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81화 (481/605)

481화. 당근

로벨은 멱살을 쥐고 번쩍 든 용병을 옆으로 치웠다. 천 옷을 입었어도 황당할 일인데, 사슬갑옷을 입고 있었다. 악력으로 사슬을 으스러트리며 잡아 올린 것이다.

“니콜라스 곤트 백작이오?”

곤트 백작은 땅바닥을 기며 도망가는 용병을 힐끔 보았다. 목울대 사슬이 압착기로 찍은 것처럼 꾸겨져 있었다. 저 힘으로 목을 비틀면 마른 갈대처럼 부러질 것이다.

“그, 그렇소. 본인이 곤트 가문의 당주요.”

늙은 백작이 용기를 끄집어냈다. 먼저 온 13명 중 죽은 사람은 총 맞은 악마추종자뿐이었다. 기사와 용병 중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 땅에서 무슨 행패를 부린 것이오?”

“죄 없는 사람을 구제하였소.”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본인이 판단하오.”

이 마을의 사법권은 곤트 백작에게 있었다. 지극히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세속의 권리로 어쩌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악마와 관련된 일이오.”

“악마? 누가 악마란 말이오?”

로벨은 죽은 마녀를 가리켰다.

“저 여자는 잉그비아 왕국에서 온 악마추종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 본인을 모욕하는 거요?”

“그리 부정해도 소용없소. 이단심문관이 올 것이오.”

“교회를... 교회를 끌어들인 것이오?”

옛 신의 위세가 예전 같지 않다고 하나, 지방의 일개 영주가 무시할 상대는 아니었다. 볼탄 반도의 왕이 고발했다면 더욱더 말이다.

“어찌 왕이란 자가 그럴 수 있소? 그대의 선조와 그대의 기사들에게 부끄럽지 않소?”

비난은 각오했다. 그러나 굽히지 않았다.

“그만큼 볼탄 반도가 위태롭소. 그대 같은 자 때문이지. 나는 내 땅의 내 사람들을 지킬 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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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풍쟁이가 옛 신의 사제를 데리고 돌아왔다.

로벨은 ‘내 말이 맞지?’ 하고 으쓱거렸지만, 몇 번 하지 못했다. 숫자가 조금, 아니, 지나치게 많았다.

“서른 명? 마흔 명?”

숫자만 많은 것이 아니었다. 구성원 또한 대단했다. 금실로 수놓은 휘황찬란한 가파 마그나(Cappa magna: 고위 성직자의 망토)와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한 갈레로(Galero: 계급, 출신, 소속 등을 보여주는 교회 문장의 일부). 이단재판 자격이 있는 수도사제를 데려올 줄 알았더니, 사트로 시티의 주교와 성 도미닉 수도원장을 데리고 온 것이다.

“성 도미닉 수도원이면...”

“이단재판소로 소문난 곳이야.”

촌장을 불러오라 했더니 제후들을 모아온 격이다. 교황을 안 데려와 그나마 다행이었다.

로벨은 제 주인을 향해 씩씩하게 달려오는 허풍쟁이에게 속삭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것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야긴데...”

“짧게.”

“사트로 시티 교회에 이미 모여 있었습니다요.”

로벨이 아는 것을 교회가 모를 리 없었다. 아니, 로벨부터 여러 번 사람을 보내 경고했으니 모르는 것이 이상했다

“기다리고 있었구나.”

옛 신의 교단을 다시 보았다. 유라피아 대륙의 질서를 수백 년간 지탱해온 이유가 있었다.

“저 여자가 악마추종자란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아, 아니오. 나는 몰랐소.”

“스스로 ‘진리탐구회’ 소속이라 밝혔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어찌 악마와...”

“악마를 따르는 무리들이 자칭하는 이름입니다. 옛 신의 지고지순한 진리를 부정하는 뜻이지요.”

“나는, 나는 몰랐소.”

볼탄 반도의 왕이 고발하고 사트로 시티의 주교가 주관하며 이단재판소의 최고권위자가 판결했다. 그 앞에 악마추종자의 시체가 버젓이 있으니 빼도 박도 못했다.

“이 땅에 이적 행위가 횡행하는 것이 확인된바, 옛 신의 이름으로 정화를 요청할 것이오.”

