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화. 입장
하루걸러 한 번씩 전투가 벌어졌다.
못생기고 울퉁불퉁한 머리에도 생각이란 것이 있는지 첫날처럼 무작정 덤비지 않았다. 병력을 셋으로 나눠 교대로 공격하기도 하고, 새벽에 몰래 사다리를 가져오기도 하고, 농경지를 빙 돌아 남문을 기습하기도 했다.
“천재가 있어요. 천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오크 혈통의 천재가 분명해요.”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 늑대성의 천재가 오크를 인정했다.
“근데 이상하지 않아?”
로벨도 평범한 오크 집단이 아니란 것에 동의했다. 그래서 의문을 제기했다.
“저렇게 머리가 좋은데 공성에 도움이 되는 후속부대, 그러니까 오우거 같은 괴물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까? 기사처럼 공훈을 탐내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체구가 10피트쯤 되는 오우거는 살아있는 투석기이자 걸어 다니는 충차였다. 로벨이 옛 신의 기사단을 내보내지 않는 것도 붉은 산에서 목격된 오우거 때문이었다. 오우거가 바위를 던지면 기사들을 이끌고 요격해야 하니까.
“아흐레가 지났어.”
로벨은 붉은 산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 티 없이 맑은 하늘과 한가로운 조각구름뿐이었다. 전운(戰雲)은 보이지 않았다. 아흔아홉 살 노인이 지팡이에 의지해 와도 도착할 시간이었다.
“역시 이상해.”
그 사이 오크 숫자는 절반으로 줄었다. 무려 600마리가 성곽에 발 한번 올리지 못하고 죽었다. 인간이었으면 지휘관이 항복하거나 병사가 단체로 탈영할 일이었다.
“혹시... 아니야... 음... 하지만...”
로벨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가 지웠다. 어린 집사가 답답해서 정수리를 마구 긁었다.
“뭐예요? 뭔지 몰라도 말해보세요!”
로벨은 조금 더 고민한 후 말했다.
“전령을 보내야겠어.”
“봉신들을 닦달하게요?”
어린 집사가 반색했다. 시간은 공평하지만, 시간을 재는 잣대는 사람마다 달랐다. 오크의 후속부대가 오지 않은 것은 기쁜 마음으로 넘어갈 수 있으나 아군의 지원군이 오지 않은 것은 괘씸해서 따져야 했다.
“어쩌면 못 오는 걸지도 몰라.”
“엥? 왜요?”
양동작전, 성동격서, 벌제위명... 어떻게 불러도 상관없었다. 적을 속이는 것은 전술의 기본이고, 그 방법은 동서고금 따질 필요 없이 한결같았다.
“그걸 알아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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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과묵한 몬트 소대에서 기마 용병 7명을 선발해 서문으로 내보냈다.
지금의 오크 병력으로는 도시를 포위하지도, 파발을 추격하지도 못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이제 저들은 볼탄 반도 남부를 돌며 정보를 모으고 소집을 독촉할 것이다.
“그런데 왜 7명이에요? 한 사람이 아쉬운데요?”
“7개 성을 차례로 돌 거니까. 아무 일 없으면 여드레 뒤에 돌아오겠지만...”
지금 걱정하는 게 맞으면 하루에 한 명씩 돌아올 것이다. 7명이 따로따로 귀환하거나 중간에 실종된다면, 볼탄 반도는 유례없는 위기에 빠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안 좋은 예감은 이상하게 잘 맞았다. 오크의 열 번째 공격이 끝난 늦은 저녁에 첫 번째 전령이 돌아왔다.
“보드랭 마을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보드랭 마을은 덩굴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보드랭 남작의 영지였다. 어린 집사가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도, 도적 짓이겠죠?”
쓸데없는 희망이었다. 첫 번째 전령이 바로 부정했다.
“시체가 훼손된 것을 보아 몬스터입니다. 그것도 아주... 아주 크고 포악한 놈입니다.”
로벨은 이마를 짚었다.
“부대로 복귀해. 수고했어.”
전령은 짧은 임무에 만족하며 돌아갔다. 그러나 로벨의 근심은 몇 배로 깊어졌다. 군문(軍門)에 어두운 어린 집사도 전황이 안 좋다는 것을 알았다.
“우연일까요?”
“...그러면 좋겠어.”
그렇지 않았다. 다음날과 다다음날, 그리고 오크의 공격이 시작되는 사흘째 저녁까지 계속해 전령이 돌아왔다.
“후버 마을이 파괴되었습니다! 생존자는 없습니다!”
“호프만 성이 함락되었습니다요! 함락이요!”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오크들이 로드릭 시티를 공격하는 사이, 다른 괴물은 다른 도시를 파괴하고 있었다. 오크의 기막힌 공성전술도 납득되었다.
