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94화 (494/605)

494화. 운치

로벨 일당은 채플린 성에서 거하게 먹고 마신 후 이튿날 오후에 서쪽으로 출발했다.

본의 아니게 신세를 오래졌지만, 채플린 남작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채플린 남작은 서른다섯 명의 도적과 성안에서 반기를 든 세 명의 배신자를 곱게 썰어 마을 입구와 광장에 주렁주렁 걸었다. 그리고 불안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거하게 잔치를 열고 무적무패 왕과의 우정을 과시했다.

가을걷이까지 궁핍하게 지내야겠지만, 주인의 능력을 의심하는 영지민과 이웃의 재산을 탐하는 주변 영주들을 억제할 수 있으니 남는 장사였다. 로벨이 살아있는 한 채플린 가문의 권력은 견고할 것이다.

“그리고 변함없이 로드릭 가문에 충성하겠지요.”

호른 경이 웃으며 말했다. 로드릭 왕가의 깃발을 어깨에 이고 가는 허풍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후들의 권력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알 것 같았다. 권리와 의무는 권력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페르젠 백작은 어떨깝쇼?”

페르젠 가문은 볼탄 반도 태생의 호족 가문이었다. 샘 포클 시절 아몬드 프란시스 공작을 따라와 정착한 봉신 가문과 달랐다. 자존심이 강하고 반골 기질이 유별났다.

“도트넘 가문, 헤르만 가문, 페르젠 가문, 그리고 지금은 잊혀진 두 가문을 더 해서 과거 다섯 왕이라 불렸어.”

“왕... 말입니까?”

고대 왕국이 멸망하고 개나소나 양이나 말이나 왕이라 자칭하던 시절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공왕 폐하를 노린 적이 있지 않습니까요?”

허풍쟁이가 지나간 일을 꺼냈다. 로벨은 호른 경이 안장에서 펄쩍 뛰기 전에 말을 받았다.

“왕이 되기 전이오. 그리고 ‘주니어’ 백작이 아니라 그 아랫사람이 한 짓이고.”

“허, 허나, 허나 그냥 넘어갈 일이...”

“죗값은 이미 물었소. 그리고 인어해 교역을 책임진 페르젠 가문과 싸우면 여러 사람이 곤란할 것이오.”

“어린 집사나, 어린 집사나, 어린 집사 같은 사람 말이지요?”

허풍쟁이가 끝까지 이죽거렸다. 그 대가는 모닝스타의 정수리 깨물기였다.

남해 3국의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늑대성의 기함 푸른고래 호를 비롯해 많은 배가 인어의 바다를 오가고 있었다. 올가을 추수가 끝나면 또다시 대규모 선단을 꾸릴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페르젠 가문과 협력해야 했다. 애꾸눈 볼포스가 무심코 대화에 끼어들었다.

“페르젠 백작도 공왕 폐하의 함대가 필요하니 박대하지 못할 겁니다.”

“누가! 감히! 무적무패 왕을 박대하는가!”

호른 경이 미뤄둔 '펄쩍 뛰기'를 시전했다. 애꾸눈은 괜히 끼어들었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그렇게 만 하루를 부지런히 걷자 볼탄 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가문이며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가문, 페르젠 가문이 다스리는 땅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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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은 기대 이상으로 열렬히 반겨주었다.

채플린 성의 일을 전해 들었는지, 아니면 인어해 너머의 사업이 잘되어서인지 모르지만, 도시 밖까지 나와 ‘공왕 폐하 만세’를 외치고 키스했다.

성문을 지나는 페르젠 시민과 외지 상인까지 덩달아 무릎을 꿇고 ‘롱 리브 더 킹(Long live the king)’을 연호해야 했는데, 표정이 썩 곱지 않았다. 더스틴 폴라 경은 백작이 공왕을 골탕 먹이려고 저러나 의심했다. 페르젠 백작의 심성을 알면 하지 않을 의심이었다. 과연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그냥 바보로군.”

“어허, 살살 돌려 말하시오.”

“남들과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본인 감정에만 충실하며 그것을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는 작자로군.”

페르젠 백작은 신이 나서 술 파티를 열고 로벨 일당을 초대했다.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지만, 격렬한 전투와 더 격렬한 파티를 치르고 저녁 늦은 시간에 찾아온 일행에게 배려가 부족했다. 하다못해 당일은 쉬게 해야 옳았다.

성주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왕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로벨은 휘하 기사와 용병을 간절히 쳐다보며 초대에 응했다. 전쟁터도 따라가야 하는 고용인 입장에서 거부할 수 없었다.

