄 생각이오.”
로벨다운 말이었다. 폴라 경은 미소를 감추고 다시 물었다.
“공왕이 이기는 것은 당연하다 치고, 그 다음 말이오. 언제까지 싸움만 할 수 없잖소.”
어려운 질문이었다. 칼밥 먹는 인생이 대개 그렇지만, 모레 이상의 미래는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폴라 경은 로벨의 당황한 눈빛을 정확히 읽었다.
“왕이라면 조금 달라야 하지 않소?”
“그런 것은 어린 집사가 전문이라...”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군.”
폴라 경은 소리 없이 웃었다. 비웃음은 아니었다. 지금만 해도 눈먼 화살에 눈알이 뽑힐 수 있는 곳에 있는데, 먼 미래의 계획을 묻는 것은 우스웠다.
“그래도 한번쯤 생각해보시오. 본인처럼 불사의 꿈은 권장하지 않소만, 그래도 뭔가 추구하는 게 있어야 살맛 나지 않겠소?”
긴장을 풀려는 의도가 인생상담이 되어서 어색했다. 그래도 그리 길지 않았다. 마침내 북서쪽 돌계단을 완전히 내려왔다.
구시가지의 황량한 풍경과 겁먹은 짐승의 울음소리와 호수의 젖은 바람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피 냄새가 오감으로 느껴졌다. 로벨은 모닝스타의 등자를 밟고 안장에 올랐다. 파나케아 투구의 바이저를 닫고, 말 허리의 해비 랜스를 풀어 쭉 뽑았다.
“그 꿈은 원치 않소.”
“응?”
“경이 찾는 불로불사 말이오. 본인은 그것을 원하지 않소.”
폭풍성 내전의 끝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