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7화. 억울
모닝스타는 신수(神獸)가 분명했다.
로벨이 옆구리를 한번 차자 기다렸다는 듯 날아올랐다. 약간의 과장은 있지만, 허리 높이의 나무 울타리를 제자리 뛰기로 넘고 착지와 동시에 최고 속도로 내달리니 체감상 비행에 가까웠다. 심지어 용수철 같은 탄력으로 충격조차 남기지 않았다.
로벨은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으로 라이트 랜스를 반 바퀴 돌려 겨드랑이에 끼웠다. 창끝이 햇살에 한 번 반짝이더니 꼿꼿하게 고정되었다.
“...괴물!”
돼지농장이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농장 밖에서 밀고 들어오는 황갈색 피부의 괴물 오크들이었다. 이어서 쇠스랑을 쥐고 맞서 싸우는 밀짚모자 사내들과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도망가는 앞치마 아낙들과 두발짐승들 횡포에 사방으로 흩어지는 핑크빛 돼지들이었다.
지나치게 빠른 탓에 장면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림처럼 고정되었다. 직관적이고 단편적이지만 상황을 파악하기 충분했다. 로벨은 가장 그럴듯한 표적을 골랐다.
기마돌격의 무서움은 역시 속도였다. 시속 38마일로 창을 찌르면 타격이 아니라 충돌이었다. 피륙으로 된 몸이 앞뒤로 뚫려서 붕 떠올랐다. 창의 방향이 말의 질주방향과 일치하여 쉬이 부러지지 않았다. 쇼크로 절명한 시체를 달고 기어이 두 번째 희생자를 만들었다.
“와우...”
오크 두 마리를 꿰뚫으며 전장을 관통했다. 멀리서 지켜보는 외팔이와 허풍쟁이가 감탄할 정도니 가까이서 본 농부와 피해를 입은 오크 무리의 충격은 말할 것도 없었다.
“뀌이익-?”
“뀌잇-!”
로벨이 창을 버리고 모닝스타가 투레질하며 비웃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열아홉 마리. 몬스터치고 중무장이야.’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리며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키가 작고 단병기를 많이 가진 오크는 말 위에서 상대하기 힘들었다. 포차드나 글레이브가 있으면 모르지만, 가진 것이 롱소드 뿐이었다.
그런 계산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크들은 기사가 커다란 말에서 내리자 기뻐하며 몰려왔다. 푸주칼에 몽둥이를 단 놈도 있고, 짐승 가죽을 겹겹이 두른 놈도 있고, 부러진 낫과 장도리를 가진 놈도 있었다. 이번이 첫 습격이 아니란 뜻이다.
“인간을 얼마나 많이 죽인 거야.”
“뀌에에엑-!”
오크가 부러진 낫을 휘둘렀다. 자루에 수직 손잡이가 달린 대형낫(Scythe)이었다.
대형낫은 찌르는 성능이 없고, 공격범위가 지나치게 넓어 대규모 전투에서는 쓰이지 않지만, 일대일에서는 은근히 까다로운 무기였다. 기억(ㄱ) 자로 휘어진 날붙이는 쳐내기가 몹시 까다롭고, 구조역학상 위력이 대단하여 팔이든 다리든 맞으면 치명적이었다.
‘꼭 막을 필요가 없잖아?’
어디까지 문외한에게 그렇다는 것이다. 검술학파의 달인쯤 되면 사이드는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무기였다. 공격방법이 찍거나 당겨서 베는 것뿐이라 막기는 어려워도 피하기는 쉬웠다. 한 걸음 물러나거나 한 걸음 다가가면 쉽게 파해되었다. 지금의 로벨처럼 말이다.
“뀌이익?!”
로벨은 사이드 간격에 파고들어 자루를 팔꿈치로 막았다. 오크의 좁쌀만한 눈이 최대치로 커졌다. 로벨은 상하좌우가 불규칙한 오크 면상을 폼멜로 찍었다. 폼멜의 본래 용도는 무게추지만, 작정하고 휘두르면 철퇴나 다름없었다. 삐뚤어진 코가 사라지고 눈알이 반쯤 튀어나왔다. 그래서 여전히 불규칙했다.
“전부 덤벼!”
