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84화 (484/605)

484화. 생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어 꼬리처럼 묶고, 리넨으로 된 슈미즈(Chemise: 중세풍 셔츠) 위에 소매가 넉넉한 우플랑드(Houppelande: 중세 귀족풍 외투)를 걸치고,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쇼오스(Chausses: 스타킹 비슷한 하의)를 착용해 가터링으로 고정한 후 무릎까지 내려오는 브레(Braies: 헐렁한 반바지)를 입었다.

옛 신의 사제들이 좋아할 소탈한-공왕 치고- 복장이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허리와 골반에 시 서펜트 가죽으로 만든 소드 벨트를 한 바퀴 감고, 전설로 남은 두 자루 칼을 빗겨 찬 후 이름도 아름다운 알루미늄 왕관을 머리에 얹었다.

“훌륭해요! 멋있어요!”

오늘은 토너먼트 각 분야 우승자에게 상금을 내리고 정식으로 축하연회에 열어야 했다. 검소한 로벨이라도 의관을 갖춰야 했다.

“누가 우승할까요?”

“우승도 우승이지만...”

로벨은 코가 뾰족한 가죽 부츠를 고쳐 신고 일어났다. 훤칠한 키와 차분한 표정이 어우러지자 위엄이 가득했다.

“오늘 일어날 일은 보통 일이 아닐 거야.”

1층 홀로 내려가자 로벨 만큼은 아니어도 화려하게 차려입은 펄프 대장과 마녀 키르케, 리암 수사 등이 맞아주었다.

“첫 시합이 제3시니까, 결승전은 점심때일 거예요.”

“봉신들은?”

“숙취로 뻗어있거나 시합장에 가 있겠죠.”

로벨은 늑대성을 지탱하는 식솔들과 함께 아성 밖으로 나갔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늑대성과 로드릭 시민의 안전이야. 그러니 무슨 일이 벌어져도 당황하지 마.”

첫 번째 요구는 가능했다. 그러나 두 번째는 여러모로 무리한 요구였다. 본디 휴경지로 잡초가 드문드문 자란 마상시합장에 도착했을 때 확신되었다. 시합장이 어수선했다. 축제의 흥분이나 결승의 긴장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공포, 당황, 불신에 가까웠다.

“무슨 일이야?”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펄프 대장이 오른발을 살짝 끌며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기사, 상인, 시민, 농민이 다채롭게 뒤섞여 있었다. 그래서 불길했다.

“이게 무슨 소란이오?

“아, 펄프 대장.”

왕의 용병대장, 그것도 볼탄 반도 최강이라 불리는 울프 용병단의 대장이면 어지간한 영주보다 ‘급’이 높았다. 전원 모자를 벗어 경의를 보이고 친절히 설명했다. 좋은 소식은 아닌 듯했다. 펄프 대장의 표정이 시시각각 나빠졌다.

“불길한데.”

“불길하죠.”

로벨 일행의 표정도 안 좋아졌다. 이쪽 예감은 항상 잘 맞았다. 잠시 뒤, 펄프 대장이 돌아왔다. 꽤 긴 이야기를 나눴는데, 로벨에게 올리는 보고는 짧았다.

“옛 신의 기사단이 패전했습니다.”

때때로 짤막한 무기도 아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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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시가 되자 북동쪽 바위성과 도너반 남작 마을에서 전령이 도착했다. 소문이 사실로 밝혀졌다.

로벨이 파견한 볼탄 반도 기사와 옛 신의 기사단은 남부와 동부에서 연이어 승전하며 북쪽으로 치고 올라갔다. 로드릭 시티 토너먼트가 개최되던 나흘 전만 해도 오크 부락을 짓밟고 200여 개의 수급을 북부대로 관문에 걸었다. 그러나 로벨이 술에 취한 어젯밤, 네일 공국과 맞닿은 모몬트 영지에서 대패했으며, 인근 마을이 불에 타 수천 명의 피난민이 발생했다.

“기사단을 따르던 순례자 무리까지 흩어져서 당장 갈 곳 없는 사람이 4천 명이에요.”

“4천 명...”

로드릭 시티 인구와 비슷했다. 어린 집사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대부분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거예요.”

결승전은 자연스럽게 취소되었다. 수백 명의 기사가 패퇴하고, 수천 명의 피난민이 몰려오는데, 한가로이 마상시합을 구경할 사람은 없었다. 북쪽에 거점이 있는 기사들은 화급히 수행원을 데리고 떠났고, 당장 급하지 않은 기사들도 고향에 소식을 전하느라 분주했다.