“볼프 후작이, 제후들이 허락할 것 같소?”

곤트 백작이 늙은 몸으로 악을 썼다. 그러나 사제와 수사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사트로 시티 주교가 인자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곤트 백작, 제가 왜 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교쯤 되면 성직자이기에 앞서 정치가였다. 볼프 사트로 후작이 승인한 것이다. 볼탄 반도의 두 주인이 허락했으니 이제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곤트 가문의 처벌은 대단치 않았다. 사트로 시티 교회 미사에 참석하고, 이후 정식으로 회개할 것을 요구했다. 몸이 불편하거나 업무상 자리를 비울 수 없으면-즉, 체면이 중요하면-약간의 봉헌금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이단재판치고 대단히 관대했다.

“역시 정치가야.”

왕의 시야로 바라본 탓일까, 교회의 의도가 조금 엿보였다. 영주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었다.

“성 도미닉 수도원장 윌리 무리엘입니다.”

이단재판이 끝나자 수도원장이 찾아왔다.

“볼탄 반도 공왕 로벨 로드릭이오.”

로벨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저스티스 기사들과 리암 수사하고 친하지만, 교회 자체는 껄끄러웠다. 로벨도 어쩔 수 없는 세속의 군주였다. 그러나 성 도미닉 수도원장은 아니었다.

“공왕 폐하의 한결같은 신앙심이 그분을 기쁘게 합니다.”

“음...?”

로벨은 무슨 소리인가 의아해하다 간신히 깨달았다. 황금 보리 수도원을 봉헌한 일과 악마추종자를 고발한 일을 가리켰다.

“공왕 폐하를 가르친 푸른 언덕 수도원장이 크게 기뻐할 겁니다.”

“아, 그렇소?”

로벨은 뒷목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로벨’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성 도미닉 수도원장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성호를 그었다.

“옛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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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탓일까, 전화(戰火) 탓일까, 볼탄 반도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저스티스 기사단 120명, 구호 기사단 100명, 성십자가 기사단 70명 등이 볼탄 반도로 들어왔다. 명분은 이교도 색출과 이단 행위 처벌이었다.

제후들은 열렬히 반발했다. 중무장한 기사가 300명이면 자연재해에 필적했다. 정의! 심판! 믿음! 외치면서 칼부림하지 않더라도, 수백 필의 말과 수천 명의 순례자가 먹어 치우는 식량이 이미 재앙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출몰한 몬스터로 고통받던 벽촌의 영주들과 치안 부재로 발이 묶인 상인들은 크게 기뻐했다. 썩어도 준치고 망해도 삼대는 간다고 기사단의 위용은 엄청났다. 몬스터가 말발굽에 쓸려나갔다.

로벨 일행은 늑대성으로 돌아와 성공적인 모험이라 자축했다. 곤트 백작을 누르고, 악마추종자를 퇴치하고, 기사단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어린 집사 생각은 달랐다.

“곤트 백작이 훼까닥 돌아가지고 폐하를 죽이려고 했으면요?”

“에이, 설마?”

“잉그비아 왕자와 연줄이 닿은데다 악마추종자를 고용할 정도인데, 설마라니요? 곤트 백작이 10년만 젊었어도 폐하를 찌르고 망명 갔을 가능성이 더 높아요.”

“내가 그렇게 쉽게 당하...”

“그래요. 폐하는 강하니까 기사가 몇 명이고 병사가 몇십 명이어도 잘 빠져나왔겠죠. 그런데 외팔이는요? 마녀 키르케는요?”

“...음.”

“악마추종자를 살해한 것도 문제예요. 그게 진짜가 아니었으면 어쩌려고요?”

“그건 확인했어! 돼지 농장 둘째 아들이 진리탐구회라고 말했다고!”

“얼굴, 나이, 성별 등을 확인했나요? 그 자리에 나온 여자가 ‘진짜’라고 판단한 근거는요? 저라면 대리인을 내세웠어요. 그래서 살해당하면 역으로 폐하를 압박했을 거예요.”

어린 집사가 조목조목 따지며 질책하자 로벨과 마녀 키르케의 목이 점점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성 도미닉 수도원이요.”