로벨은 실신한 오크를 발로 차고 아론다이트를 좌우로 휘저었다. 식인을 하는 괴물의 흉포성을 자극했다. 푸주칼을 가진 놈과 장도리를 가진 놈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로벨은 바이저 안을 웃음으로 채우고 아론다이트를 길게 뻗었다.
리치가 짧은 장도리 오크는 두 걸음 밖에서 가슴이 갈라졌다. 그 사이 거리를 좁힌 푸주칼 오크가 기합인지 괴성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몸을 던졌지만, 인간의 갑옷을 우습게보았다. 깡-!
로벨은 이 빠진 푸주칼을 뱀브레이스로 쳐내고 아론다이트를 회수해 목을 베었다. 동작 하나하나가 크고 분명해서 느리게 보이는데, 오크 입장에서는 막지도 피하지도 못할 빠른 공격이었다.
무기가 좋은 오크 셋이 차례로 죽자 남은 열여섯 마리가 당황했다.
“쇠덩이가! 뀌이이잇-! 안 통한다!”
“강철 인간! 강철 인간!”
“아... 그쪽이야?”
친구의 죽음보다 푸주칼을 튕겨낸 게 충격인 모양이다.
로벨의 필드 아머는 인류가 천 년 동안 발전의 발전을 거듭해 완성한 최첨단 갑옷이었다. 기존의 냉병기는 물론이고, 핸드 캐논의 포탄도 막아낼 수 있었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새내기 오크가 겁먹기 충분했다.
“기사님! 기사님 앞에서 비켜!”
타아앙-!
역사는 짧지만, ‘최첨단’이란 점에서 유사한 병기가 불꽃을 토했다. 마녀 키르케의 아쿼버스였다. 그러나 미숙함인지 조급함인지 총탄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외팔이가 채찍을 휘두르며 타박했다.
“그것 하나 못 맞추쇼?!”
“그쪽이 수레를 똑바로 못 몰아서 그래요!”
그때, 허풍쟁이가 아바레스트를 견착하고 쏘았다. 시위가 풀리고 활대가 요동치는 소음이 작지 않은데, 앞서 총성 탓에 고요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쇠못이 달린 쿼럴이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뒷걸음치는 오크 가슴에 박혔다. 사격솜씨로 비웃음 당하던 옛날의 허풍쟁이가 아니었다. 외팔이가 배부른 모닝스타처럼 웃었다.
“수레가 뭐 어쨌다고?”
“...칫!”
오크들은 계속해서 나타나는 인간들에게 위기감을 느꼈다. 삐쩍 마른 농장 주민과 달랐다. 강하고, 무섭고, 사납고, 단단했다. 판단력 좋은 오크가 소리쳤다.
“도, 도망치자! 뀌익-! 도망치자!”
“안 돼.”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 해도 기세다. 비슷한 말로 용기, 의지, 각오, 흥분 등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이 꺾이면 숫자가 몇이든 이미 진 것이다.
로벨은 타고난 싸움꾼이라 기세를 놓치지 않았다. 오크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마녀 키르케가 조그맣게 비명을 질렀다. 창칼을 막아내는 갑옷이라도 하프 아머 차림이었다. 왼쪽 어깨와 두 다리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아니, 풀 플레이트 차림이라 해도 포위당하면 위험했다. 갑옷은 강철이지만, 갑옷 안의 사람은 아니니까.
그러나 로벨을 과소평가한 걱정이었다. 로벨이 ‘무적무패’라 불리는 것은 단순히 장비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전장에서 쌓은 경험과 달인의 경지에 이른 칼솜씨와 신비 영역에 도달한 영성(靈性) 때문이다.
한 발로 멀리 뛰며 오크 목을 찔렀다. 아니, ‘쏘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7, 8피트 거리를 뛰어 아론다이트 쭉 뻗자 활로 공격할 거리가 나왔다.
“꾸르르륵...”
기도가 뚫린 오크는 비명조차 못 질렀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로벨은 뒷발이 땅에 닿자마자 몸을 비틀었다. 목을 꿰뚫은 칼이 옆으로 빠져나왔다. 기도에 이어 경동맥이 잘렸다. 핏물이 비스듬히 치솟았다.
“너희들은 전부 죽을 거야.”
위협도 아니고, 경고도 아니었다. 예언이자 선언이었다. 로벨은 회전력을 실어 옆자리 오크의 목을 베었다. 근육질의 두꺼운 목이 밀랍으로 된 양초처럼 잘렸다.
