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98화 (498/605)

498화. 동의

로벨 일행과 조단 랭스터 경은 지금까지 일, 지금 일어난 일,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이야기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로벨은 후자를, 랭스터 경은 전자를 이야기했다.

“암, 암살자라 하셨습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무사하니까.”

“아니, 아니! 무사하신 것은 당연하고! 그 육시랄 것들을 잡아야 하지 않습니까!”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왕을 죽이려고 했는데 유야무야 넘어갈 수 없었다. 왕의 위엄을 위해, 솔직히 말하면 딴 놈이 따라 하지 못하게 철저히 응징해야 옳았다.

“그래서 경의 도움이 필요하오.”

“당연히 돕겠습니다! 이 일대의 기사 가문을 모조리 까부셔서...”

“그렇게 말고! 그건 도움이 아니잖소!”

기사로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사내지만, 통치자로는 영 아니었다. 어린 집사의 한숨으로 자라온 로벨이 그리 생각할 정도니 심각했다.

그것을 현실로 목도한 것은 폭풍성 성문 앞에서 도시를 구경하던 애꾸눈과 애꾸눈 부하들이었다.

“...그래서 내가 한마디 했지. ‘이 여편네야!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페닝 벌러간다!’ 그랬더니, 마누라란 게 하얗게 질려서 싹싹 비는데...”

“진짜? 진짜로?”

“그걸 믿냐? 저 새끼 집에 들어가면 찍소리도 못하고 잡혀 산다.”

“뭐라? 니가 봤냐? 봤어?”

애꾸눈은 시답지 않은 유부남의 허세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가 돌연 인상을 꾸겼다.

“저기 보이나?”

“내 마누라가 보인다고?”

공처가 용병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곧장 로드릭 시티가 아니라 버팅거 시티란 것을 자각했지만 조금 늦었다. 어마어마한 조롱이 쏟아지... 지 않았다.

애꾸눈은 악명 높은 폭풍성의 언덕을 굽어보았다. 쭈그리고 앉아서 잡담을 나누던 동료 용병들도 하나둘 일어나 성 아래를 보았다. 표정이 심각했다.

“몇이지?”

“100에서 120 정도. 저게 전부라면 말이야.”

시끌시끌한 시가지에서 새어나온 그림자가 폭풍성 아래 모이고 있었다. 매미 사체에 꼬이는 개미떼 같은데, 크고 멋진 이빨이 하나씩 있었다.

애꾸눈은 외눈 안대를 만지며 얼이 나간 공처가 용병을 보았다.

“공왕 폐하께 알려라.”

“뭐, 뭐라고?”

정신을 못 차리는 게 한심하지만 질책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도 아까웠다.

“적의 공격이다. 성문을 닫고 응전해야 한다고 고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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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성에 비상이 걸렸다.

랭스터 가문의 사내와 용병들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버팀목으로 쓸 만한 것을 닥치는 대로 뽑아왔다. 마구간 처마기둥을 생각 없이 뽑아 빗물 방지용 지붕이 와르르- 무너지기도 했다. 모닝스타가 기겁해서 항의했지만 정신없는 인간들은 사과하지 않았다.

성 밖으로 대피하기에 이미 늦은 아녀자들은 아성 지하로 대피했다. 부모님의 견해와 상관없이 자신이 다 컸다고 생각하는 소년들은 무기를 요구했다. 공왕 폐하와 영주님 눈에 띄어 성공하겠다는 포부가 장엄했다. 그에 감탄한 19살 기사 종자는 머리를 쥐어박고 발로 차서 지하에 처넣었다.

전체적으로 혼잡했다. 동부평야 반란군 토벌 이후 오랫동안 평화로웠기에 전투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화살에는 시위보다 거미줄이 먼저 걸렸고, 활을 쏘기 위해서는 창고 먼지와 먼저 싸워야 했다.

“여기 놈들은 뭐하나 제대로 해놓은 게 없냐!”

주인을 닮아 상시 만전의 태세를 갖춘 늑대성과 달랐다. 버팅거 시티의 견고한 성벽과 폭풍성의 악명 높은 경사를 맹신한 탓일지도 모른다.

“도시 외벽은 쓸모가 없었지만, 이 높이는 도움이 될 거다.”

“큰 바위와 통나무를 준비해 뒀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오.”

대부분의 병기가 그렇지만 고도가 곧 위력이었다. 통나무 몇 개만 굴려도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을 텐데, 못내 아쉬웠다.

“그래도 쿼럴은 충분하다. 성문을 지키며 요격하면 손쉽게 막을 수 있다.”

