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82화 (482/605)

482화. 표절

로벨 로드릭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시작한 ‘로드릭 시티 토너먼트’가 어느덧 4회째를 맞이했다. 잦은 전쟁과 예산 문제로 매년 치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4회쯤 되니 전통 비슷한 것이 생겨났다.

“지난 대회 준우승자가 머문 지미&루시 여관으로 오세요!”

“로드릭 시티 명물 꿀빵 있습니다! 토너먼트 기간 한정 기사빵도 판매합니다!”

“검술시합은 셋째 날이에요. 첫째 날에는 퍼레이드로 정신이 없는데 누가 시합을 보겠어요?”

수완 좋은 상인들은 지난 대회 이름을 팔아 수익을 올리고, 떡잎 바른 꼬마들은 경기장을 안내하거나 자리를 맡아주는 일로 용돈을 벌었다.

여관은 헛간조차 비지 않을 만큼 가득 찼고, 술집은 연일 최고 매출을 갈아치웠으며, 셋 이상 모인 테이블에서는 자연스럽게 도박이 성립되었다.

“이게 왜 기사 빵이야?”

“자세히 보세요. 기사처럼 생겼잖아요.”

“...자세히 보니까 염소 같은데?”

그래서 동문(東門) 거리 두 번째 골목 ‘유쾌한 용병들’ 술집에 죽치고 앉은 기사와 기사 종자는 크게 주목받지 않았다. 전(前) 울프 용병단 소속 술집주인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기사가 기사 같지 않은 기사 빵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목초지를 개방해야 하지 않을까? 시합에 나갈 말들이 많잖아.”

“마시장에서 먹이고 재울 거예요. 마상시합에 참가할 정도면 말 먹이 비용은 가져왔겠죠.”

“휴경지를 시합장으로 삼은 것은 잘한 것 같아.”

“그렇죠? 겨울에 밭 갈 수고도 덜고 좋죠.”

지금쯤 눈치챈 사람이 있겠지만, 기사는 공왕 로벨 로드릭이고, 기사 종자는 공왕의 오랜 벗 어린 집사였다. 시끌벅적한 토너먼트도 세 번쯤 치르고 나니 애쓰지 않아도 알아서 굴러갔다. 그래서 가장 바쁜 두 사람도 짬을 내어 놀러 나올 수 있었다.

“기사들이 모인 것은 좋아요.”

“역시 그렇지?”

로벨은 용기와 명예, 그리고 영광스러운 승리를 생각했지만, 어린 집사의 뜻은 달랐다.

“폐하가 먼저 보낸 가난뱅이 기사 30명이랑 옛 신의 기사 300명이랑 기사단을 따르는 순례자들이랑 장사꾼이랑 떠돌이랑 전부 합치면 거의 도시 인구예요.”

“그 덕분에 몬스터가 사라졌잖아?”

“아직 사라지진 않았지만, 많이 줄긴 했죠. 그래서 대비해야 하고요.”

어린 집사는 먹지 않고 자꾸 굴리는 기사 빵을 빼앗아 머리를 씹었다.

“그것들이 허튼짓 못 하게 견제해야 하니까요.”

토너먼트에 참가하는 기사가 무려 120명이었다. 그들을 따르는 기사 종자와 수행원을 생각하면 당장 전쟁을 치러도 될 규모였다.

“그런 이유야?”

“교회를 견제하고, 교회를 개입시킨 불만도 해결하고, 잉그비아 왕국에서는 일석이조라고 하죠.”

로벨은 반 토막 난 기사 빵 도로 빼앗아 입에 쑤셔 넣었다. 장작을 아끼려고 달덩이만 하게 구운 딱딱한 빵이 아니었다. 생긴 것은 이상해도 설탕과 우유를 사용한 고급 빵이었다.

“음? 맛있는데?”

“...폐하가 맛을 알아요?”

“무슨 뜻이야?”

“맨날 보리빵만 찾잖아요.”

“아아, 그것은 검소함이란 것이야.”

“빈곤함이겠죠.”

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몇 개 더 사기로 했다. 좋은 것은 나눠 먹어야 하니까.

“아니지! 아니야! 중요한 것은 우리 공왕 폐하지!”

시장 바닥에서도 자기 얘기는 잘 들리는 법이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잡담을 멈추고 옆옆 테이블 대화에 집중했다. 그 자리에 누군가가 대신 물어주었다.

“어째서 말이오?”

“우리 왕이 참가하면 우승은 보나 마나 아닌가!”

“공왕 폐하가 마상시합에 참가한다고?”

“그럼 우승후보가 의미 없잖아!”

여러 도박꾼의 궁금증은 어린 집사가 물어주었다.

“설마, 또...”

“아냐! 이번에는 안 나갈 거야! 호른 경도 없는데 내가 왜 나가?”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건지, 잘 보일 사람이 없다는 건지 헷갈리지만, 아무튼 얌전히 있겠다니 다행이었다.

