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91화 (491/605)

491화. 정열

기사 소설의 주인공은 항상 정열적이다.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불리해도 물러나지 않으며, 불가능에 과감히 도전한다. 결투장에서도, 시합장에서도, 전쟁터에서도, 펄펄 끓는 쇳물처럼 정열을 쏟아 붓는다. 그것은 사랑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왜 꼭 주군의 아내를 사랑하는지 의문이지만, 연인을 위해 가문도, 재산도, 심지어 명예까지도 과감히 내던진다. 실로 불꽃같은 삶이다.

‘현실은 많이 달라.’

로벨은 한숨을 쉬었다. 로벨은 소설 속 기사처럼 치열하지 못했다. 후대의 역사학자는 ‘미친 활화산 같은 기사왕 일대기’라 평가하지만, 그것은 굵직한 사건을 모아놓고 보니까 그런 것이고-소설 속 기사도 마찬가지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상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그래서 살짝 불만이었다.

“공왕 폐하, 날씨가 좋지 않습니까? 이런 날은 사냥하기에 좋지요.”

주군의 아내가 아니라 ‘주군’ 자체라 그런가, 정열은 고사하고 체온도 느끼기 힘들었다. 손조차 잡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사실 로벨도 ‘정열적인 사랑’을 알지 못했다. 소설 속의 새하얀 밤과 불타는 꽃송이가 무엇인지 짐작 가지 않았다. 이것은 소설가의 잘못이다. 혹은 그 이상의 묘사를 허락하지 않는 교회의 잘못이거나.

“폐하, 걱정되십니까?”

호른 경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로벨은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호른 경은 벗이자 연인이자 신하로 주군의 마음을 진단했다.

“무적무패 왕께서 일개 도적 무리를 걱정하진 않을 테니, 역시 리처드 2세와 존 오브 곤트 공작의 행보가 염려스러운 것이겠지요.”

오진이었다. 심하게 잘못 짚었다. 그러나 분위기상 정정해줄 수 없었다.

“그, 그렇소. 제대로 보았소.”

호른 경은 참된 기사니까 왕다운 모습을 보여야 좋아할 거라 생각했다. 물론, 착각이었다. 사내처럼 자랐어도 사내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호른 경은 ‘역시 나의 왕’이라 한숨 쉬고 로벨이 좋아하는 대국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흑태자를 따르던 세력이 아직 남아있고, 존 공작에게 반감을 가진 제후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지난 내전의 피해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으니 당장은 군사행동을 하지 못할 겁니다.”

어디까지 ‘당장’이었다. 그것도 북해안에 상륙해서 전면전을 벌이지 않는다는 것이지, 바다 위의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다.

“전쟁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영지민을 안심시키고, 봉신들이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이미 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벨이 가장 잘하는 일. 그것은 바로 도적과 몬스터를 소탕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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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 용병단 북군(北軍) 제1중대 1소대, 애꾸눈 볼포스의 아바레스터 22명이 로드릭 시티 남쪽으로 출발했다. 공식적으로는 로벨 로드릭 공왕의 호위고, 비공식적으로는 채플린 영지의 무법자 소탕이었다.

덩굴성 전투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만큼 불만이 새어 나왔지만, 통 크게 훈련 면제, 작업 면제, 전투수당 2배 지급을 걸자 15분 만에 출발준비를 마치고 집결했다. 교과서 같은 용병이었다. 로벨, 호른 경, 호른 경의 기사 종자, 더스틴 폴라 경 등등해서 총원 27명이었다. 채플린 영지의 도적단이 30명 안팎이라 하니 차고 넘치는 전력이었다.

“거기! 거기 몰아! 멍청아! 굴로 가잖아!”

“카아아악! 니가 와서 해봐!”

집 떠나서 일하러 가니까 ‘원정’이긴 한데, 분위기가 나들이에 가까웠다. 숫자는 엇비슷해도 실력과 장비가 다르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거짓 없이 일당백이고, 용병들은 하나 같이 베테랑이니, 도적 나부랭이한테 겁먹기가 더 힘들었다.

“폐하, 이것도 드시지요. 잘 익었습니다.”

“음... 음. 경부터 드시오.”

로벨은 야영지 밖에 최소한의 경계만 세웠다. 로드릭 시티 남쪽은 로벨 로드릭의 영향력이 가장 강한 곳으로 적대 세력이 없었다. 끽해야 굶주린 피난민과 월동준비 중인 늑대인데, 그 정도로는 위협이 되지 않았다.