그전에 협상하면 좋겠지만... 애꾸눈은 전투의지를 꺾을 발언은 하지 않았다. 애당초 협상할 생각이 1온스도 없는 사람이 있어 더욱 그러했다. 폭풍성의 주인 조단 랭스터 경이 완전무장하고 쒹- 쒸익- 거리며 성탑에 올라왔다. 그냥 일어나도 화가 날 ‘반란’인데, 하필 공왕 폐하가 있을 때 일어났다. 수치스러워서 왕의 눈을 보지도 못했다.

폭풍성이 수비를 준비하는 사이 반란군도 공격을 준비했다. 숨을 헐떡이며 언덕길을 올라와 화살이 닿지 않는 완만한 경사로에 파비스를 설치했다. 사전에 답사를 열심히 한 듯 막힘이 없었다.

양쪽 모두 준비가 끝나자 첫 전투가 벌어졌다. 대부분의 싸움이 그렇듯 시작은 말싸움이었다.

“이곳은 위대한 무적무패 왕 로벨 로드릭 폐하의 신하이자 버팅거 시티의 적법한 주인 조단 랭스터 남작의 성이다! 어디서 개호로 잡것들이 이리도 무도하게 구는가!”

기사에 대한 존중과 부글부글 끓는 분노가 절충된 문장이었다.

“본인은 앙겔프 가문의 장남 조를 앙겔프요! 본인을 모욕하고 가문을 모욕하고 나아가 동부평야의 기사들을 모욕한 조단 랭스터 남작을 벌하고자 왔소!”

로벨은 기억을 더듬더듬 만져보았다. ‘앙겔프... 앙겔프...’ 딱히 나오는 것이 없었다. 늑대성이 있는 북서부 구릉지대와 동부평야는 거리가 멀어 가문끼리 교류할 일이 많지 않았다. 헤르만이나 랭스터 같은 대단한 가문이 아니면 왕이라 해도 기억하기 힘들었다.

“앙겔프? 멍청한 멧돼지한테 치여 죽은 멍청한 기사의 아들인가!”

“...아직 죽지 않았소! 몸이 불편해 이곳에 오지 못했을 뿐! 그리고 멧돼지가 다섯 마리나 되었단 말이오!”

앙겔프 경 본인한테는 가문의 명예가 걸린 중대사지만, 그 외 사람들한테는 김빠지는 잡소리였다.

“멧돼지에 치여 죽은... 아, 죽지 않았다고? 아무튼 멧돼지 때문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오?”

그럴 리 없었다. 그 일로 모욕을 당했어도 결투를 준비하지 전쟁을 일으키진 않을 것이다.

“저 랭스터 남작이 벌목세를 3배로 올리지만 않았으면! 내 부친께서 그 먼 동쪽 숲까지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오!”

로벨 일행의 시선이 랭스터 경을 향했다.

“세금을 3배나 올렸소?”

“제 숲입니다. 제게 결정권이 있습니다.”

“그래도 상도덕이란 게 있는데...”

벌목세는 시작에 불과했다. 애당초 앙겔스 가문 하나로 시작된 싸움이 아니었다.

“랭스터 남작이 목초지 이용을 금지하는 바람에 본인 목장의 양들이 모두 아사했소!”

“주류세를 내지 않는다고 양조시설을 부수었소! 이것이 굶어 죽으란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젖먹이까지 인두세를 내라는 것은 너무하지 않소이까!”

기사들이 저 정도면, 시민과 농민의 불만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성 밖에 시체 전시물이 이해되었다. 로벨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랭스터 경을 보았다.

“세금을 저리 걷어서 어디다 쓰셨소?”

“그, 그리 많이 걷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저들에게 돌려줄 수 있소?”

“그것은, 그것은 조금...”

로벨이 답답한 마음에 닦달하자 이실직고 고백했다. 옛 랭스터 가문의 땅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더스틴 폴라 경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

후계자 전쟁 때 멸문당한 것을 어르고 보살펴 폭풍성의 주인으로 삼았더니, 거기서 만족 못하고 욕심을 부렸다. 그런데 아주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다. 몇 대 전의 일도 아니고, 불과 10년 전의 영광이었다.

‘회색산도 본래는 랭스터 가문의 땅이었지...’

로벨은 말 그대로 ‘짭짤한’ 수입이 되어주는 회색산을 떠올렸다. 로벨이 전공(戰功)으로 하사받은 첫 영토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괘씸했다. 과거야 어쨌든 주인의 땅을 탐낸 것이 아닌가.

