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83화 (483/605)

483화. 마지막

토너먼트의 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마상창 시합이었다.

인마(人馬) 합쳐 최대 1,600파운드의 거체가 시속 16만 피트 속도로 충돌하여 승패를 가르는 광경은 원초적인 파괴본능을 충족시켰다. 거대한 창과 화려한 갑옷이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은 덤이었다.

“우와아아아-!”

“와아아아-!”

창이 부러져서 하늘로 날아오르고 갑옷 입은 기사가 중력에 이끌려 땅에 떨어질 때마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승자는 부러진 창을 높이 치켜들고 영광의 술을 마셨다.

“뭐, 이변이 없네요.”

“다크호스가 없으니까.”

로벨이 자신을 가리키자 어린 집사 이하 공왕 측근들은 재빨리 딴청을 피웠다. 무적무패 왕이 마상시합에 나오면 관객들은 즐겁겠지만, 왕의 위엄과 안전에 신경 써야 하는 측근들은 매 순간이 괴로웠다. 로벨은 시무룩해져서 관심을 돌렸다.

“백작은?”

이번 토너먼트에 참관한 백작이 셋이었다. 어느 백작을 말하는지 헷갈릴 법한데, 꼭 짚어 대답했다.

“강철성 출신 기사의 시합이 제9시니까, 그때쯤 올라올 거예요.”

창을 전부 소진하고 3대 3 동수를 이룬 기사들이 전투마에서 내렸다. 기사 종자가 칼과 철퇴를 가져다주는 동안 헬름과 컨틀렛을 고쳤다. 개싸움이 예고되었다.

“우- 우우-”

관객들이 야유했다. 토너먼트용 갑옷은 과장 좀 해서 물소떼가 밟아도 멀쩡한데, 안전상 갑옷 틈새를 찌를 단검이나 뾰족한 워 피크(War pick)를 쓰지 못하니 상대를 제압하는 것보다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게 빨랐다. 한두 번은 봐줄만 하지만, 세 번쯤 반복되면 지루했다. 검술의 달인 로벨은 더욱 그러했다.

‘적당할 때 판정내야지.’

로벨은 턱을 괴고 심드렁하게 개싸움을 구경했다. 텅! 텅! 까강-! 텅! 깡통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어린 집사가 하품을 참으며 말했다.

“참가자는 많은데 실력 있는 기사가 별로 없어요. 아자르 경이나 슐츠 경을 불러올 걸 그랬나 봐요.”

“새 영지를 관리하느라 바쁘잖아.”

관객들의 야유가 커지자 로벨이 의자에서 일어나 승자를 정해주었다. 패배한 기사는 투구를 벗어 내동댕이쳤지만 감히 불복하지는 않았다. 로벨을 비롯해 켈트 경, 바이란 경, 랭스터 경 등등 늑대성 최고의 기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항의할 만큼 간이 크지 않았다.

멋있지만 지루하고, 요란하지만 단조로운 시합이 몇 차례 더 이어졌다. 그래도 졸거나 딴짓하지 않은 것은 아는 얼굴이 종종 나왔기 때문이다.

“무적무패 왕이 직접 서임한 명예로운 기사! 자유도시연맹의 야만인을 사흘 밤낮으로 떨게 한 켈트 가문의 자랑! 그 이름도 위대한 조나 켈트 경!”

로벨 일당의 시선이 켈트 남작을 향했다. 중년을 넘어 장년을 향해가는 노장(老將) 켈트 경이 시뻘게진 얼굴로 하늘을 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랭스터 경이 순박하게 응원했다.

“아들이 출전했으면 미리 말해주지 그랬소.”

“...가문의 망신은 나 혼자로 충분하오.”

“응? 그게 무슨 말이오?”

그게 무슨 말인지 첫 충돌로 알 수 있었다. 조나 켈트 경은 다이다믹한 동작으로 낙마했다. 지금까지 시합 중 가장 빠른 승부였다. 어린 집사가 한숨을 쉬었다.

“어쩌자고 저런 인간을 기사 서임해 준 거예요?”

“쉿! 쉿! 켈트 남작이 듣잖아.”

로벨의 배려가 남작을 더욱 괴롭게 했다.

그것 외에도 페르젠 ‘주니어’ 백작의 장남과 볼트 헤르만 백작의 조카사위 시합도 볼만했다. ‘딴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는 질 수 없다’는 강박관념이 느껴져서 마상창과 도보전 모두 치열했다. 처음으로 얼굴이 터지고 핏물이 뿌려졌다.

