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5화. 봄비
로벨은 동문 우측 성탑에 올라 보리 수확이 끝난 춘경지와 텅 빈 목초지 언덕을 바라보았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살아있는 것은 모두 성안으로 피신했다. 씨앗을 주워 먹던 떠돌이 새조차 홰를 치며 자리를 피했다. 깃발을 흔드는 적막한 바람에서 전쟁의 냄새가 물씬 났다.
부우우우-웅-
빠아아아아-암-
과묵한 몬트의 뿔나팔이 황량한 언덕을 넘어 울려 퍼졌다. 아침 일찍 정찰을 나간 기마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돌아왔다. 펄프 대장이 성문을 향해 소리쳤다.
“쪽문을 열어! 빨리!”
기마대는 도개교까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격자문 앞에서 간신히 고삐를 당기고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곁문으로 뛰어 들어왔다.
“적 선봉이 북동쪽 900야드에 이르렀습니다!”
언덕 하나 넘으면 보일 거리였다. 펄프 대장과 애꾸눈 볼포스는 도개교를 올리고 2중 성문을 완전히 봉쇄했다. 이제 적이 전부 죽거나 수비대가 전부 죽을 때까지 열리지 않을 것이다.
“건물을 부수지 않으면 좋겠는데요.”
어린 집사가 버려진 축사와 황금 보리 수도원을 보며 중얼거렸다. 오크가 공성병기를 만들 줄 알면 허물어서 자재로 쓰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비바람을 피할 막사로 쓸 것이다.
“그런 것은 다시 지으면 그만이야.
로벨은 흐룬팅의 폼멜을 만지며 능선을 보았다. 오크는 깃발을 쓰지 않았다. 오크의 조악한 재주로는 천을 재단하고 문양을 새길 수 없었다. 그러나 세력을 과시할 상징물을 포기하진 않았다.
언덕 너머에서 사람 머리가 올라왔다. 하나, 둘, 다섯, 여섯, 스물, 마흔... 오크의 머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살아있는 머리도 아니었다. 목 아래에 기다란 장대가 달려있고, 운반자의 서툰 동작에 좌우로 흔들렸다.
“저... 저 개 같은 놈들이...!”
“옛 신이시여!”
인간의 머리를 장대에 매달아 깃발처럼 올렸다. 옛 신의 기사가 주먹을 꽉 쥐었다.
“나의 형제들입니다.”
컨틀렛이 으스러지는 소리를 내었다. 기사단은 신자를 모두 형제라 부르지만, 이 경우는 같은 기사단원을 뜻했다.
“무기는 뺏고, 몸뚱이는 먹고, 머리는 선전도구를 쓰는군.”
파리가 앉은 퀭한 흰자와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을 보니 알뜰하다고 칭찬할 수 없었다. 옛 신의 기사가 간청했다.
“공왕 폐하! 저 더러운 괴물을 심판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로벨은 고개를 저었다.
“전쟁은 이제 시작이오. 미리 힘 빼지 마시오.”
“허나...!”
언덕 위로 계속해 오크가 나타났다. 그 숫자가 무려 1,200마리였다. 로드릭 시티의 주둔하는 울프 용병단보다 많았다.
“히야, 새까맣게 몰려오는구만...”
“이 도시는 한 번도 함락된 적 없어! 어디 한 번 와 봐라!”
여장(女墻) 바로 뒤에 배치된 크로스보우 중대가 큰소리치며 쿼럴을 장전했다. 사기를 고취시키는 용병 나름의 방법이었다.
로벨은 말단 용병들이 소란을 피우게 내버려두고 중대장을 찾았다.
“시작은 가볍게. 환영 인사를 준비해.”
겁쟁이 데비가 허리에 찬 깃발을 뽑았다. 성탑마다 대포를 2, 3문씩 두었기에 수기가 필수였다. 대포가 발전하고 탄도학이 정립되면 수기만으로 포각을 지시할 수 있지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표적이 언덕 전체인데, 빗나갈 일은 없습니다요.”
겁쟁이가 하얀 깃발을 휘저었다. 횃불을 가진 포수 외에는 화급히 구석으로 떨어졌다.
“온다! 온다!”
목초지를 점령한 오크가 병장기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오크어(語)를 몰라도 대충 알 것 같았다. 죽이자, 빼앗자, 먹어치우자. 뭐, 그런 내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선두의 오크들이 일제히 달려왔다. 푸른 풀이 새까만 괴물에게 덮여갔다.
“점화!”
“점화!”
겁쟁이 데비가 붉은 깃을 올렸다. 7살 꼬마도 알 수 있는 신호였다. 포수가 횃불을 내렸다. 로드릭 시티 동문 4개 성탑이 불이 뿜었다.