‘이단재판소’라 불릴 정도로 권위 있는 수도원이었다. 물론, 이단재판관이 아무나 마녀로 지목하는 광신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마녀를 죽이는 일보다 마녀로 몰린 불쌍한 사람을 구제하는 일을 더 많이 했다. 그것도 100여 년 전이고, 지금은 마녀재판보다 이혼소송이나 친자소송을 더 많이 담당했다.

“그래도 뿌리는 어디 안 가요. 그쪽에서 비밀을 파헤치려고 하면...”

켕기는 것이 많아 수사기관이 껄끄러웠다.

“뭐, 좋아요. 지난 일은 덮어두죠.”

로벨 일동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여태껏 볶아놓고?’ 어린 집사가 무슨 문제 있냐는 듯 쳐다보았다.

“왜요? 좀 더 이야기해요?”

“아니! 괜찮아! 충분히 알아들었어!”

어린 집사가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자 미래지향적인 인간이 되었다. 역시 지난 일보다 앞으로의 일이 중요했다.

“각 지방에 출몰한 몬스터는 기사단이 때려잡고 있지만, 치안과 행정까지 맡길 수 없어요.”

“영주들이 알아서 하지 않을까?”

“그걸 알아서 할 수 있으면 애초에 골칫거리가 안 되었죠.”

어린 집사가 서류를 정리해 올렸다. 지방 영주들이 보낸 탄원서와 로드릭 상회 소속 상인들의 피해 보고서였다.

“울프 용병단을 보내야 할 곳이에요. 영주가 도망간 곳도 있어서 서둘러야 해요.”

로벨은 숫자를 세고 난색을 표했다.

“페닝이 많이 들 텐데?”

“공짜라고 한 적 없어요. 나중에 전부 받아내야죠.”

“...역시 집사야.”

칭찬이 아닌데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어린 집사는 쑥스럽게 웃고 다시 말했다.

“그리고 재갈이 필요해요.”

마녀 키르케가 입을 막는 시늉하자 어린 집사가 고삐를 당겼다.

“기사단을 끌어들인 일로 폐하를 불신하는 자들이 있을 거예요.”

“그야 그렇겠지...”

교회의 힘을 빌려서 제후들을 탄압하려 한다는 둥 벌써부터 음모론이 나오고 있었다.

“헛소리 못하게 입을 막아야죠.”

“어떻게?”

“채찍과 당근이요.”

채찍은 울프 용병단이었다. 사나운 늑대를 각 지역에 보내서 으르렁거리게 하면 소심한 초식동물은 찍소리 못할 것이다.

“사자나 곰 같은 맹수들은 화를 낼 텐데?”

페르젠 가문, 헤르만 가문, 랭스터 가문 등이 그러했다. 소위 ‘뼈대 있는’ 가문들은 용병 따위에 겁먹지 않았다.

“그래서 당근이 필요하죠.”

어린 집사가 한숨을 쉬었다.

“제4회 로드릭 시티 토너먼트를 개최할 때가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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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너먼트를 개최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왕과 제후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기사의 기량을 시험하기 위해서, 시민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 등등. 피와 폭력, 그리고 일정 기간 동안의 축제란 점에서 고대 왕국 시절 검투사 시합과 유사하지만, 지배계급이 직접 참가하며, 승리의 영광을 오롯이 승자가 차지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토너먼트는 왕의 축제도, 농민의 축제도 아닌, 기사의 축제였다.

“프란시스 시티에서 온 마상시합 참가 신청서에요.”

“이게 전부?”

“전부라니요? 아직 반도 검토 못 했어요.”

로벨의 행보에 불만을 표시하던 기사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알랑방귀를 뀌며 초대에 응했다. 그 숫자가 세 자릿수를 넘기니 지방 토너먼트처럼 당일 신청을 받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로벨은 질색하면서 참가자 명단을 살폈다. 이름, 가문, 기사 서임을 해준 마스터와 공증인, 전장에서 세운 공훈, 마상시합 참가경력 등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공왕이 주최하는 토너먼트라 나름대로 알아주는 가문의 내놓으라 하는 기사들이었다.

“아니, 전부는 아니네.”

로벨은 잉크가 많이 묻지 않은 참가자를 발견했다. 보잘것없는 경력 한 줄이라 오히려 눈에 잘 띄었다.

-제1회 로드릭 시티 토너먼트 사냥대회 우승

동방의 기사 더스틴 폴라 경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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