“강철성 백작은?”

“진즉에 떠났어요. 우리보다 전선에 가깝잖아요.”

더스틴 폴라 경은 시합장에 남아있었다. 무슨 계획이었는지 모르지만, 암살대상이 사라졌으니 말짱 도루묵이었다.

“성으로 불러. 기사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야.”

옛 신의 기사단을 박살낸 적의 전력을 생각하면 당장 전투를 준비해야 했다. 성안에 남은 기사들을 모으고, 울프 용병단을 소집하고, 포탄과 화살을 최대한 준비했다.

시간이 지나 제11시가 되자 새로운 전령이 도착했다. 바위산보다 멀리 떨어진 붉은 산의 하인즈 자작이 보낸 전령이었다.

“북쪽에서 출몰한 몬스터 대군이 남하하고 있습니다! 숫자는 약 3천 마리! 대형종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년간 평화로웠던 볼탄 반도가 흔들렸다. 마왕 버그베어의 악몽이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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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하루가 지나자 피난민이 도착했다.

리암 수사가 수도원을 개방하고, 마녀 키르케가 두 발로 쫓아다니며 환자들을 돌보았다. 걱정한 것과 달리 숫자가 많지 않았다.

“그게 아니에요.”

어린 집사가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옛 신의 기사단이 패배한지 3일 지났어요. 3일 만에 이곳까지 온 사람은 젊고 건강한 게 당연하죠.”

어린 집사의 예견이 맞았다. 다시 하루가 지나자 나이가 많고 몸이 불편한 피난민이 도착했다. 숫자는 앞서 온 피난민보다 몇 배 많았다.

로벨은 왕관을 쓴 채 성 밖 피난민을 찾아갔다. 로벨의 정체를 알아본 순례자들이 지친 몸을 움직여 무릎 꿇었다.

“오오... 왕이시여...”

“우리를 구원해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처음에는 일부 순례자만 반응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재산을 잃은 상인과 모몬트 영지 농민까지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걸했다. 무적무패 왕의 이름을 믿고 피난 온 사람들이었다. 고지식한 기사가 아니어도 내칠 수 없었다.

“공왕 폐하! 공왕 폐하!”

피난민 사이에서 건장한 체구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누더기 같은 쉬르코 틈새로 판금갑옷이 보였다.

“기사들이오?”

“저는 저스티스 기사단 델 포니 수도원 소속이고, 이쪽 형제님은 성십자 기사단 소속입니다.”

로벨은 살아남은 기사단을 반겨주었다. 피난민이 가져온 정보는 풍문이 뒤섞여 신뢰도가 떨어졌다. 적과 직접 싸운 기사단의 정보가 필요했다. 그리고 실전경험이 풍부한 중무장한 기사는 큰 전력이었다.

“처음에는 고블린 부락을 소탕하는 작은 작전이었습니다.”

저스티스 기사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한탄하듯 말했다.

“우리에게는 옛 신의 가호가 있고, 적은 작고 냄새나는 괴물이었습니다. 실패할 리 없는 작전이었습니다.”

그 말은 실패했다는 뜻이니 준비과정은 적당히 건너뛰었다.

“...그렇게 벌레 같은 새끼 고블린까지 짓밟았을 때입니다. 갑자기 9피트는 될 법한 거인이 나타나 형제들을 공격했습니다.”

로벨이 새 맥주를 하사하고 다시 물었다.

“오우거? 아니면 트롤이오?”

“제 식견이 짧아 확답은 못하나, 오우거로 추정됩니다.”

로벨의 표정이 한층 심각해졌다. 로벨의 수많은 명예 중에는 ‘오우거 살해자’가 있었다. 그만큼 잡기 힘든 대형 몬스터였다. 어린 집사가 근심을 덜어내듯 따져 물었다.

“오우거 한 마리 때문에 기사단이 패퇴했다고요?”

소속 불문 기사단 전원이 항변했다.

“한 마리? 옛 신이시여! 설명을 잘못했군. 우리를 공격한 거인-오우거는 못해도 30마리였소.”

“그리고 오우거만 나타난 것도 아니요. 맙소사! 그 광경을 보여주고 싶군. 수천 마리의 오크, 고블린, 놀, 그렘린들이 비와 우박처럼 쏟아졌소.”

로벨이나 어린 집사나 상상력이 좋지 못한데, 이번만큼은 얼추 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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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하루가 지났다.

