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80화 (480/605)

480화. 용두

로벨은 거침없이 마을 광장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거침’은 과부와 병자와 고아를 돼지 몰듯 모는 마을 주민이었다. 고로 ‘거침이 없음’은 마을 주민을 향한 물리력을 뜻했다.

“비켜.”

과부의 젖먹이를 빼앗으려 하는 남자의 목덜미를 잡아치웠다. 객관적으로 표현하면 ‘집어던졌다’지만, 사람이 사람을 던지는 것은 상식 영역에 존재하지 않아 최대한 비슷한 단어를 사용했다. 남자는 12피트쯤 ‘치워’졌다.

“우아아아아악-!”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생각할 정신 있는 모든 이가 쳐다보았다. 로벨은 셋 중 하나가 없는 사람을 이리저리 치우며 광장 중앙에 도달했다. 영주의 청지기가 포고문을 읽거나 사형수를 매달 때 사용하는 단상에 껑충 뛰어 올라갔다.

“저들은!”

시선이 집중되었다. 자기소개부터 해야 하지 않나 고민했지만-기사의 숙명이다- 이미 운을 뗀 탓에 빠르게 마무리했다.

“저들은 마녀가 아니야!”

어느 지방 어느 가문 어느 기사라고 소개하지 않아도 척 보면 귀한 기사였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여러 번 경험했듯 농민들은 가문과 작위에 크게 관심 두지 않았다. 칼과 갑옷, 그리고 수행원이 있으면 그냥 높은 분이었다.

“선량한 이웃을 괴롭히지 마! 당장 풀어줘!”

“하, 하지만...”

로벨의 설득을 가장한 협박에도 ‘마녀 사냥꾼’은 물러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지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질끈 감은 눈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저들은 배우지 못했을 뿐 천치가 아니었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평생을 부대끼며 살아온 이웃이 마녀인지 아닌지 모를 리 없었다.

‘탐욕이야.’

정답을 알자 해결책이 나왔다. 로벨의 성품상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이곳에 진짜 마녀가 있어.”

마녀 키르케가 움찔했다. 그러나 로벨은 단 한 번도 마녀를 마녀라 부른 적이 없었다. 어린 집사, 외팔이, 애꾸눈, 허풍쟁이는 별명으로 불러도 마녀 키르케는 항상 키르케라 불렀다.

“그자를 막지 않으면 엄청난 재앙이 찾아올 거야. 이틀 전 쥐 소동하고 비교할 수 없어.”

거짓말이 아니었다. 인육을 즐겨 섭취하는 몬스터가 찾아올 테니까.

“지, 진짜 마녀라굽쇼?”

“어디에요? 어디에 있습니까요?”

재물이 좋아도 목숨만 못했다. 상당수 마을주민이 두려움에 떨었다. 대중을 움직이는데 공포만한 것이 없었다.

“이 마을에 마법사로 판명된 사람이 누구 있지?”

이것도 거짓말이 아니었다. 영주 성에 마법사가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그래! 처음부터 이상했어! 마녀가 마녀를 찾아오라 시키다니!”

“방귀 뀐 놈이 성을 내고, 도둑놈이 도둑 잡자고 설치는 법이지!”

기사 시대에 다소 생소한 개념이지만, 일종의 여론전이었다. 마을 주민은 곤트 백작과 백작이 데려온 ‘진짜 마녀’를 탓하기 시작했다.

영주성으로 쳐들어가자 하면 전부 꼬리를 말고 내빼겠지만, 기왕 뭉친 김에 소리 내어 비난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악마추종자의 마법을 막을 수 있었다.

“모두 멈춰라! 조용히 해라!”

그때, 곤트 가문의 기사와 용병이 인파를 헤집고 다가왔다. 외팔이와 마녀 키르케는 긴장해서 로벨 뒤에 바짝 붙었다.

“이곳은 니콜라스 곤트 백작님의 마을이오! 어디서 온 누군지 모르나 소란을 피우지 마시오!”

곤트 가문 기사가 호통쳤다. 무작정 끄집어 내리지 않은 것은 기사에 대한 예의였다. 로벨도 기사답게 대응했다.

“로드릭 가문의 로벨 로드릭이오.”

곤트 가문 기사는 ‘로드릭’이란 성을 세 번쯤 곱씹었다. 이상하게 귀에 익었다.

“무, 무적무패 왕?!”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기억력이 아주 나쁘지 않았다. 기사는 칼자루를 쥐었고, 용병들은 창날을 앞으로 기울였다. 호의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으앙, 저 사람들 돈 떼먹었어요?”