그들을 응원하는 두 가문도 격렬했다. 페르젠 기사가 철퇴로 무릎을 때려 헤르만 기사를 쓰러트리자 페르젠 ‘주니어’ 백작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환호했다.

“그렇지! 잘한다! 죽여! 죽여 버려!”

기사다운 과격한 응원에 기사치고 점잖은 사람들이 불편해했다.

“아니, 시합인데 죽이는 것은 좀...”

“그냥 내버려두게. 못 배운 상인 집안이 그렇지.”

볼트 헤르만 백작의 후계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페르젠 가문이 불이라면 헤르만 가문은 기름이었다. 활활 잘 타올랐다.

“상인 집안? 그럼 그쪽은 농부 집안인가?”

“옛 신의 뜻을 따라 정직하게 땀 흘리는 농부가 사기꾼에 협잡꾼보다 낫지.”

불길이 거세지자 교양 있는 사람들은 로벨을 힐끔 보았다. 그러나 소방관은 따로 있었다.

“본인이 늦었군. 미안하오.”

세 번째 백작이 나타났다. 숙적이라고 하지만 같은 파벌에 속한 두 백작과 달리 뿌리부터 다른 백작이었다.

“뭐야, 사트로 후작 봉신이 이곳에 왜 온 것이야?”

“그거 섭섭하오. 본인도 공왕 폐하 즉위에 많이 기여했거늘. 정작 얼음성에서 나 몰라라 한 기사들은 따로 있지 않소?”

세상에서 가장 얄미운 것이 펙트로 깐죽거리는 것이다. 페르젠과 헤르만은 영양가 없는 말로 구시렁거린 후 서로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 사이 아홉 번째 시합이 끝났다. 승자는 상대방의 무기를 빼앗은 페르젠 가문 장남이지만, 바이저 틈새로 흘러나오는 피와 질질 끄는 오른발을 보아 다음 시합에 참가하지 못할 것이다. 고작 한 회전 차이였다.

“닥터 줄리안을 보내서 치료해줘.”

참가자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마상시합이라 주최자가 치료해줄 의무는 없다. 의사를 보내는 것은 두 백작을 위한 배려이자 존중이었다. 그 사실을 안 백작들을 헛기침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강철성의 거친 진화보다 한결 보기 좋았다.

하지만 불이란 게 한 곳을 끄면 다른 곳에서 피어나는 악동 같은 것이다. 오늘의 마지막 시합이 시작되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제, 제1회 로드릭 시티 토너먼트 사냥대회 우승자! 무적무패 왕을 따라 잉그비아 왕국을 정발한 용감, 아, 아니, 용맹한 동방의 기사! 더스틴 폴라 경!”

요란한 몸짓과 리드미컬한 문장으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전업 광대가 아니었다. 거리에서 푼돈 주고 데려온 부랑자가 분명했다. 보통은 비웃음의 대상이지만, 이름 때문에 아무도 웃지 못했다.

“더스틴 폴라 경이면...”

“강철성의 암살기사!”

“저런 비열한 자를 출전시키다니!”

로벨이 생각하는 것보다 유명인이었다. 특히 강철성 출신 기사들은 로벨이 있는 왕좌 가까이 와서 항의했다. 더스틴 폴라 경이 시합장을 한 바퀴 돌아 로벨 앞을 지날 때는 칼이 뽑힐 뻔했다. 과묵한 몬트와 흉내쟁이가 기사들을 막느라 고생했다.

“시작해.”

로벨은 일부 기사들의 항의를 무시했다. 최선을 다해 눈치 보던 로드릭 시티 광대가 깃발을 내렸다.

두 마리의 말이 땅을 박찼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에 항의하던 기사들도 돌아보았다. 로벨은 상체를 기울이고 용감한 친구를 관찰했다.

자세가 제법 훌륭했다. 제대로 된 마창 훈련을 받았는지, 아니면 뱀파이어와 드잡이하면서 요령이 생겼는지 창끝이 흔들림 없었다. 저 정도면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1페닝 은화도 정확히 맞힐 것이다.

‘정말 마지막 시합까지 살아남겠어.’

로벨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다. 이곳은 마상시합에 한해서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인 장소였다. 실전과 실전 같은 연습으로 단련된 기사들이 한결같이 인정했다.

“강철성을 상대로 홀로 전쟁을 치를 만하군.”