“인간이야.”
“오크가 인간이라고요?”
“아니, 몬스터를 지휘하는 망할 놈 말이야.”
로벨의 입에서 평소보다 거친 단어가 나왔다. 평소처럼 농담으로 응수하려던 외팔이와 허풍쟁이가 입을 다물었다.
“기사들을 소집할 각 파벌의 영주를 제거했어. 보드랭 남작, 후버 남작, 호프만 자작 모두 지나는 길에 우연히 공격할 위치가 아니야.”
지식과 지능은 별개였다. 몬스터의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인간의 정치상황, 쌍무적 계약으로 맺어진 볼탄 반도의 가문 관계를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피라미드의 중간다리가 끊어졌다.
“어느 가문이 어느 가문에 충성하는지 속속히 알고 있어. 이것은 정보의 문제야.”
“인간 중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인가요?”
“악마추종자 짓일 거야.”
괴물 불러낸 것도 모자라 직접 조종하고 있었다. 죽은 사람이 수천 명이나 되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장은 힘이 없었다. 페르젠 백작이나 헤르만 백작처럼 힘 있는 영주는 무사할 것이다. 하지만 1,800마리의 몬스터가 남하한 이상 늑대성을 돕지는 못할 것이다.
“옛 신의 기사단을 불러와.”
로벨은 오래된 용병들을 한 번씩 보았다.
“적의 지원군은 없어. 오크들을 쓸어버리고 적의 본진을 쫓을 거야.”
“적의 본진은 북쪽이오.”
그때, 오크를 상대하느라 늦게 도착한 기사가 말했다. 두 자릿수 전쟁과 세 자릿수 전투를 치른 베테랑 전사들이 쳐다보았다. 심장 떨리는 일이었다.
“더스틴 폴라 경?”
“방금 무슨 말을 했습니까요?”
더스틴 폴라 경은 얼마 안 남은 화살을 추스른 후 말했다.
“지금이 기회요. 강철성을 공격합시다.”
참 한결 같은 기사였다. 뱀파이어 군주가 원흉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뜬금없이 강철성이 나오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시기에 왜 인간끼리...’
‘개인적인 복수 아니야?’
이런 반응이 보편적인 반응이었다. 로벨의 봉신들도, 사트로 가문의 봉신들도 그리 생각할 테니 강철성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로벨은 눈짓과 표정으로 더스틴 폴라 경을 설득했다. 지혜로운... 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론이 무엇인지는 아는 동방 출신 기사는 입을 다물었다.
“우선 성 밖의 오크를 물리칩시다. 나를 도와주겠소?”
더스틴 폴라 경은 활집을 만지작거리다가 한숨처럼 승낙했다.
“그리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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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릭 시티 북쪽 작은 암문(暗門)에 로드릭 시티 최고의 전력이 집결했다.
무적무패 왕으로 유명한 로벨 로드릭, 왕을 호위하는 흉내쟁이 이하 직속 랜스 8명, 소속구는 다르지만 신앙으로 형제가 된 옛 신의 기사 22명, 그리고 동방에서 온 백발백중 활잡이 기사 더스틴 폴라 경. 총 32명의 기마전력이었다.
“버그베어를 치러 갈 때도 이리로 나갔었죠.”
그때도 복무한 고참 용병이 코를 훌쩍이고 말했다.
“엄청 오래된 전 같은데, 의외로 얼마 안 됐습니다요.”
“그럼 이번에도 잘하겠네?”
“설마 두 번 할 줄은 몰랐습니다요.”
고참 용병은 손을 휘저었다.
애써 웃어도 분위기는 무거웠다. 더스틴 폴라 경은 활과 화살을 하나하나 점검했고, 옛 신의 기사들은 성경과 성물에 입을 맞추며 기도했다. 머리 좋은 짐승들은 위기를 직감하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로벨은 마음의 준비할 시간을 충분히 준 후 모닝스타 등자를 밟았다.
“준비가 길면 승리를 축하할 시간이 짧아져. 이제 가자.”
기사와 용병은 미소를 짓고 각자 말에 올랐다. 고르고 골라 다듬고 다듬은 무기를 빼들었다. 긴장이 흥분으로, 두려움이 용기로 바뀌어갔다. 전투의 시간이었다. 로벨은 덩달아 흥분한 문지기에게 명령했다.
“성문을 열어.”
