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화. 여관
돼지 농장의 오후는 정신없이 흘러갔다.
젊은 사내들은 깨지고, 터지고, 찔리고, 잘려서 죽은 오크 시체를 모아 불태우고, 젊은 아낙들은 귀한 식자재를 모아 귀한 손님을 대접하고, 허리 굽은 노인들은 망가진 집기와 울타리를 보수하고, 어린아이들은 도망간 돼지와 닭을 잡으러 농장 밖을 뛰어다녔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와 강보에 싸인 갓난쟁이가 아니면 전부 손을 보태야 했다. 해가 지고 밤이 오면 굶주린 늑대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늑대요? 회색 늑대요?”
마녀 키르케가 돼지 다리를 양손을 잡고 뜯으며 물었다. 아야와 이야카가 생각난 모양이다.
“늑대뿐만 아니라, 곰, 승냥이, 오소리까지 가축을 노립니다.”
“배고픈 계절이니까.”
로벨이 가슴살을 썰어내며 말했다. 짐승이 굶주리고 농장이 분주한 것은 매년 있는 일이니, 기사이자 외지인인 로벨이 신경 쓸 바 아니었다.
“게다가, 게다가 짐승이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보셨다시피 괴물까지 나타납니다요.”
이건 좀 신경 써야 했다.
로벨은 기껏 썰어낸 고기를 내려놓고 질문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야?”
“지, 직접 본 것은 처음입니다. 하지만 봄 수확 전부터 소문이 무성했지요. 저 아랫마을에서는 수시로 계집과 아이가 사라지고, 산 너머 마을은 스무날째 소식이 없고...”
“그런데도 아직 남아 돼지 치고 있수?”
외팔이가 돼지껍질을 퉤! 뱉고 물었다. 농장주인은 억울하다는 듯 두 팔을 휘저었다.
“그럼 어쩝니까요? 가진 재산이 이것뿐인데. 여길 떠나면 처자식과 손주들이 굶어죽습니다요.”
옳는 말이었다. 괴물보다 무서운 것이 굶주림이었다.
“영주한테, 곤트 백작한테 도움을 요청했어?”
“당연히 요청했습니다요! 제 둘째 놈이 아랫마을 청년들과 함께 영주님을 뵙고 왔지요.”
때마침 ‘둘째 놈’이 오크 시체를 태우고 들어왔다. 시선이 집중되자 머리를 퍽퍽 긁었다.
“영주님은 뵙지 못했지만, 아드님인 자작님을 뵈었습니다.”
“뭐래?”
“괴물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 중이니까 영주님을 믿고 조금만 기다리라 하더군요.”
“귀한 나으리가 맨날 하는 말이지. 참아라, 버텨라, 기다려라... 아, 우리 폐하만 빼고요. 아니, 아니, 우리 폐하가 귀한 나리가 아니란 것은 아니고...”
허풍쟁이가 횡설수설했다. 거기에 화난 것은 로벨이 아니라 ‘둘째 놈’이었다.
“우리 영주님은 다릅니다! 진짜로 노력 중이에요! 그 뭐더라, 진리... 진리 뭐라는 길드의 마법사를 모셔와 괴물을 쫓아내고 있습니다!”
“푸흡-!”
마녀 키르케가 입안에 든 것을 뿜었다. 보기 좋은 매너가 아닌데 타박하지 않았다. 맥주를 마시던 로벨이 비슷하게 사레들렸기 때문이다.
“지, 진리탐구회요?”
“고양이한테, 콜록, 생선을 맡겼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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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북이 쌓인 뼈와 텅 빈 맥주잔 사이로 복잡한 눈빛이 오갔다. 예정대로면 농장 주인이 말한 ‘아랫마을’로 출발해야 하지만, 몸과 정신이 피곤하여 잠시 휴식을 가졌다. 전투 직후 음주 때문은 아니었다.
“깊은 숲 속 오두막이나 산골짜기 동굴에 숨어있는 것보단 낫지만...”
“백작의 성도 만만치 않수다. 여기가 누구 땅인지 생각해보시오.”
걱정한 것과 달리 쉽게 표적을 찾았다. 펄프 대장이 들으면 거짓말이라 중얼거릴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고민은 망망대해의 파도처럼 끊이지 않는 법이다. 적대 가문의 성에서 적대적인 마법사를 납치해야 했다.
“지금 생각나는 것은 블랙잭(Black Jack)으로 뒤통수를 후려쳐서 잡아가는 건데...”
“후려칠 거리까지 다가갈 방법을 내놓으라고.”
외팔이와 허풍쟁이는 팔짱을 끼고 배변 활동할 때 내는 소리를 내었다. 로벨은 코로 한숨을 쉬었다. 머리 쓰는 쪽으로 도움이 안 되는 친구들이었다. 이럴 때는 창의력이 넘쳐서 엉뚱한 마녀가 유능했다.