끝없이 밀려오던 피난민 행렬이 마침내 줄었다. 그러나 아무도 기뻐하지 않았다. 적이 가까이 왔다는 뜻이니까. 로벨은 애써 차려입은 의관을 벗어던지고 갑옷과 투구를 챙겼다.

피난민 중 일부는 로드릭 시티의 성벽을 믿지 못해 남쪽으로 떠나갔다. 페르젠 시티, 버팅거 시티, 혹은 프란시스 시티까지 도망갈 모양이었다. 그곳에 지인이 있으면 모를까, 오랫동안 힘든 나날이 될 것이다.

물론, 로드릭 시티에 남는다고 행복한 미래가 보장되지 않았다. 가난은 기사도 현자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녀 키르케의 병원과 황금 보리 수도원의 객실은 진작 가득 찼고, 갈 곳 없는 피난민은 거리에 주저앉았다. 어린 집사가 귀리를 찢겨 만든 대량의 스프를 배급하여 간신히 통제했다.

“언제까지 도시 안에 둘 수 없어요! 먹이는 것도 먹이는 거지만, 싸는 것도 감당이 안 된다고요! 지금 거리는 온통 부랑자 아니면 똥밭이에요!”

거주 인구가 50% 가까이 늘어나니 감당이 안 되는 것이 당연했다.

“여기서 쫓아내면 갈 곳이 없잖아?”

“최, 최소한 격리를 하자는 거죠! 성 밖에 천막을 치고 그리로 보내세요! 그게 옳아요!”

피난민을 그대로 두면 도시 기능이 마비될뿐더러 전염병의 위험이 있었다. 자비와 배려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로벨은 펄프 대장과 애꾸눈 볼포스를 불러 피난민을 휴경지로 쫓아냈다.

기사들이 화려한 깃발을 휘날리며 용맹하게 대결하고, 시민들이 술과 고기를 뜯으며 열렬히 환호하던 축제의 현장이 음울한 난민촌이 되었다. 세 걸음 갈 때마다 콜록거리는 환자와 앓아누운 병자가 보였다. 여름이라 다행이었다. 초봄이나 늦가을만 되었어도 세 자릿수 난민이 얼어 죽었을 것이다.

“적이 붉은 산을 지나쳤습니다.”

펄프 대장이 회의실 구석에서 보고했다. 로벨은 식탁 위에 지도를 펼치고 말했다.

“버그베어 때와 이동 경로가 같은데?”

“북쪽에서 내려오는 길은 정해져 있으니까요. 칫! 기왕이면 강철성이나 덩굴성으로 빠지면 좋을 텐데...”

로벨은 볼탄 반도 지도를 가만히 살폈다. 평생을 나고 자란 고향이며, 평생 동안 싸워온 전장이었다. 샛길 하나하나까지 알지는 못하지만, 크고 작은 마을과 강줄기는 손바닥처럼 꿰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도착한 피난민이 전하길, 적의 선두는 근육질 난쟁이 괴물이라 합니다.”

“오크? 하긴, 그렇겠지.”

무리 짓는 몬스터 중 가장 인간과 가까운 것이 오크였다. 쉽게 뭉치고 금방 단합했다. 오크가 성질 더러운 고블린이나 주의력이 결핍된 놀보다 신속히 행군하는 것은 당연했다.

“기마 용병을 보내 숫자와 이동 방향을 알아내.”

“그렇지 않아도 생환한 기사단 양반들이 정찰 나갔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와 보고하겠다고 합니다.”

로드릭 시티로 돌아온 기사단은 3개 구 소속 모두 합쳐 22명에 불과했다. 포로를 잡지 않는 몬스터 특성상 추가 생존자는 없을 것이다. 얼마 안 되는 숫자지만, 대장장이를 불러 무기와 갑옷을 수리하고 마시장의 전투마를 빌려주어 수비전력으로 삼았는데, 비로소 밥값을 하는 듯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과묵한 몬트 소대를 보내. 옛 신의 기사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한 게 좋잖아?”

“예. 그리하겠습니다.”

로벨은 로드릭 시티 인근 영지를 쭉 보았다. 충성을 맹세한 봉신이 여럿 있었다.

‘이들 중에 몇이나 소환에 응할까?’

소환에 응해도 오늘이나 내일 바로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도 용병을 모으고 농민을 징집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까지는 가진 전력으로 싸워야 했다.

‘결국, 머리 없는 기사의 예언이 맞은 건가?’

로벨은 찝찝함을 덜어내기 위해 회의실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해볼 만했다. 로벨에게는 울프 용병단과 옛 신의 기사단, 그리고 더스틴 폴라 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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