콰과쾅! 쾅! 콰강-!
전설 속의 용이 불을 뿜으면 이러할까, 시뻘건 불길이 치솟고, 매캐한 화약연기가 구름처럼 성탑을 덮었다. 오크 시야에서는 더욱 무시무시했다. 구름을 찢고 새까만 돌덩이가 날아들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흡사 뱀의 숨소리 같았다. 쒸이이이- 쒸이에에-
자주 들을 수 없는 소음이지만 소감을 남기기는 힘들었다. 포탄에 직격당한 최악의 오크는 하반신만 남기고 증발했고, 운이 좋아 빗겨 맞은 오크도 팔다리 하나씩은 떼어내야 했다.
비탈길에 수직으로 떨어진 포탄은 산산이 깨져서 주변 오크를 난자했고, 무른 땅에 비스듬히 떨어진 포탄은 돼지 오줌보처럼 통통 튕기며 오크의 발목과 종아리를 박살냈다.
한 차례 포격으로 오크 20여 마리가 죽거나 부상 입었다. 울프 용병단과 옛 신의 기사단은 한마음으로 기뻐했다.
“이게 바로 과학이란 것이다!”
“인간의 위대함을 알아보겠냐!”
“옛 신이시여! 감사하나이다!”
그러나 오크의 흉포함을 얕잡아 보았다. 옆 친구가 찢어진 정도로 멈추지 않았다. 피를 뒤집어쓰자 더욱 흥분해서 달려왔다.
“붉은 산을 지나쳐 왔으면 대포가 익숙하겠지.”
포격 한 번으로 승리할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뽑으며 명령했다.
“크로스보우 준비!”
“크로스보우 중대 사격 준비!”
“사격 준비! 사격 준비!”
로벨의 명령은 애꾸눈을 통해 각 소대로 하달되었다. 여장 위로 팽팽히 당겨진 쇠뇌가 올려졌다.
대포를 재장전하는 포수의 욕설과 옛 신을 찬양하는 기사단의 기도문이 아련히 들려오는 가운데, 사격준비를 마친 베테랑 사수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두 눈은 적에게, 두 귀는 지휘관에게 고정했다. 로벨이 칼끝으로 태양을 베었다.
“사격 개시!”
“발사!”
“쏴라! 쏴!”
명령이 하달되는 속도로 쿼럴이 쏘아졌다. 하나하나는 작고 가느다란 나무 쪼가리지만, 200여 발이 뭉쳐서 날자 흡사 물새떼 같았다.
“뀌이익-!”
“뀍-!”
하늘로 비스듬히 날아오른 강철 새는 중력에 이끌려 금방 아래로 기울어졌다. 용의 불처럼 무시무시하지 않았다. 겨울을 배웅하는 봄비처럼 가냘프게 느껴졌다. 조금 모자란 오크는 입을 벌리고 빗물을 받아마셨다. 퍼걱-!
쇠촉이 목구멍을 뚫고 척추 두 번째 마디를 끊으며 빠져나왔다. 경각심이 부족한 대가로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다. 물론, 지혜롭다고 오래 사는 것은 아니었다. 쿼럴에는 눈이 없으니 상대를 골라가며 해치지 않았다. 삽시간에 서른 여 마리가 나뒹굴었다.
“좋아! 제1소대 사격준비! 제2, 제3소대는 재장전하는 대로 쏴라!”
수많은 오크가 땅바닥에 처박혔지만, 그보다 더 많은 오크가 멈추지 않고 달려왔다. 해자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도 기어이 성벽에 도달했다.
“돌을 던져!”
“뒈져라! 괴물아!”
외팔이 소대가 호딩(Hoarding)의 바닥을 열고 준비한 돌덩이를 투하했다. 원시적이 무기지만 중력에 힘입어 우수한 파괴력을 발휘했다. 머리가 깨진 오크들이 저주를 퍼부었다.
“이 정도면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겠어요!”
“아직 아니야.”
오크가 아무리 무식하고 무지해도 맨몸으로 성벽을 넘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먼저 온 오크가 해자를 건너자 사다리를 짊어진 오크가 출발했다. 해자 너머에서 받아 바로 성벽에 세울 작정이었다. 어린 집사가 칼자루를 꼭 쥐고 감탄했다.
“어느 오크 대가리에서 나온 작전인지 몰라도 대단한데요?”
허나, 쉬운 작전은 아니었다. 전쟁에 이골이 난 울프 용병단이 가만두지 않았다. 성벽에 붙은 오크들은 빠르게 시체로 변해갔다.
“끄악-!”
“존! 존이 맞았다!”
