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79화 (479/605)

479화. 동화

곤트 가문이 250년 동안 다스려온 ‘곤트 백작 마을’이 난리 났다.

사내답기로 유명한 털보 농부는 텃밭에서 몰려나오는 수백 마리 쥐떼에 그만 비명 질렀고, 정숙하기로 소문난 중년 부인은 천장에서 쏟아지는 쥐떼에 기어이 부지깽이를 휘둘렀고, 첫째를 임신한 새 신부는 요람에 떨어진 주먹만한 쥐를 보고 그대로 기절했다.

마을 주민은 마을에 이렇게 많은 쥐가 있는지 몰랐다. 그리고 쥐들이 미쳐 날뛰는 이유도 알지 못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신 나간 쥐들이 백작성으로 몰려간다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성문을 닫아! 당장!”

“배수구로 들어온다! 배수구를 막아!”

곤트 가문의 기사와 용병이 급히 움직였지만, 평소 생각해본 적 없는 적이고 갑작스러운 기습이라 순식간에 성문이 뚫렸다. 참담한 패배였다. 어린 시종과 시녀가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오고, 가축들이 겁에 질려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끝이오?”

“끝인데요?”

“죽은 사람은 없수?”

“기절한 사람은 조금 있어요.”

“기둥을 갉아서 성을 주저앉히거나 식량창고를 거덜 내거나...”

“말이 되는 소리 좀 하세요. 멧돼지떼를 불러와도 그건 못해요.”

사실 고작 쥐였다. 헛간에 구멍을 내고 식량을 도둑질하고 몹쓸 병을 옮기지만, 그 자체로는 큰 위협이 안 되는 작고 겁 많은 짐승이었다. 성과 마을을 한바탕 뒤집어 놓은 후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도 대단하잖아? 이런 재주가 있는 줄 몰랐는데?”

로벨이 칭찬하자 마녀가 ‘이히힛!’ 웃었다.

“기사님 덕분이죠. 기사님이 지켜보니까 인지의 세계가 쉽게 확장되어... 어, 그런 게 있어요! 깊이 알려고 하지 마요!”

혼자 신나서 설명하다가 버럭! 화내고 때려치웠다. 마녀가 이상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니 기사도 용병도 깊이 신경 쓰지 않았다.

“악마추종자가 어떻게 나올까요?”

“곤트 백작이 어찌 생각하느냐에 달렸지.”

쥐 소동의 원흉을 악마추종자로 보고 쫓아낼 수 있고, 저주나 재앙으로 여겨 해주(解呪)하라 시킬 수 있다.

“사악한 마녀의 소행이라 이단심문관을 부를 수도 있죠. 암요.”

허풍쟁이가 으스스하게 말했다. 하지만 영리한 마녀는 겁먹지 않았다.

“성 안에 마법사가 있는데요? 곤트 백작님도, 악마추종자도, 이단심문관이 달갑지 않을 걸요?”

영주의 권위를 생각하면 이만한 일로 교회의 조력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악마추총자가 직접 나설 것이다.

“안 나서면?”

“자기 외에 다른 마법사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 분명 찾아 나설 거예요.”

“그래도 소심해서 끝까지 안 나서면?”

“그럼 한 번 더 소동을 일으켜야죠.”

마녀가 심술궂게 웃었다. 여름이 가까우니 모기떼도 무시무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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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키르케의 예상이 적중했다. 곤트 백작이 닦달한 탓인지, 위협적인 현지의 마법사가 거슬려서인지 알 수 없지만, 아침 일찍 악마추종자가 행동했다.

“...이와 같이 미루어 볼 때, 근래에 문제를 일으키는 몬스터와 한통속으로, 사악하고 음탕하며 간사스러운 마녀의 소행이 분명한 바, 누구든 마녀로 의심되면 영주님의 성으로 고변할 것이며...”

“누가! 누가 사악하고 음... 음탕... 우우웁!”

외팔이와 허풍쟁이가 포고문에 항의하는 마녀를 위아래로 틀어막았다.

성에서 나온 시종과 용병은 미심쩍은 눈으로 외지인을 쳐다보았는데, 로벨이 앞을 가로막자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기사와 시비가 붙어서 좋을 것 없었다.

“힉-! 히이익-!”

마녀의 주둥이를 틀어막은 허풍쟁이가 화급히 손을 떼었다. 혀로 손바닥을 핥은 모양이다.