“공왕은 참가하지 않는 것이오?”

그때, 로벨 쪽으로 한 사람이 다가왔다. 대부분 도박에 정신이 팔린 상황이라 이상한 일이었다. 로벨은 칼집을 살짝 당겼다가 놓았다.

“더스틴 폴라 경.”

약속한 만남은 아니지만, 토너먼트가 사흘 뒤라 도시 어딘가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크게 놀라지 않았다.

“합석해도 되겠소?”

강철성의 수배가 풀리지 않았지만, 공왕 앞에서 공왕의 토너먼트에 참가한 기사를 해칠 사람은 없었다. 로벨이 고개를 끄덕이고 어린 집사가 자리를 한 칸 옮기자 태연히 마주 앉았다. 크고 작은 활이 덜그덕- 거렸다.

“공왕이 참가하지 않으면 시시한 시합이 되겠군. 안타까운 일이오.”

어린 집사가 무례하게 실소했다.

“1회전에서 낙마한 기사가 할 말이 아닌데요?”

“...그때는 규칙을 잘 몰랐다.”

“핑계 없는 무덤 없고, 사연 없는 과부 없다죠?”

“고인과 미망인을 동시에 모욕하다니, 무엇을 믿고 그리 오만방자하지?”

“제 주인이요.”

“그럼 할 말 없군.”

어린 집사의 주인은 여전히 눈치를 살피는 술집주인을 불러 맥주를 하나씩 주문했다. 그리고 두 친구가 말다툼을 멈출 때까지 창밖을 보았다. 바다와 이어져 상인이 주로 이용하는 서문(西門)과 달리 각양각색 사람이 보였다. 축제에 쓰일 고기와 치즈를 옮기는 농부, 정수리의 땀을 쉼 없이 닦는 수사, 예쁜 화관을 쓴 소녀와 소녀 손에 끌려가는 수줍은 소년 등등.

“그럼 페닝이 떨어져서 온 거예요?”

“어째서 그런 결론이 나오지?”

“얼굴을 보니까 귀리죽도 못 먹은 거 같아서요.”

“...귀리죽은 먹었다.”

잠깐 한눈판 사이에 대화가 산으로 갔다. 로벨은 멀리 간 대화를 쫓아가지 않고 왕답게 앞으로 불러왔다.

“그동안 어찌 지냈소?”

더스틴 폴라 경은 ‘지금껏 뭘 들은 것이오?’라고 화내지 않았다.

“뱀파이어 사냥을 계속했소.”

얼마 전 뱀파이어 군주를 만나고 온 입장에서 부담되었다. 로벨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성과가 있었소?”

“글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더스틴 폴라 경은 맥주를 벌컥벌컥 마신 후 뒤늦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지만, 왕의 하사품이었다.

“뱀파이어를 여럿 잡았소.”

“그렇소?”

지성을 가지고 주술을 부리는 뱀파이어는 몬스터의 귀족으로 통했다. 그런 괴물을 역으로 사냥했으니 확실히 보통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냥꾼의 표정은 심통 가득했다.

“피를 먹어도 보고, 먹여도 봤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소. 답답한 나머지 태양빛에 구워가며 심문했으나 본인들조차 아는 것이 많지 않더이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꼬챙이에 꿰여서 햇빛 아래 빙글빙글 도는 뱀파이어를 떠올렸다. 우스운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본인 생각에 뱀파이어 군주, 강철성의 백작만이 뱀파이어를 만들 수 있는 것 같소.”

강철성에 호감이 없는 어린 집사는 적극 동조했다. ‘그 망할 백작을 죽이세요. 아, 우리가 사주했다고 말하진 말고요. 진짜 아니잖아요?’ 하지만 불사의 비밀을 알게 된 로벨은 동의하지 못했다.

“본인이 생각하니까, 아니, 그러니까 유명한 마법사가 말하기를, 경이 찾는 불로불사는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소.”

로벨은 영성(靈性)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사실 고민할 필요 없었다. 로벨이 늑대의 왕을 해치워 영성을 얻은 것처럼, 뱀파이어 군주를 죽이면 영성이 생길 것이다. 괴물을 죽여서 괴물이 되는 것은 흔한 소재니까.

‘죽지 않는 왕을 죽이면 죽지 않는 기사가 될지도 모르겠네?’

만약 그리되면 뭐라고 불릴까. 악마 사냥꾼? 흡혈귀 사냥꾼? 이름이 무엇이듯 새로운 마도의 수호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열심히 하시오. 응원하겠소.”

로벨이 설명을 포기하자 더스틴 폴라 경은 미소 지었다.

“그리 말해주어 고맙소.”

그리고 맥주잔을 마저 비웠다. 갈증이 많이 나는지 아쉬운 눈길이 흐르고, 깊은 상념이 이어졌다.

로벨은 가난한 떠돌이 기사가 가엾어 저녁 식사라도 대접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폴라 경은 저녁이 고픈 것은 아니었다.