“제가 어찌 왕의 땅을 탐내겠습니까. 호수성이 가져간 버팅거 호수의 농지와 폐허가 되어 버려진 옛 성들을 되찾고자 했을 뿐입니다.”

로벨의 눈빛이 심상치 않자 랭스터 경이 자발적으로 가문의 계획을 밝혔다. 그런데 그것도 문제가 있었다. 호수성-헤르만 가문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었다.

‘정말 말썽이 끝이 없네...’

로벨은 당면한 문제에 집중했다. 왕의 이름을 업고 저지른 일이니 남 일이 아니었다. 칼자루에 손을 얹고 랭스터 경을 지나쳐 앞으로 나섰다.

“본인은 볼탄 반도의 왕이자 포클랜드의 후작이며 늑대성의 적법한 주인, 로벨 로드릭이오!”

로벨이 헬름을 벗은 채 외치자 성 안팎과 위아래의 시선이 모두 집중되었다. 조금 전의 랭스터 경이 식장 들러리로 보일 만큼 굉장한 존재감이었다. 그렇다고 부끄러워할 필요 없었다. 가문의 일을 항의한 성 아래 기사들은 떼쓰는 꼬마처럼 보였다. 앙겔스 경은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떠듬떠듬 따졌다.

“로벨 로드릭 폐하 만세! 공왕 폐하께서 저 사악한 랭스터 가문을 비호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본인은 본인의 기사들을 차별하지 않소! 경들의 불만을 들어줄 테니 무기를 놓으시오!”

공왕이 중재하겠노라 나서자 내심 불안하던 기사들이 흔들렸다. 눈알로 좌우를 살피며 머릿속의 주판알을 굴렸다. 그러자 앙겔스 경이 호통쳤다.

“속지 마시오! 공왕도 한통속이오! 런치 가문의 재산과 권리를 빼앗아 간 게 누군지 벌써 잊었소?”

“그자는 진짜 반란을 일으켰... 음... 이것도 반란은 반란인가?”

호른 경이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했다.

“조단 랭스터 남작을 사살하고! 공왕 폐하를 사로잡는다! 전군! 공격하라!”

왕도(王都)를 떠나면 왕도 일개 제후라지만, 저건 좀 선을 넘었다.

“하다못해 ‘공왕 폐하를 구출하라’ 외치던가...”

“간신 조단 랭스터 경으로부터 왕을 보호하라, 입니까?”

꼬리가 짧은 웃음이 스쳐갔다.

“말이 안 통하면 매를 대야지. 전투준비. 반란군을 몰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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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아바레스트(Arbalest)는 공성전에 특화된 무기였다.

평지에서 갑작스레 기사를 상대할 때는 아무 힘도 쓰지 못했지만, 적의 진입을 막는 성벽과 바리게이트, 그리고 충분한 양의 쿼럴이 옆에 있으면 무서울 것이 없었다. 심지어 장궁병처럼 열대여섯 발 쏘고 지치는 일도 없었다. 1분에 2발, 손이 빠른 용병은 2분에 5발씩 꾸준히 인간사냥을 벌였다.

“과연! 과연이야! 공왕 폐하가 자랑하는 울프 용병단이야!”

랭스터 가문 사내들은 물 흐르듯이 사격하는 울프 용병단 모습에 감탄했다. 그저 빠르기만 한 게 아니라 명중률도 대단히 높았다. 사다리를 가진 적병은 진작 옛 신을 배알하러 떠났고, 그들의 의지를 이으려는 용감한 적병은 먼저 간 사다리 병이 어색해할 만큼 빠르게 뒤따랐다.

“대응 사격해! 저놈들을 막아!”

앙겔스 군을 비롯한 반란군에도 활을 가진 용병이 있었다. 그러나 고지대의 적을 맞히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 울프 용병단은 수성에 달인이라 사격할 때 빼고는 여장 밖으로 머리카락도 내밀지 않았다. 윈드라스와 염소발(Goat foot lever)로 장전하니 굳이 몸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앙겔스 경! 아군의 피해가 너무 심하오!”

“벌써 서른 명이 당했소! 물러나야 하오!”

고작 스무 명 남짓한 아바레스터 때문에 성벽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앙겔스 경은 시체와 시체가 되어가는 병사들을 보고 심하게 이를 갈았다.

“좋소. 성 아래로 물러납시다. 그러나 포기한 것은 아니오. 동부평야의 영주들이 군대를 보낼 것이니 그들과 함께 저 비열한 짐승들을 때려잡을 것이오.”

장기전으로 가자는 소리였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동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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