“우리가 찾아갈 필요 있나요?”
“역시.”
“역시요?”
“아, 아니야. 계속해봐.”
마녀는 딴소리하는 로벨을 의뭉스럽게 흘겨보고 계속 말했다.
“악마추종자를 성 밖으로 불러내면 되잖아요.”
“어떻게?”
“미인계 어때요? 제가 유혹하면 헤벌레 해서...”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로벨과 용병들이 관심을 끊자 마녀가 욱! 해서 크게 말했다.
“농담이 아니에요! 마법사잖아요? 마법사를 유혹하는 것은 마법사라고요! 약간의 마법을 보여주고 ‘네 정체를 알고 있다!’ 뭐 이런 표시를 남기면...”
포비아 왕국은 본디 위대한 떡갈나무 신수(神樹) 파나케아를 섬기는 드루이드의 땅이다. 드루이드 이름으로 위협하면 음모를 꾸미는 외지의 마법사 입장에서 참기 힘들 것이다. 로벨은 그럴듯하다 생각하면서 의문을 표시했다.
“그게 왜 미인계야?”
“제가 미인이니까요!”
그 뻔뻔함이 매력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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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저녁거리까지 싸 들고 돼지농장을 떠났다. 어린 집사한테 받은 페닝을 넉넉히 주었으니 불만은 없을 것이다.
“해가 지는데... 하룻밤 머물지 않으시고요.”
농장 주인이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시절이 수상하고 밤바람이 흉흉할 때는 힘센 친구가 필요했다. 오크 스무 마리를 말 그대로 ‘식전 운동’ 삼아 때려잡는 기사가 있으면 소화가 잘 될 되고 잠자리도 편할 것이다.
“어허! 우리 폐하가 그리 한가한 줄 아느냐!”
허풍쟁이가 로벨을 대신해 호통쳤다. 폐하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도 되나 걱정했는데, 대충 보니까 그냥 해도 되었다. 옛 신과 영주님이 전부인 농장 사람은 폐하(Majesty)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주교님(Excellency)이나 백작님(Lord)하고 비슷한 호칭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일반적인 농민이었다.
“여자와 아이를 마을로 보내. 여기보단 안전하잖아.”
“그것이... 예예. 그리하겠습니다.”
로벨이 칼자루에 손을 얹자 농장주인은 구질구질한 변명을 삼켰다. 페닝을 넉넉하게 받았으니 여름까지는 마을에 신세를 져도 될 것이다.
“기사가 하는 말이 다 같다고 하지만, 그래도 조금만 참아.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허풍쟁이가 헛기침했다. 로벨은 모닝스타에 올라 고삐를 당겼다.
“백작의 성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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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일정을 서둘렀다. 초저녁과 새벽에 잠깐 눈을 붙이고, 달빛에 의지해 쉬지 않고 이동했다. 건강한 말과 튼튼한 수레가 있어 가능했다.
“곤트 백작 마을이에요!”
잉그비아 왕국의 공작이 나고 자란 땅이라 얼마나 대단할까 기대했는데, 보리 수확이 끝난 춘경지와 파란 밀알이 손짓하는 추경지 사이의 아기자기한 마을이었다. 허풍쟁이가 밤새 자란 수염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잘나가는 백작 나리 마을치고 소박한뎁쇼?”
“무슨 소리야? 저만하면 보통 이상이지.”
파도성과 강철성으로 눈이 높아진 탓이었다. 실제로 자세히 보면 농사 외에도 먹고 살 것이 있는지 몇몇 집이 큼직하고 동구 밖 도로가 잘 닦여져 있었다.
“전장에서 만난 기사나 병사가 있을지 몰라. 소란피우지 말고 조심해.”
외팔이가 채찍을 입에 물고 하나뿐인 손으로 도끼를 챙겼다. 그런 의미로 조심하란 게 아닌데,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여관이 있겠죠? 오줌 냄새 땀 냄새 나는 합숙소 말고 객실 있는 여관이요! 어여쁜 제가 지내기 좋은 곳이요!”
“저 마녀는 해가 갈수록 낯짝에 살이 찌네.”
“그 말은 몸매로 탓할 곳이 없다는 뜻? 허풍쟁이 아저씨, 이제 보니까 저를 좋아했...”
“무슨 개가 왈왈거리는 거야! 갑시다요! 갑시다!”
마녀의 바람대로 객실 있는 여관이 있었다. 그것도 꽤 많았다. 지나가는 농부를 붙잡고 물으니 제각각 다른 곳을 추천할 정도였다.
“음... 알 것 같아.”
농사 외에 먹고 살 일거리가 숙박업이었다.