도르래가 감기고, 육중한 격자문이 올라갔다. 평소에 쓰지 않는 문이라 소음이 심했다. 끼리릭- 끼릭- 덜커덩-! 로벨은 바바 야가의 창을 안장 아래로 내리고 모닝스타의 옆구리를 가볍게 때렸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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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800년 전, 등자(?子)가 발명되자 전쟁의 주역은 커다란 방패를 가진 중장보병에서 말을 탄 기사 계급으로 바뀌었다. 무기가 발전하고 전략전술이 발달해도 아직까지 갈기 달린 짐승의 발보다 나은 것은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병사도 말을 따라갈 수 없기에 기사와 보병의 싸움은 일방적인 공격과 수비로 진행되었다. 그것은 인간이 빚어낸 인지의 생물, 몬스터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상상력은 한계가 있으니까. 네발짐승보다 빨리 달리는 괴물을 상상하기 힘들겠지.’
선조들의 빈곤한 상상력이 작금의 행운이었다. 우주를 주무르는 문어 대가리 같은 것을 상상했으면 어찌 됐을지 알 수 없었다.
로벨은 수중에서 본 크라켄을 떠올리다가 머리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120야드 거리로 좁혀진 두 발 괴물이었다. 바바 야가의 창을 랜스 레스트에 걸고 등자 밟은 발로 모닝스타의 옆구리를 찼다. 그리고 목청껏 소리쳤다.
“Charge!”
“히이이이잉-!”
최적의 돌격거리였다. 로벨과 모닝스타가 갤럽(gallop)으로 속도를 올리자 로벨의 랜스와 옛 신의 기사단이 차례로 속도를 올렸다. 창날이 아침 공기를 가르고 편자가 이슬 내린 땅을 헤집었다.
“뀌익! 뀌이잇!”
오크들은 북쪽에서 나타난 기사 집단에 놀라 자빠졌다. 심리적인 묘사가 아니라 진짜 자빠졌다. 숫자는 서른 기에 불과하지만, 완전무장한 기사를 태우고 전력질주하는 거마의 위용은 삼백 대군 못지않았다. 실제 위력도 삼백 명쯤 되었다.
“선공을 가져가오!”
더스틴 폴라 경이 안장에 묶어둔 화살을 뽑아 컴보짓 보우에 걸었다. 오크의 셀프 보우와 비슷한 크기지만, 7가지 재료를 사용하여 장력을 극대화한 첨단 무기였다. 활대가 아슬아슬할 만큼 크게 휘어졌다.
“이 속도에서?”
옛 신의 기사들이 감탄했다. 동방인이 기사(騎射)에 능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시위를 놓자 살(?)이 말(馬)보다 빠르게 날아갔다. 용감하게 창을 세우던 오크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더스틴 폴라 경은 화살을 세 발 뽑아 손가락 마디마디에 걸고 연달아 쏘았다. 두 발로 서서 해도 놀라울 속사를 달리는 말 위에서 해냈다. 그러나 네 발 고작이었다.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고, 화살을 뽑을 시간조차 남지 않았다.
“Charge! Charge!”
로벨은 창끝을 살짝 틀어 오크의 머리를 가격했다.
로벨의 창은 익히 알려진 대로 마창(魔槍)이었다. 오크 머리는 부러지지 않고 폭발했다. 피와 뼈와 뇌파편이 랜스 차칭을 피한 주변 오크를 덮쳤다. 평범한 창이나 바바 야가의 창이나 죽는 것은 하나지만, 시각적인 효과가 달랐다. 오크의 찌그러진 얼굴에 공포가 새겨졌다.
“옛 신과 성자 마르틴의 이름으로!”
“지옥불에 떨어져 영원토록 불탈지어다!”
로벨이 꿰뚫은 구멍을 옛 신의 기사단이 비집고 들어가 확장했다. 오크들은 랜스에 찔려죽고, 철퇴에 맞아주고, 말발굽에 밟혀 죽었다. 목초지를 넘어 오크 진영 반대쪽으로 나올 때까지 최소 마흔 마리를 해치웠다.
“뀌이잇! 뀍-!”
오크들은 빈자리를 메꾸며 방진을 갖췄다. 역시 인간과 달랐다. 패닉에 빠지면 몇 번 더 돌격할 텐데, 두 번은 없었다. 로벨은 고삐를 당겨 모닝스타를 세우고 아군의 피해를 확인했다.
“모두 무사하시오?!”
“존 형제가 낙오했습니다!”
“입 냄새 햄튼이 낙마했습니다요!”
두 사람이 빠져나오지 못했다. 로벨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구할 시간이 없었다.
“적의 후미로! 진영을 흔들어야 하오!”
로벨은 방향을 바꿔 다시 달렸다. 2차 돌격에 대비하던 오크들은 당황했다. 그러나 쫓을 수 없었다. 말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거니와 굳게 닫혀 있던 로드릭 시티의 동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오크를 죽여라! 모조리 죽여라!”
“공격! 공격이다!”
이제 입장이 바뀌었다. 인간의 공격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