“...고기 잡는 사람 따로 있고, 먹는 사람 따로 있소?”

더스틴 폴라 경이 활을 풀어 놓으며 중얼거렸다. 회색곰도 때려잡을 건장한 기사들이 불가에 옹기종기 앉아 고깃덩이를 주고받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 고기를 구해온 입장에서 더욱 그러했다.

“이런! 벌써 오셨소? 용병들은 아직 같은데...”

“가진 도구가 다르니까. 그것보다 너무하군.”

더스틴 폴라 경은 뼈만 남은 사슴 다리를 보았다. 고기가 모자랄 것 같아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맛깔나게 구워 먹었다.

입가에 숯댕이와 기름이 반질거리는 로벨이 머쓱하게 자리를 권했다.

“폴라 경의 몫은 여기 있소. 올여름에 담근 리암 수사표 맥주도 있소.”

더스틴 폴라 경은 가죽부대의 맥주만 한 모금 마시고 잘 벼린 칼을 꺼냈다. 꽁냥거리는 사내들이 꼴 보기 싫어 해치우려는 것은 아니고, 방금 잡은 토끼를 손질하기 위해서였다.

로벨은 입술로 감탄했다. 조금 전에 새끼 사슴을 잡고, 이어서 토끼 두 마리와 산새 한 마리를 잡아왔다. 폴라 경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몬스터 때문인지 사냥감이 많소.”

크고 사나운 짐승은 몬스터를 피해 도망가고, 작고 재빠른 짐승만 남았다. 그렇다고 해도 대단했다. 한 시간 가까이 소리만 지르는 애꾸눈 패거리를 보면 말이다.

“울프 용병단 최고의 사수들인데...”

“전쟁과 사냥은 다르오. 저들의 무기는 사람과 말을 잡는 것이지.”

하긴, 사슬갑옷을 꿰뚫는 아바레스트로 토끼 같은 작은 짐승을 쏘면 내장이 터질 것이다. 호른 경이 무심하게 말했다.

“놀러 나온 게 아니잖습니까. 비스킷은 충분히 있으니 그걸로 배를 채우라 하시지요.”

로벨은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사슴고기를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그래도 먹는 걸로 치사하게 굴기 싫은데...”

“역시 현명하십니다. 잘 먹은 병사가 잘 싸우는 것은 당연하지요. 애꾸눈을 불러 남는 고기를 가져가라 하겠습니다.”

더스틴 폴라 경은 어이가 없는 눈으로 호른 경을 보았다. 줏대가 갈대보다 가벼운 작자였다.

“이거 본인이 잡은 고기인데?”

더스틴 폴라 경이 경우를 따지자 호른 경이 정색했다.

“공왕 폐하의 땅에서 난 고기이니 공왕 폐하의 것이오.”

“그래서 내 사냥감을 빼앗겠다?”

두 기사가 서로 노려보자 로벨이 얼른 중재했다.

“그리 말하지 마시오. 폴라 경 덕분에 모처럼 기름진 식사를 하잖소.”

말 잘 듣는 호른 경은 바로 긍정했다.

“그 말씀이 옳습니다. 그럼 세금으로 2/3만 받도록 하지요. 사슴 몸통이면 될 듯합니다.”

더스틴 폴라 경은 실소하고 마음대로 하라 손짓했다. 어차피 못 먹은 부위는 버리고 가야 했다. 호른 경이 애꾸눈을 부르러 간 사이 로벨에게 물었다.

“공왕의 기사들은 다 저렇소?”

“그게 무슨 의미요?”

“저리 충성심이 깊으냐는 의미요.”

“...호른 경이 유별나긴 하오.”

로벨은 굵은 가지를 하나 골라 모닥불을 뒤적였다. 빨간 불티가 일어나 빨간 얼굴을 가렸다. 가을바람이 한 자락 스치자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닝스타가 투정부리는 소리가 들리고, 애꾸눈 패거리의 환호성이 잠깐 울린 후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이곳 지리에 어두워 허풍쟁이란 용병에게 몇 가지 물어보았소.”

“그는 좋은 길잡이요.”

“그런 것 같더군. 내일 하루 부지런히 가면 채플린 성에 도착한다 했소.”

로벨은 전두엽 한 켠에 각인된 볼탄 반도 남부 지리를 떠올렸다.

“그곳에서 시작해서 남서쪽 해안을 한 바퀴 돌 것이오.”