마녀 키르케가 이상한 소리를 했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 폼멜에 손을 얹고 곤트 백작군을 쭉 훑어보았다.

‘기사 한 명. 용병 다섯 명.’

3대 6이지만, 지리적으로 유리했다. 싸움이 벌어지면 허리 높이 단상이 바리게이트가 되어 줄 것이다. 쇠뇌가 등장하기 전까지 그리 생각했다.

“이곳은 왕의 거들먹거릴 수 있는 남부지방이 아니오! 당장 내려오시오!”

마을 곳곳에 흩어져있던 곤트 가문 용병이 모였다. 폭동으로 번질까봐 계속 감시한 모양이다. 상황을 알고도 손을 쓰지 않은 것이 괘씸했다. 장전된 크로스보우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면 진작 혼내줬을 것이다.

‘곤란한데...’

로벨은 괜찮았다. 하프 아머 차림이지만 갑옷을 입었으니까. 몸을 웅크리고 급소를 보호하면 한 번쯤은 견딜 것이다. 하지만 외팔이와 마녀 키르케는 아니었다.

그러나 곤란한 것은 곤트 가문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로벨을 해치면 남부의 영주들이 태풍처럼 밀고 올라올 것이다. 복수의 기치를 걸면 사트로 후작도 보호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전쟁은 부차적인 일이다. 애초에 ‘무적무패’를 해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곤트 가문 기사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제길, 제길, 제기랄... 겁먹지 말자. 무적무패도 사람이다. 칼로 찌르면 죽는다. 아마도. 아마도 말이야.’

로벨 일행과 곤트 백작군이 대치했다. 피 냄새를 감지한 마을 주민은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마을 광장에는 무기를 가진 사람만 남았다. 마녀로 지목된 가엾은 여자들도 풀려났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외팔이가 허전한 왼팔을 바클러로 감추며 속삭였다.

“걍 미안하다 말하고 떠납시다요.”

“...안 돼.”“

“왜 안 됩니까요?”

“부끄럽잖아.”

로벨의 자존심은 회색 산과 붉은 산을 합친 것보다 크고 높았다. 외팔이가 불경한 표정을 지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답 없는 대치가 이어지자 결국 원흉이 나타났다.

“어디서 쥐새끼가 숨어들었나 했더니... 그 이름도 위대한 무적무패 왕이셨군요.”

로벨이 칼을 뽑았다. 그러나 곤트 가문 용병들은 쇠뇌를 쏘지 않았다. 오히려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들 사이로 후드를 쓴 젊은 마녀가 걸어왔다.

“마녀?”

얼굴은 구름처럼 하얗고 머리카락은 핏물처럼 붉었다. 불그스름한 뺨과 도톰한 입술이 특히 매력적이었다. 갓 성인이 된 10대 소녀처럼 보이기도 하고, 세월을 슬기롭게 빚어낸 40대 미부(美婦)처럼 보이기도 했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 과부나 병자와 확연히 다른 ‘진짜 마녀’였다.

“속지 마세요. 마녀(Hag)는 추한 노파예요.”

로벨도 알고 있었다. 여러 번 해치운 전적도 있었다. 그리고 진짜 미녀라 해도 로벨이 유혹당할 일은 없었다. 근육질 미남 기사라면 모를까.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겨냥했다.

“자기 발로 찾아오다니, 겁이 없구나?”

“왕이 오셨으니 배알하는 것이 아랫사람의 도리지요.”

“너 같은 아랫사람 둔 적 없어.”

“그리 말하시면 섭섭합니다. 마도의 왕이지 않습니까.”

마녀가 미소 지었다. 역시 로벨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로벨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너희 목적은 뭐야? 나야?”

“말할 수 없습니다.”

“너희 두목은 어디 있어?”

“그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 나도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니야.”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치우고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마녀 키르케가 꼬뜨 사이로 기다란 막대를 꺼냈다. 지팡이라고 하기는 길이가 짧고, 몽둥이라 하기는 잡은 방향이 이상했다. 굵고 휘어진 곳을 잡은 채 가느다란 방향을 앞으로 내밀었다.

“대, 대포다!”

“아쿼버스잖아!”

전쟁 경험이 풍부한 기사와 용병이었다. 화기의 정체를 바로 알아보았다. 고용주를 위해 몸을 던지면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칼잡이로 길이 남겠지만, 용병은 업계 관례상 ‘충성’과 거리가 있었다. 애초에 백작에게 고용된 건지 마녀에게 고용된 것이 아니었다. 총구를 피해 좌우로 갈라졌다.

“어... 어?”