로벨과 외팔이는 마녀가 다시 소리칠까 주의 깊게 살폈다. 그러나 조금 뿌루퉁할 뿐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자기도 마녀면서 마녀를 고발하라 지시하다니요. 동종업계의 상도덕이 없잖아요.”

로벨은 포고문을 고이 접어 성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생각한 것과 다르지만, 나쁘지 않아.”

“어떻게 말입니까요?”

“백작이 마법을 시인했잖아. 이단심문관을 불러도 할 말이 없을 거야.”

마녀의 얼굴이 살짝 질렸다. 농부가 기사를 무서워하고, 좀도둑이 시티 가드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직업 본능이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줄게.”

로벨은 마녀를 달래며 계획을 세웠다. 즉흥적이지만 모자람이 없는 계획이었다.

허풍쟁이가 신원을 보증할 로드릭 가문의 인장을 가지고 사트로 시티 교회로 떠났다. 귀리를 든든히 먹인 말을 타고 갔으니, 가는데 하루, 가서 고발하는데 하루, 다시 돌아오는데 하루 잡아 약 사흘이었다. 딴 건 몰라도 ‘이교’와 ‘이단’에 민감한 옛 신의 교회니 그 이상 걸리지 않을 것이다.

“저희는 뭘 합니까요?”

외팔이가 눈알을 굴리며 물었다. 로벨은 곤트 백작의 성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감시. 그리고 인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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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마녀’의 존재를 너무 가볍게 여긴 탓이다.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수많은 주민이 마녀로 지목되었다.

가만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십수 년 동안 이웃사촌으로 지내온 사람을 의심하고 모욕하고 고발했다. 평소에 쌓인 악감정도 조금 있지만, 그것보다 공포와 탐욕이 원인이었다.

내가 마녀로 지목되기 전에 먼저 마녀를 지목하는 경우도 많고,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서, 혹은 비옥한 이웃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모함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루가 지나자 살기 위해 상대방을 마녀로 지목했다. 지목되지 않아도 의심과 경계로 이웃을 대했다. 현세가 지옥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 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뎁쇼?”

외팔이가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밤이 깊어도 광기는 잠들지 않았다. 횃불을 밝힌 마을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면 ‘마녀’를 끄집어냈다. 주로 집안에 사내가 없는 과부와 지병이 있는 처녀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보복당할 가능성이 없으니까. 로벨이 입술을 깨물었다.

“악마추종자가 아니라 그냥 악마잖아.”

외지인도 표적이 되었는데, 로벨 일행은 예외였다. 제 가족이 소중해도 기사를 모함할 용기는 없었다. 영주님과 사제님이 기사님을 처벌할 것 같지도 않았다.

“꺄아아아아-!”

허나, 기사가 묵는 여관의 아이는 달랐다. 횃불을 든 사내들이 술 취한 늑대 여관에 몰려왔다. 오랫동안 왕래한 이웃이라 크게 헤매지 않았다. 여관방에 얹혀 지내는 급사 소녀를 끄집어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왜 이러는 것이야!”

“저리 비키소! 다치고 싶지 않으면!”

여관주인이 필사적으로 보호했지만, 눈이 뒤집힌 사내들은 듣지 않았다. 성에 가면 마녀인지 아닌지 판가름 될 테니 일단 가자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모닝스타가 맹수처럼 울부짖었다.

“더는 못 참겠다.”

로벨이 몸을 일으켰다. 어린 집사가 있었으면 이제 하루 남았으니 참으라고 말렸겠지만, 마녀와 외팔이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요! 참지 마세요!”

“역시 우리 폐하십니다요!”

로벨은 소드 벨트를 스커트 위에 대충 감고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 앞마당으로 내려갔다. 멈춰라, 비켜라, 꿇어라 따위를 말할 필요 없었다. 기사가 으리으리한 갑옷과 칼을 차고 나타나면 절로 멈추고 절로 비켜서기 마련이다. 그래서 로벨은 과정을 생략하고 명령했다.

“나가.”

“나, 나가라니요?”

“시끄러우니까 나가라고.”

마을 사내들은 서로를 힐끔힐끔 보았다. 숫자만 믿고 몰려온 탓에 가진 무기가 변변치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무기가 있어도 큰 칼에 큰 갑옷을 입은 기사, 덩치가 6피트쯤 되는 우락부락한 용병을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처세 좋은 사내가 냅다 굽신거렸다.

“어이구, 죄송합니다. 고귀한 나으리를 귀찮게 했구만요. 냉큼 사라지겠습니다요.”