“공왕 폐하가 아끼시는 이유가 있소이다.”

더스틴 폴라 경은 볼탄 반도 기사들의 기대를 최고치로 충족시켜주었다. 버드나세의 뾰족한 머리가 대적자의 머리를 정확히 가격했다. 헬름이 벗겨져 하늘로 날아올랐다. 순간 정신을 잃은 대적자는 안장 위에서 휘청거리다 옆으로 미끄러졌다.

“도, 동 코너! 더스틴 폴라 경! 승리!”

더스틴 폴라 경은 잠깐의 질주로 헐떡이는 늙은 말을 돌려 로벨을 보았다. 착각이었다. 로벨보다 한 단 아래에 자리한 도반 도트넘 백작을 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아무 몸짓도 하지 않았지만, 감이 좋은 사람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기다리라는 도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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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과 둘째 날에 이어서 셋째 날 시합이 무사히 끝났다.

참가자가 적은 검술 시합과 레슬링 시합, 그리고 진행이 빠른 활 시합은 벌써 우승자가 나왔다. 가장 인기 많은 마상시합 우승자만 남은 가운데, 토너먼트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으으... 으...”

이쯤 오면 제정신인 사람보다 눈이 풀리고 머리가 산발된 사람이 더 많았다. 사흘 연속으로 벌어진 술판에 녹다운된 탓이다.

승자는 승리의 기쁨으로, 패자는 패배의 아쉬움으로, 축하주 한 잔, 위로주 한 잔, 격려주는 덤이오, 답례주는 매너다. 허세와 허풍이 빈 잔을 가만두지 않았다.

잘 먹고 잘 마시는 것이 기사의 매력이라 뭐라 할 수 없었다. 로벨 역시 고주망태가 되어 어린 집사 손에 2층으로 끌려갔다.

주인이 없어도 술잔은 도는 법, 늑대성의 홀은 새벽 늦게까지 웃음이 가득했고, 그 결과 술 냄새 오줌 냄새 오바이트 냄새나는 구울 수십 마리가 엉금엉금 기어나갔다.

“꿀빵이랑 꿀물이요.”

“...고마워.”

로벨은 병든 수사자 같은 몰골로 쟁반을 받았다. 아침에 갓 구운 빵과 따뜻한 꿀차가 향기로웠다. 속이 조금 진정되었다.

“숙취에는 꿀이죠. 키르케가 그러는데, 단 거 먹으면 속이 좋아진대요.”

“숙취 아니야.”

“그럼 뭐에요?”

“영광의 후유증?”

“정신 차리려면 멀었네. 빨리 먹고 씻어요.”

로벨은 양손에 빵과 잔을 들고 창가로 다가갔다. 팔꿈치로 덧창을 밀고 어깨로 고정했다. 아침 햇살이 늑대성과 로드릭 시티를 축복하고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지?”

“예. 정말 길었죠.”

“폴라 경은 어디 있어?”

“지미네 여관이요.”

제4회 로드릭 시티 토너먼트 마지막 날이자 더스틴 폴라 경이 예고한 날이다. 로벨은 꿀빵을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말릴까?’

강철성 기사들은 악명 높은 암살기사가 사흘간 아무 짓도 하지 않아 안심했다. 공왕이 주최하는 자리라 방심도 했을 것이다. 설마 대놓고 암살할까 의심할 수도 있다. 축제의 열기로 지치고 들뜨고 흥분한 오늘이 적기였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도할 지 알 수 없었다.

‘시합 중에 활을 쏠까? 시합이 끝나고 비수를 빼들까? 연회 자리에서 독을 먹일까?’

로벨의 빈약한 상상력으로 그 이상은 추리할 수 없었다.

꿀빵을 반쯤 먹었을 때 아야와 이야카가 찾아왔다. 연회 음식을 배터지게 먹고도 모자란 지 로벨의 아침식사를 탐냈다. 로벨은 남은 빵을 쪼개 한 덩이씩 입에 물리고 창문을 닫았다.

“더스틴 폴라 경 옆에 사람을 붙여. 음. 롱 다리 왓슨이 좋겠어. 왓든이라고? 아무튼 그 친구를 보내. 의심 살 얼굴이 아니잖아.”

솔직히 까놓고 사람 잡아먹는 뱀파이어 왕에게 호감 따위 없었다. 일이 잘못됐을 때 더스틴 폴라 경을 구해낼 생각이었다. 그런 로벨의 걱정을 알아준 것일까,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승전이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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