인간도 피해가 없진 않았다. 오크 중에는 셀프 보우(Self Bow: 단일소재로 만든 원시적인 활)를 가진 놈이 다수 있었다. 오크의 조잡한 손재주로 만든 활과 화살이지만, 재수 없으면 피를 보았다.
“고개 숙여! 인마! 고개 숙이고 장전하라고!”
오크제 무기라고 방심하다가 여럿 당하자 소대장이 몸을 사리라고 쥐어박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겁쟁이 데비가 하얀 깃발로 포격 준비를 알렸다.
“Fire!”
“Fire!”
4개의 성탑이 다시 불을 뿜었다. 언덕을 거의 내려온 오크 무리는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박살났다.
“제1소대! 사다리 옮기는 놈을 쏴! 해자를 넘지 못하게 막아!”
닦달하지 않아도 준비하고 있었다. 최고 중의 최고라 자부하는 크로스보우 제1소대 사수들은 성가퀴 틈새로 신중히 방아쇠를 쥐었다.
“뀌이이이-!”
넘어지고, 자빠지고, 엎어지고, 데굴데굴 구르기까지 하는 혼잡한 전장에서 정확히 사다리 오크를 맞혔다. 가장 무거운 부분을 지탱하던 두어 마리가 쓰러지자 무게를 못 이긴 오크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가장 튼실한 사다리가 해자 속에 처박혔다. 절제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 정도야?”
로벨은 발아래 아비규환에서 시선을 돌려 북동쪽을 보았다. 옛 신의 기사단을 패퇴시킨 몬스터 군단과 그들을 조종하는 악마추종자가 있는 곳이었다.
“이 정도로 내 성과 내 군대를 무너트리지 못해. 그건 너희도 잘 알 텐데?”
로벨은 해와 바람을 베지 못한 아론다이트를 칼집에 넣었다.
이기고 있음에도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
오크들은 약 2시간가량 파상적으로 공격한 후 사다리가 망가지자 후퇴했다. 부상자를 수습해 재활용하는 전통은 없는지 제 발로 걷지 못하는 오크는 전부 버리고 갔다. 그 덕분에 뒤처리가 힘들어졌다.
“사지가 붙어있으면 일단 쑤시라고! 엉? 그냥 쑤셔! 시체인 줄 알고 옮기다 물리며 니들 손해야!”
팔다리가 멀쩡하거나 피가 좀 덜 묻었다 싶으면 창으로 찔렀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실제로 열에 하나꼴로 멀쩡히 살아있었다.
“우아악! 이 자식! 죽은 척하고 있었어!”
싸움개가 투덜거리며 숏 스피어를 당겼다. 죽은 척한 건지, 기절했다 깨어난 건지 모를 오크가 창대를 잡고 버텼다. 이대로 창이 뽑히면 죽는다는 것을 아는 듯했다. 물론, 버틴다고 오래 살지는 않았다.
싸움개는 창이 안 뽑히자 허리춤에서 클리버를 뽑아 오크 머리를 찍었다. 고통 없이 한 방에 갔으니 용쓴 보람이 있었을 것이다.
“카악- 퉷!”
싸움개는 징글징글한 오크 시체에 침을 뱉고 다음 오크를 찾아갔다. 위험하고 피곤하고 찝찝한 확인사살보다 짜증나는 것이 있었다.
“전리품으로 건질 게 없는데?”
“사람 고기를 처먹는 괴물한테 뭘 바래? 쇠붙이가 있으면 그거나 주워 담아.”
쇠붙이를 줍는 것은 크로스보우 중대가 잘했다. 쿼럴을 회수하면서 부러진 창과 녹슨 단검도 챙겼다. 병기로 쓰지 못할 저급한 철도 잘 다듬으면 화살촉으로 쓸 수 있었다.
한편, 나이와 직위를 방패로 육체노동을 하지 않은 펄프 대장이 전장을 한 바퀴 살핀 후 중얼거렸다.
“얼추 300구 정도 되는군.”
“이야! 대단한 전과 아니오?”
허풍쟁이가 슬그머니 따라붙으면 추임새를 넣었다. 부상병은 따로 없을 테지만, 그걸 감안해도 전체 병력의 1/4을 해치웠다. 사실상 괴멸수준이었다. 인간이었으면 진작 백기를 들고 항복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보다 많아.”
“헹! 저능한 괴물이 많아 봤자죠! 몇 번을 와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승리감에 젖은 젊은 용병이 외쳤다. 사기가 곤두박질치는 것보단 나았기에 혀를 한번 차고 못들은 척했다.
“오크뿐이면 그렇지만...”
목초지 뒤로 물러난 오크 900마리를 제외해도 1,800마리의 끔찍한 괴물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