볼탄 반도 북동쪽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는 사트로 시티였다. 이실직고 말하면 유일한 도시라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수많은 마을이 사트로 시티를 찾아가는데, 마차로 하루거리, 도보로 하루하고 한나절 거리가 바로 이곳 곤트 마을이었다. 2층 이상의 큰 건물은 전부 여관이라 해도 좋았다.
“기사님! 여기요! 여기가 좋겠어요!”
마녀가 열 개 가까운 여관 중 하나를 골랐다. 간판을 보는 순간 왜 이곳인지 알 수 있었다.
“술 취한 늑대의 여관이라...”
여관을 뜻하는 침대 그림 아래 강아지 두 마리가 옹기종지 모여 있었다. 글을 아는 희귀한 손님을 위해 이름도 적어놨는데, 목수가 까막눈인지 알파벳이 삐뚤삐뚤했다.
“우리를 위한 여관 같아요! 그렇죠?”
로벨은 마구간이 있는지, 새벽이슬을 피할 만큼 쾌적한지 살핀 후 긍정했다.
“응. 그래.”
선택 기준이 조금 다르지만, 이견 없이 숙소로 정했다. 커다란 대문을 지나자 여물통을 옮기던 열두어 살 소녀가 반겼다.
“어서 오세요! 술 취한 늑대들의... 여관...”
말끝이 조금 흐렸다. 시선이 로벨에게 고정되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키가 크고 피부가 하야며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기사였다. 문인방이 낮아 내리긴 했지만, 관용적으로 백마 탄 기사였다. 마녀가 깔깔 웃자 그제야 정신 차렸다.
“마, 말을 이리 주세요. 1층 홀로 가시면 되요.”
로벨은 모닝스타의 눈치를 보았다. 마음에 안 들면 다짜고짜 깨물어서 걱정되었다. 당연히 기우였다. 사람보다 사람을 밝히는 하프 유니콘 모닝스타는 순박한 시골 소녀를 좋아했다. 푸히힝- 푸힝- 웃으며 얌전히 따라갔다. 말구종 노릇을 하면서 여러 번 걷어차인 허풍쟁이가 진심으로 의심했다.
“저거 말 아니야. 분명해.”
여관은 제법 훌륭했다. 커다란 방 하나에 되는대로 손님을 밀어 넣는 여인숙과 달랐다. 일단 침대가 있었다.
“2인실 하나. 1인실 둘. 잔돈은 됐어.”
로벨은 10페닝 금화를 주었다. 여관주인은 잽싸게 열쇠를 꺼내주었다. 어디서 무슨 일로 왔는지, 얼마나 머물 건지, 저녁식사는 어찌할 건지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참았다. 기사를 상대하는 올바른 태도였다.
로벨 일행은 각자 방에 짐을 풀고 다시 모였다. 목적지에 왔으니 일을 할 때가 되었다.
“마법을 써서 악마추종자와 접촉할 거예요.”
“그런 마법이 있어?”
“어험! 사용하기 나름이죠.”
마녀는 몇 가지 도구를 준비했다. 소금 한 꼬집, 엉겅퀴 한 뿌리, 갓 잡은 닭 한 마리, 부뚜막 모래 한 줌, 잿가루 약간, 그리고 지하실에서 막 꺼내온 시원한 맥주. 마지막은 그냥 목이 말라 주문했다. 허풍쟁이가 헐레벌떡 맥주를 가져오자 바로 목구멍에 넣었다.
“이게 진짜...!”
그것 외에는 진짜 마법을 위한 도구였다. 소금을 얇게 뿌리고 잿가루를 찍어 사각형과 삼각형 도형을 그렸다. 마법을 볼 기회가 흔치 않은 일행은 옹기종기 모여 구경했다. 마녀는 기대에 보답했다.
“겁 많은 꼬마 친구들아. 이리오렴. 이리와.”
엉겅퀴 뿌리를 태우자 매캐한 냄새가 풍겼다. 외팔이가 무슨 짓이냐 따지려는 순간, 통통하게 부은 닭이 들썩였다. 외팔이가 상상력을 발휘했다.
“저게 살아서 백작성으로 날아가는...”
정말 끔찍한 상상력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는 법이다. 로벨의 귀가 앞뒤로 움직였다.
“이게 무슨 소리야?”
“소리요? 무슨 소리요?”
로벨 일행은 병장기를 슬그머니 끌어당기며 주위를 경계했다. 천장, 벽, 지하바닥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여관이 흔들렸다. 아니, 마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소리는...”
인간이 사는 곳에 항상 붙어있는 작은 짐승. 지저분한 곳을 좋아하는 습성 탓에 멸시받지만, 식탐과 번식력으로 쉬이 사라지지 않는 짐승.
“...쥐잖아?”
곤트 마을의 쥐가 일제히 활동을 시작했다. 그것은 생각보다 무시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