“남서쪽이면... 페르젠 가문의 파도성 말이오?”

로벨 만큼은 아니어도 대충 지리를 익힌 모양이다. 로벨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의 거뭇거뭇한 검댕이 때문에 위엄은 없었다.

“전쟁의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소. 제후들의 도움이 필요하오.”

“그대는 왕이잖소?”

“그러니까 하는 것이오.”

더스틴 폴라 경은 정치와 권력을 알지 못했다. 그저 ‘왕도 고생이 많구나’ 생각했다.

“여러 날이 걸리겠군. 힘닿는데 까지 돕겠소.”

“벌써 큰 도움이 되고 있소.”

로벨이 환한 얼굴로 고마워하자 더스틴 폴라 경은 이유 없이 귓불을 붉히고 외면했다.

“흡혈귀 왕의 추격을 피하기 위험이니 고마워할 필요 없소.”

로벨만큼이나 연기에 소질이 없었다. 그래서 훌륭한 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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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린 성은 구름 평야 북쪽 끝자락에 있었다. 파도성과 거리가 가까워 페르젠 가문의 봉신으로 여겨지지만, 구(舊) 프란시스 가문의 봉신으로 별개 세력이었다. 그 때문에 지난 10년간 고생을 많이 했다.

정통성 전쟁 때는 하버트 페르젠 백작의 대군에 굴복해 치욕적인 종군을 해야 했고, 로벨이 봉기해 장미성으로 진군할 때는 시간 끌 여유도 없이 맨발로 나와 충성맹세 해야 했다. 그때 일로 남부 영주들에게 엄청난 조롱을 받았는데, 그치들도 결국 충성맹세한 것을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영지가 가까워 먼저 항복한 것이 그리 불명예인가!

이후 로벨 로드릭 공작의 이름으로 정국이 안정되어 시름을 더나 했는데, 잉그비아 왕국 원정이니 남해원정이니 수시로 불려가고, 최근에는 몬스터까지 출몰해 영지가 쑥대밭이 되었다. 기사단의 도움으로 몬스터는 퇴치했지만, 기부 명목으로 가산을 바치고 나니 도적무리를 소탕할 여력이 남지 않았다. 하여, 부끄럽게도 왕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고, 공왕 폐하! 폐하께서 직접 오실 줄은...!”

채플린 가문의 고난 중 절반은 로벨 때문인데, 로벨을 직접 보니 차마 탓할 수 없었다. 결코 덩치 좋은 울프 용병단 때문이 아니었다.

“그대의 고통이 본인의 고통이오. 오랜 세월 헌신한 그대를 어찌 외면할 수 있겠소.”

미리 밝히지만 리암 수사가 알려준 인사말이다. 로벨은 채플린 가문인지 채프라 가문인지 아직도 헷갈렸다. 옛날 옛적 로드릭 가문만큼 작고 가난한 가문이었다.

“성안으로 드시지요. 부족하지만 오찬을 준비하겠습니다.”

올해 쉰다섯이 된 채플린 남작은 약식으로 충성맹세를 보인 후 성으로 안내했다. 옛날 느낌이 나는 목성이었다. 성벽은 대부분 통나무인데, 그것도 귀한 탓인지 흙만 쌓아 올린 곳이 있었다. 성탑은 없고 망루로 쓰이는 사다리 탑만 두어 개 있었다. 아성 역시 비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로드릭 시티 북쪽 숲의 사냥꾼 오두막을 1.5배 정도 넓히면 딱 채플린 남작의 아성이었다.

“정겨운 곳이야.”

로벨은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좋아했다. 호른 경과 폴라 경도 불쾌해하지 않았다. 자작나무 숲도 비슷한 처지였다. 생각해보면 로벨 주위에는 가난한 기사가 많았다.

“제대로 된 음식이 나올까 싶습니다.”

“아...”

가난뱅이 기사들이 오묘한 눈빛을 나누었다. 삭힌 고기에 딱딱한 빵이 나와도 놀라지 말자는 눈빛이었다. 편견이 가득한 눈빛이기도 했다.

이름 높은 무적무패 왕이 왔는데 보잘것없는 음식을 대접할 리 없었다. 새끼 양이 통째로 구워지고 씨암탉이 화로에 거꾸로 매달렸다. 허풍쟁이가 감탄하여 속삭였다.

“무슨 소리 안 들리오?”

“무슨 소리?”

그것은 채플린 성의 기둥이 흔들리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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