“기사님! 살려주세요! 아악-! 기사님!”

“입 닥쳐라! 기사 나으리께서 시끄럽다지 않느냐!”

그리고 우악스럽게 소녀를 일으켰다. 사실 시끄러워서 내려온 게 아닌 로벨이 두고 볼 리 없었다.

“그 얘는 놓고 가.”

“예... 예?”

“두 번씩 말해야 알아듣는 거야?”

로벨이 칼자루의 손을 가드로 내렸다. 평소 맹한 구석이 있어도 기사는 기사였다. 두 자릿수 넘게 사람을 죽인 전쟁 전문가는 표정 하나 몸짓 하나가 범인과 달랐다. 심장이 약한 한 사내는 급기야 딸꾹질했다.

“저희는 영주님의 명령으로... 마, 마녀를 색출하려고...”

“세 번 말하지 않을 거야.”

흐룬팅이 두 마디쯤 뽑혔다. 마을 사내들도 감이 있고 눈치가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물러나다 후다닥 뛰쳐나갔다.

“새끼들, 겁은 많아가지고.”

외팔이가 껄껄 웃었다. 입장 바꿔 놓으면 자신도 도망갈 거란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로벨의 칼솜씨를 아니까 가장 먼저 도망갈 것이다.

“기사님, 감사합니다!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여관주인이 엉금엉금 기어와 머리를 조아렸다. 발등에 키스할 기세라 일단 말려야 했다. 그러나 진짜 심각한 것은 급사 소녀였다.

“기사님이... 저, 저를 구해...”

마법사가 아니어도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있는 표정이었다. 마녀가 여관주인의 말을 새겨듣다가 반문했다.

“그럼 딸아이가 아니에요?”

“조카입니다. 10년 전에 죽은 못난 동생의 딸년이죠.”

말이 조금 험한데, 얼굴은 푸근했다. 갓난아기 때부터 10년간 키웠으면 친딸 못지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고아지만 신원이 분명하고 보호자가 있었다.

“그런데도 잡아가려 했단 말이요? 이것들 봐라? 나만 아니면 된다 수준을 넘었는데?”

“곤트 백작이 시켰겠지. 아니면 악마추종자 짓이거나.”

키 큰 기사와 용병이 마녀를 보았다. 마녀가 심각하게 속삭였다.

“사악한 마법을 준비하는 거 같아요.”

외팔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사람을 제물로 바쳐서... 악마를 소환하고... 저주를 내리고...”

“그건 꼬맹이들이나 좋아할 동화잖아요.”

“마법 자체가 동화 같아.”

로벨이 외팔이를 옹호하자 마녀가 한숨 쉬었다.

“딴사람은 몰라도 기사님이 그러면 안 돼요. 악마를 실제로 봤잖아요? 걔네가 제물 같은 거 받나요? 까놓고 악마도 취향이 있는데 아무거나 받지 않죠.”

마법, 제물, 악마 이야기가 나오자 여관주인 표정이 백옥 같아졌다.

“그럼 왜 뜬금없이 마녀사냥이야?”

“‘마녀’가 아니라 ‘사냥’이에요. 공포, 불안, 초조, 의심이 만연해지면 사악한 마법을 쓰기 좋아요. 작은 일에도 크게 놀라고 금방 현혹되거든요.”

서당 개 3년 어쩌고 속담처럼 로벨도 어느 정도 마법을 이해하고 있었다. 마을 주민의 공포를 현실로 끄집어내려는 것이다.

“그냥 골탕 먹이려는 게 아니었구나.”

로벨의 작전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다. 악마추종자답게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러면 어쩝니까요?”

“이단심문관이 와서 마녀가 아니라 밝히고 축성 비슷한 걸로 불안을 잠재우면 해결될 텐데...”

“빨라도 내일 오후에나 올 겁니다요.”

“그럼 오늘 밤이겠군.”

일 처리가 멀미날 정도로 빨랐다. 그러나 속도감이 나쁘지 않았다.

“악마추종자 머리는 이단심문관 손에 들려 보내면 되겠다. 그럼 옛 신의 가장 깐깐한 지팡이도 기사단 파병을 막지 못할 테지. 볼탄 반도의 괴물을 쓸어내고, 바다 건너 악마추종자의 음모를 사전에 차단할 거야. 머리 없는 기사의 예언은 틀렸어.”

마녀, 외팔이,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여관주인과 소녀까지 그리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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