“최근에 몬스터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고 들었소.”

“그것 때문에 이번 토너먼트가 열렸죠.”

어린 집사가 결과론적으로 하소연했다. 그래서 더스틴 폴라 경이 오해했다.

“본인이 단언하는바, 강철성 백작의 짓이오. 그자를 죽여야 하오.”

도반 도트넘 백작이 오해를 걱정한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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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마도의 수호자와 잉그비아 왕국 악마추종자에 관해 성의껏 설명했다. 옛 프란시스 가문의 공자 이야기부터 흑태자 에드워드 이야기까지 10여 년에 걸친 싸움도 빠지지 않았다.

더스틴 폴라 경은 갑자기 커진 주제에 힘겨워했으나 간신히 로벨의 사정을 이해했다. 그래서 안쓰럽게 말했다.

“공왕이 속은 것이오.”

동방에서 온 사냥꾼은 한결같았다.

“공왕도 알다시피 뱀파이어 군주, 강철성의 도트넘 백작은 간사하고 간교한 자요.”

더스틴 폴라 경에게 뱀파이어 군주는 만악의 근원쯤 되는 모양이다. ‘가만, 실제로 그런가?’ 볼탄 반도의 전쟁 중 절반은 그자가 원흉이었다.

“설령 이번 일의 배후가 아니라 해도, 지금껏 그랬듯 계속해 음모를 꾸밀 것이오.”

로벨도 뱀파이어 군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찌할 생각이오?”

“토너먼트 마지막 날에 강철성 백작을 죽일 것이오.”

어린 집사가 짧게 비명 질렀다. 축제를 망치면 로벨의 명성에 금이 갔다. 아니, 사트로 가문과 로드릭 가문의 전쟁이 일어날 수 있었다.

“기왕이면 토너먼트가 끝나고 하세요!”

“내 단독소행이니 공왕에게 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백작의 정체가 밝혀지면 아무도 트집 잡지 못할 테지.”

“그렇게 말해도... 에라, 모르겠다.”

어린 집사는 생각을 포기하고 로벨을 보았다. 로벨은 고운 미간에 주름을 잡고 깊은 고민에 잠겼다. 옛날 같았으면 기사의 명예 운운하며 무조건 반대했을 텐데, 세월 탓인지 왕의 자리 탓인지 감정만 앞세우지 않았다. 고민하고 고민해서 마침내 결정했다.

“본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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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로드릭 시티 토너먼트가 개최되었다.

행사에도 관록이 쌓이는지 지난 축제보다 크고 멋지고 화려했다. 자격을 갖춘 122명의 기사가 시가지를 돌며 퍼레이드했다.

울프 용병단이 통제하는 골목골목은 물론이고, 2층 창문, 3층 발코니, 옥상과 성탑에 몰려든 시민이 꽃잎과 색종이를 뿌렸다. 꿈 많은 청년들은 목청 높여 환호하고, 사랑에 목마른 처녀들은 애절한 눈빛으로 응원하며, 기운이 넘치는 꼬마아이들은 가장 멋지고 가장 늠름한 기사를 쫓아다녔다.

하얗게 빛나는 햇살과 보석처럼 빛나는 갑옷과 수천 명의 관중이 어우러지니 그야말로 여름 축제였다.

“...안 좋아. 안 좋다고.”

북문 광장에 차려진 임시 왕좌에서 뽀루퉁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도 참가할 걸 그랬어.”

그 옛날 세 오라비가 자기만 쏙 빼놓고 놀러 갔을 때 표정과 비슷했다. 왕좌 옆에 어린 집사와 리암 수사가 불안한 눈빛을 교환했다. 그래서 다음 대사에 즉각 반응했다.

“지금이라도 참가할까? 주최자 특권으로?”

“안 돼요! 절대 안 돼!”

“결단코 안 됩니다!”

로벨이 입술을 삐죽이는 사이, 토너먼트 참가 기사들이 시내를 한 바퀴 돌고 북문 광장에 도착했다. 과묵한 몬트 소대가 뿔나팔을 꺼내 힘껏 불었다. 빠아아아암-! 빠아아암-! 도시를 흔드는 함성이 한순간 사라졌다. 찬란한 태양과 뜨거운 바람과 멋모르는 갓난아기 울음소리만 남았다. 응애- 응애애-

로벨은 왕좌에서 일어나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먼 옛날 소년 왕이 그러했듯 간결하게 기사들을 축복했다.

“싸워라! 이겨라! 그리고 영광을 쟁취하라!”

한 차례 휴식으로 힘을 비축한 함성이 더욱 크게 터져 나왔다. 기사들이 병장기를 꺼내 하늘 높이 휘둘렀다. 태양빛이 수천, 수만 갈래로 찢어졌다. 평생 추억할 감동적인 순간에 어린 집사가 중얼거렸다.

“그거 표절 아니에요?”

“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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