늦은 저녁 불을 피우고 고기와 술을 꺼냈지만, 기둥 세 개쯤 뽑아먹고 온 기사와 용병들은 심드렁했다. 속이 안 좋아서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용병도 있었다. 페르젠 백작은 내심 당황했다.

“하하하... 하... 뭐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지나온 영지에서 너무 잘 먹어서라고 대답하기 곤란했다. 로벨은 억지로 포도주를 비우고 말했다.

“소식하는 자들만 데려와서 그렇소.”

“아, 그렇습니까? 하긴, 장거리 여행에 많이 먹는 자는 곤란하지요. 과연 공왕 폐하십니다!”

페르젠 백작의 수행기사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저 덩치들이 어딜 봐서 소식하는 몸뚱인가. 웃기지 않는 헛소리지만 심성 고운 페르젠 백작은 쉽게 믿었다. 시종을 불러 고기를 그만 내오라 명령했다. 그리고 답지 않게 눈치를 살살 보았다.

“안 그래도 늑대성에 사람을 보낼까 했습니다.”

“교역선 때문이오?”

“교역선? 아, 물론 그것도 있지요. 그런데 그것 말고도...”

로벨은 편히 말하라고 눈짓, 손짓, 고갯짓했다. 하나로는 알아듣지 못해서 제스처를 총동원했다. 간신히 통했다.

“올해 추수가 끝나면 페르젠 가문의 이름으로 페르젠 시티 토너먼트를 개최할까 합니다.”

로벨이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로벨의 수행기사 호른 경이 따져 물었다.

“로드릭 시티 토너먼트가 끝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올해 바로 개최한단 말이오?”

사실 토너먼트는 제후의 재량이라 ‘일 년에 한 번만 개최한다’ 혹은 ‘왕이 개최한 해에 따로 개최하지 않는다’ 같은 복잡한 법률은 없었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왕이 개최한 그랜드 토너먼트 이후에는 따로 마상시합을 하지 않았다. 왕의 시합과 비교되는 것이 불명예스럽기도 하고, 기사 입장에서도 그랜드 챔피언 명성에 가려지는 것이 꺼림칙하기 때문이다.

페르젠 백작은 술잔을 연거푸 비운 후 횡설수설 설명했다.

“우승자가 나오지 않아 불만이 많고, 원래 가을 추수 이후에 토너먼트를 많이 열고, 또 뭐냐, 몬스터 때문에 피해를 본 기사들이 힘들어하니까...”

자격지심이나 피해망상이 있으면 왕의 위엄을 찍어 누르려는 정치적 음모로 여기겠지만, 로벨도, 페르젠 백작도 제 잘난 맛에 사는 ‘평범한’ 기사였다.

“백작 뜻대로 하시오. 굳이 허락이 필요한 일도 아니잖소?”

잉그비아 왕국 침략에 대비해야 하니 어지간한 것은 들어줄 작정이었다. 토너먼트 개최 승인이면 아주 사소한 부탁이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제 부탁은 그것이 아닙니다.”

페르젠 백작이 심각하게 말을 끊었다. 로벨은 덜컥 겁을 먹었다. 비용을 분담해달라는 부탁이면 대단히 난감했다. 어린 집사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것이다. 로벨 말고 어린 집사 본인 머리카락 말이다. 아무리 친해도 주인의 머리채를 잡아 뜯진 않...

“제발, 제발 폐하께서는 참가하지 말아 주십시오!”

“...지금 뭐라고 했소?”

“저희 가문에서 챔피언이 못 나온 지 12년입니다. 무려 12년이요. 공왕 폐하가 참가하면 난다 긴다 하는 외국 기사까지 죄다 찾아오니 결승전은 고사하고 준준결승도 힘듭니다. 공적이 없으니 기사 취급도 못 받는 젊은 기사가 태반입니다. 그 간악한 헤르만 백작이 비웃은 거 보셨습니까? 집안 잔치에서까지 챔피언 자리를 뺏기면 그때는 진짜...”

“......”

로벨과 호른 경은 서로를 보았다. 시합에 참가해달라는 청탁은 자주 받았지만, 참가하지 말아 달라는 청탁은 처음이었다. 과연 페르젠 백작이라 할지, 역시 ‘주니어’ 백작이라 할지 고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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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습긴 하지만, 웃고 넘길 일은 아닙니다.”