오크 한 마리가 클럽(Club)을 치켜들고 덤볐다. 용기가 아니라 발악이었다. 생존본능이었다. 어쩌면 공포에 의한 패닉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로벨은 피 묻은 아론다이트를 빙그르 돌려 겨드랑이 아래로 찔렀다. 클럽이 떨어지기 전에 오크 가슴이 구멍 났다. 심장이 출혈을 막기 위해 수축했다. 전신의 근육이 덩달아 딱딱하게 굳었다. 한껏 올라간 나무 몽둥이가 떨어지지 않았다.
로벨은 몸을 뒤로 기울여 오크를 밀어내고 아론다이트를 회수했다. 심장에 꽂힌 마개가 빠지자 그제야 응축된 핏물이 솟구쳤다. 로벨은 쏟아지는 피를 비해 다시 움직였다. 이제 싸움이 아니었다. 학살, 도살, 살육, 도축이었다.
오크에게 이성이 남아 있어 전술적으로 대응했으면 이처럼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세에 불을 지핀 로벨은 피와 비명으로 부채질했다. 오크들은 점점 커져가는 불길에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앞서 선언했듯 살려 보내지 않았다. 이후로도 인간을 죽이고, 빼앗고, 먹어치울 것이 분명하니 곱게 보낼 수 없었다.
“전부 죽여!”
외팔이와 허풍쟁이가 가세하자 시체가 세 걸음에 하나씩 놓였다. 핏물이 시냇물이 되어 흘렀다. 농장 사람들은 괴물을 잡는 괴물 같은 일행에 얼이 빠졌다. 처자식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한 농장 주인조차 도망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사람... 맞지?”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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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200야드 가까이 추격해 마지막 오크를 사살한 후 돼지농장으로 돌아왔다.
헝겊을 꺼내 칼날과 갑옷을 닦고 모닝스타와 마녀 키르케의 칭얼거림을 들어주며 일행을 기다렸다.
“에구구... 나 죽겠다.”
반대방향의 오크를 추격한 허풍쟁이가 숨을 헐떡이며 돌아왔다. 쇠뇌가 있어 오래 뛰지 않았는데도 거의 탈진했다. 로벨이 젖은 헝겊을 버리며 핀잔주었다.
“운동부족이야.”
펄프 대장의 지옥 같은 훈련을 이수한 허풍쟁이는 억울했다.
“아니, 폐하, 제 나이가 되어보시라구요. 완전무장하고 100야드를 뛰는 것이...”
로벨의 피 묻은 무장을 보고 뒷말을 삼켰다. 허풍쟁이의 가죽갑옷도 가볍지 않지만, 롱소드 두 자루에 판금갑옷을 입은 로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오크 21마리 중 절반을 혼자 해치웠다. 나이 탓, 장비 탓하기 좀 부끄러웠다.
“저, 기사 나으리? 나으리?”
전투로 뒷전이 된 농장 주인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로벨은 깨끗해진 아론다이트를 칼집에 넣고 파나케아 투구를 벗었다. 밤하늘처럼 까만 머리카락이 사르륵- 흐르고, 보름달처럼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다듬지 않은 눈썹과 잦은 전투로 굽은 귓바퀴가 아니면 레이디라 해도 믿었을 것이다.
“여기 주인이야?”
목소리까지 청아하니 아름다웠다. 농장 주인은 2초 정도 넋을 잃었다가 불쾌한 표정에 화급히 대답했다.
“저희 가족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예, 제가 이곳 돼지농장의 주인입니다요!”
돼지치는 농장이라 돼지 농장이라 불렀는데, 진짜 이름도 돼지 농장이었다. 로벨은 헝크러진 머리카락을 모아 모닝스타 꼬리처럼 묶고 말했다.
“내가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 점심 식사도 많이 늦었고. 괜찮지?”
농장 주인은 무엇이 괜찮은지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요! 그럼요! 괜찮습니다! 당연히 괜찮습니다요!”
로벨은 보기보다 통이 큰 농장 주인에 미소 지었다.
“그래? 그럼 돼지고기와 맥주 부탁해. 가능하면 올해 태어난 새끼돼지로. 아, 리암 수사표 맥주 있어?”
농장 주인은 오크를 떼로 죽이고 입맛이 도는지 궁금했지만, 오크의 다음 차례가 될까봐 차마 묻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