마녀 키르케가 방아쇠를 당겼다. 기계장치에 따라 용두(龍頭)가 기울어지고, 불붙은 화승이 화약에 닿았다. 치치직-! 초석과 숯과 유황의 거친 알갱이 사이로 불꽃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제 성질을 못 이겨 급속히 팽창되었다. 콰과광-!

열과 충격이 총강을 따라 총구로 뿜어졌다. 그 과정에서 앞을 막은 종이를 태우고 작은 납탄을 밀어냈다. 여기까지 겨우 1.2초였다. ‘진짜 마녀’는 눈을 크게 뜨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붉게 달궈진 납탄이 고뜨를 찢고 살을 뚫고 뼈와 장기를 으스러트렸다.

“으헤헤! 제 사격 솜씨가 어떻다고요?”

마녀 키르케가 연기 나는 총구를 휘저으며 깔깔 웃었다. 사람을 쏘고 좋아하다니, 정말 마녀 같았다. 로벨과 외팔이는 마녀를 향해 몸을 던졌다. 응징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마법사가 당했다!”

“저쪽이 먼저 쐈어!”

“사격! 사격 개시!”

곤트 가문의 크로스보우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로벨과 외팔이는 마녀 키르케의 겨드랑이를 하나씩 잡고 단상 반대편으로 뛰어내렸다. 두 사람 모두 키가 커서 상대적으로 작은 마녀 키르케는 두 발이 두둥실 떴다.

“우와악-!”

숙녀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지만, 쿼럴에 맞는 것보단 백 배 나았다. 머리 위로 살의가 담긴 쇠촉이 스쳐 갔다. 슝- 슝슝- 공기 찢어지는 소리가 소름끼쳤다.

“이제 어쩝니까요, 기사 나으리!”

목숨이 오락가락하니까 옛날 호칭이 나왔다.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고쳐 쥐고 턱짓했다.

“키르케 데리고 여관으로 가. 상황을 봐서 숨거나 사트로 시티로 도망가.”

“그러는 나으리는 어쩌고요?”

“고작 열두 명이잖아?”

저게 어딜 봐서 ‘고작’이냐고 묻지 못했다. 로벨은 사격이 끝나자 즉시 뛰쳐나갔다. 재장전할 시간을 줘서 안 되었다. 옳은 판단이었다. 쇠뇌 등자를 밟고 낑낑거리던 곤트 가문 용병은 범처럼 뛰어오는 강철 기사에 기겁해서 나자빠졌다.

“으, 으앗! 오지마!”

칼밥 먹으면서 두고두고 후회할 대사였다. 로벨은 달리는 속도로 용병의 턱을 후려 찼다. 머리가 기이한 각도로 돌아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의식은 진작 끊어졌다.

“저자를 막아라! 빨리 막아!”

곤트 가문 기사가 롱소드를 뽑았다. 직접 덤빌 용기는 없는 모양이다. 숫자를 믿는 건지, 아니면 밥값을 하려는 건지 용병들이 몰려왔다. 그중 하나가 훌륭한 자세로 롱 스피어를 찔렀다. 로벨은 상체를 틀어 창날을 옆구리로 흘리고 창대를 붙잡았다.

“머, 뭐야? 놔!”

“싫어.”

로벨의 장기 중 하나가 괴력이었다. 로벨은 창대를 역으로 휘둘렀다. 밥벌이 도구를 뺏기지 않으려고 용쓰던 용병은 압도적인 힘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혹은 ‘무기에 휘둘리지 마라’ 가르치던 옛 고참의 충고를 실감했다. 그러나 고인이 되었을 고참도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다.

“우아아아아-”

로벨은 창을 찌른 용병을 창과 함께 날려버리고 계속 전진했다. 칼이 날아들고, 도끼가 날아들고, 그새 장전한 쿼럴이 날아왔지만, 그 무엇도 로벨을 막지 못했다. 칼은 칼날째 박살내고, 도끼는 도끼주인을 먼저 때리고, 쿼럴은 그냥 팔뚝으로 쳐냈다. 쇠뇌를 쏜 용병이 기겁할 정도로 깔끔한 방어였다.

“인간이 아니잖아!”

사악한 마녀가 살아있었으면 ‘정답이다’라고 칭찬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녀는 등장에 비해 퇴장이 보잘것없었고, 미처 무대를 떠나지 못한 곤트 가문 식솔들은 처참하게 두들겨 맞고 있었다.

“그만! 그만하시오, 무적무패 왕!”

기사, 용병, 마법사가 차례로 등장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니콜라스 곤트 백작이 늙은 몸을 이끌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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