호른 경이 갑옷 벗는 것을 도우며 만찬 연회의 일을 거론했다. 로벨은 한결 가벼워진 어깨와 팔을 붕붕 휘두르며 물었다.

“그럼 슬퍼해야 할 일이오?”

“어쩌면 그렇습니다. 이것은 세대교체니까요.”

“세대교체?”

“프란시스 가문과 사트로 가문이 충돌한 미망인 전쟁 이후 어느덧 20년이 지났습니다. 전장에서 이름 떨친 기사들은 죽거나 부상으로 은퇴했습니다.”

로벨의 첫째 오라비도 당시 전사했다. 그 이후로도 끊임없이 전쟁이 이어졌으니 얼마나 많은 기사와 기사 종자가 명을 달리 했을지 알 수 없었다.

“본인이 공작이 된 후로도 전쟁은 많았잖소?”

“대부분 폐하의 용병단이 처리했지요.”

기사들을 소집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의무종군일이 끝나면 전쟁 비용을 분담해야 해서 손해도 컸다. 어린 집사가 툴툴거리면서도 울프 용병단 충원을 승인하는 것이 그 때문이었다. 기사를 부르는 것도 페닝이 들기는 마찬가지니까.

“그 탓에 전공을 쌓지 못한 젊은 기사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드릭 시티 토너먼트와 몬스터 토벌에 적극적인 신참 기사들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로벨의 눈에 띄어 농장 한 토막 하사받는 것이 꿈인 기사들이었다. 로벨은 흉갑과 배갑을 벗고 꾸겨진 아밍 더블릿을 펴며 중얼거렸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큰 전쟁을 앞둔 지금은 좋습니다. 물론, 실전경험이 부족한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호른 경은 스커트의 가죽 고리를 풀고 한 발 물러났다. 진짜 종자면 그리브(Greave:정강이 보호대)와 서배튼(Sabbaton:강철 신발)까지 벗겨주겠지만, 정식 기사라 무릎 꿇고 시중드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여인의 맨다리를 만지는 게 남사스럽기도 했다. 자고로 숙녀의 몸은 가냘픈 발목만 보아도 화끈거리는 법이다.

로벨은 잘 도와주다가 관둔 호른 경을 이상하게 보고 직접 가죽끈을 풀었다. 혹시 발 냄새 때문인가 싶어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조금 나는 것도 같았다. 아니, 심한 것 같았다.

“더, 덥지 않소? 창문을 여는 게 어떻소?”

호른 경은 유사시 총안으로 쓰이는 한 뼘 크기 창문을 보았다. 저걸 어떻게 열어야 하나 고민하다 그냥 말을 돌렸다.

“폐하의 안전을 위해 의관을 갖춘 후 열도록 하겠습니다.”

이 높은 곳에 화살이 날아올 리도 없고, 날아와도 비단옷이 대단한 방호력을 발휘할 거 같지도 않지만, 어색해서 알았노라 대답했다.

‘아... 앗!’

호른 경은 당황한 주군을 이상하게 보다가 불현듯 깨달았다. 지금 밀폐된 방에 단둘이 있었다. 늑대성에서는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 하지만 너무 더우면 그냥 열도록 하겠습니다.”

태양이 지고 바닷바람이 불었다. 이 날씨가 더우면 여름에 불타 죽었을 것이다.

“적이 공격하면 어쩌려고?”

“제가 막겠습니다! 이 목숨을 다 바쳐서!”

호른 경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분위기가 더욱 이상해졌다. 로벨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술이 깨서 잠이 안 올 것 같은데... 혹시 괜찮으면 한 잔 더...”

“누가 술을 찾았소? 이런! 실수했군. 노커가 없어서 두드리는 것을 잊었소.”

어린 집사도 없는데 침실문이 벌컥! 열렸다. 직후에 도로 닫히고 노크 소리가 울렸지만, 분위기가 산산이 깨진 뒤였다.

“...폴라 경이오?”

“이 시간에 공왕을 찾아뵐 수 있는 기사가 경과 본인 말고 누가 있소.”

“...결투를 신청하오.”

“뭐요? 아무 맥락도 없이? 잠깐! 이것은 술병이오! 칼이 아니란... 여봐라! 누가 내 무기를 가져와라! 당장! 당장!”

로벨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바닥에 떨어진 술병을 주워 도주하는 친구와 추격하는 연인을 위해 한 잔씩 따랐다. 진정하고 돌아오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일단 한 모금 마셨다.

“그래도 좋은 술을 골라 왔네.”

창문을 열자 잔잔한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초가을의 운치 있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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