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76화 (476/605)

476화. 시간

로벨 일행은 서둘러 순시를 마치고 늑대성으로 돌아갔다. 강철성에서 보냈으면 필시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아니, 그냥 사람이 아니었다.

봄이 지나 여름이 성큼 가까워진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시커먼 후드와 가죽 맨틀(Mantle)을 두르고 있었다. 코와 입을 제외하면 밖으로 드러난 신체 부위가 없는데, 왜 그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밤의 종복이 위대한 왕을 뵙나이다.”

입을 열자 새끼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송곳니가 보였다. 뱀파이어였다. 로벨은 서쪽 하늘에 버젓이 걸려있는 태양을 보고 다시 뱀파이어 전령을 보았다.

“...괜찮아?”

무슨 의미인지 명확했다. 뱀파이어 전령이 머리를 깊이 숙였다.

“제 주인에 비할 바는 아니나 가진 영성이 있어 극복할 수 있나이다.”

악명 좀 떨쳐 본 괴물이란 뜻이다. 로벨은 무의식적으로 폼멜을 쓸어 만졌다. 로벨의 버릇을 아는 어린 집사와 늑대성 식구들은 불안한 눈빛을 교환했다. ‘말릴까?’, ‘누가? 니가?’ 그러나 버릇은 버릇일 뿐, 이성은 멀쩡히 작동했다.

“백작의 전언은 뭐야?”

뱀파이어 전령은 소매에서 둘둘 말린 인장편지를 꺼냈다. 로벨 일당은 소매 안에 주머니가 있나 신기해서 쳐다보았다. 그 때문에 조금 늦게 편지를 받았다.

로벨은 강철성 인장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괴물에게 신분이 드러난 편지를 배달시키다니, 그자답지 않게 조심성이 부족했다.

손톱으로 붉은 인주를 떼어내고 주루륵- 펼쳤다. 그리고 조심성 어쩌고 생각한 것을 철회했다. 편지 내용은 이웃 영주에게 보내듯 지극히 평범했다.

‘지난 만남 이후 오랫동안 격조했습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찾아와 일손이 부족하니 주야로 분망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부디 몸과 마음을 보살피기 바랍니다. 일전에 부탁하신 일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곤트 영지의 영주가 해당 사업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로벨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곤트 영지?”

호른 경의 편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잉그비아 왕국의 섭정이 된 존 오브 곤트 공작의 근거지였다.

“이게 이렇게 연결되네.”

로벨은 나머지 내용을 빠르게 읽었다. 악마추종자, 몬스터, 마도의 수호자 등의 직접적인 단어는 하나도 없지만, 전후사정을 아는 로벨 일당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편지였다. 음험하고 음흉한 뱀파이어 군주다웠다.

‘제 주군이신 볼프 사트로 후작님께서도 공왕 폐하의 안부를 걱정하십니다.’

로벨이 눈치코치 없어도 걱정이 아니란 것은 알았다. 곤트 령은 사트로 가문의 땅이었다. 악마추종자 잡겠다고 신이 나서 쳐들어가지 말라는 충고였다.

“나를 뭐로 보고...”

제대로 본 게 아닐까 싶지만, 입 밖으로 꺼내는 늑대성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로벨은 찢거나 태울 필요가 없는 ‘안부 편지’를 어린 집사에게 주고 물었다.

“이거 외에 다른 말은?”

뱀파이어가 다시 머리를 숙였다.

“옛 신의 축복을 빈다고 하셨습니다.”

“기사단을 움직이란 말이지? 좋아. 이해했어.”

흡혈귀가 아무렇지 않게 옛 신을 거론하는 것은 이해 못 하지만 말이다.

@

로벨이 울프 용병단을 이끌고 가면 신속하게 악마추종자와 몬스터를 소탕하겠지만, 사트로 가문 일파의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 ‘비난’은 기분 좀 상하고 분위기 좀 망가지는 것을 뜻하지 않았다. 볼프 사트로 후작이 이해하고 용서해도, 그 아래의 봉신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늑대성이 아무 때나 자신을 공격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교회에 고발하란 것이 그 때문이구나.”

뱀파이어 군주의 선견지명이 놀라왔다. 칼밥 먹은 기사보다 정치수완이 좋았다.

“교회는 국적에 얽매이지 않으니까요. 으으음... 역시 무섭네요.”

대강의 방향은 잡혔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곤트 백작령에 기사단을 보낼 명분이 없었다.

“의혹을 제기하면요? 몬스터가 그쪽에서 많이 출몰한다면서요? 이단심문관을 보내 알아보지 않을까요?”

“그러다 악마추종자가 도망가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잖아.”

교황과 기사단장이 보낸 답신을 살피면 언제든지 출병할 수 있는 듯했다. 명분, 그러니까 ‘증거’ 하나만 보여주면 말이다.

“우리가 찾아서 보내줘야지.”

“구체적으로 어떻게요?”

로벨은 활짝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미소였다. 특히 이빨에 잇몸까지 보인 미소는 20년 전 피크닉 갈 때가 처음이었다.

“군대만 아니면 되잖아?”

“어어? 어? 안 돼요!”

“뭐가 안 돼?”

“뭔지 몰라도 안 된다는 느낌이 팍! 왔어요! 안 돼요!”

로벨은 왕이었다. 필요할 때만 왕이 되는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왕이었다. 그 누구도 왕을 막을 수 없다.

“싫어. 갈 거야.”

“으아앙! 안된다구요!”

@

어린 집사 외에도 펄프 대장, 페리 행정관, 리암 수사 등 많은 가신(家臣)이 반대했다.

“공왕 폐하를 씹어 먹고 싶어 하는 북쪽 영주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요.”

“잉그비아 왕국의 존 공작은 반(反)볼탄 반도 세력의 수장입니다.

“인간들은 그렇다 쳐도, 악마추종자와 괴물들은 어찌해요?”

그러나 어떤 이유도 로벨의 결정을 막지 못했다. 무기를 챙기고, 짐을 꾸리고, 모닝스타를 배불리 먹였다.

“이럴 때 호른 경이 있어야 하는데...”

누이한테 찝쩍거리는 게 꼴 보기 싫어 멀찍이 쫓아낸 것이 후회되었다. 마녀 키르케가 떡갈나무 지팡이와 아쿼버스를 양손에 들고 ‘히히힛!’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같이 가잖아요!”

어린 집사는 총구 방향에서 몸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제가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쪽이에요.”

“뭐라고요? 뭐라고 했어요?”

“모, 못 들었으면 됐어요. 그보다 그 끔찍한 무기 좀 치워요! 사람 잡으려고 작정했나!”

“에이, 불 안 붙였어요. 겁이 왜 그리 많아요?”

“그야 당신이 마녀니까!”

주문 한 방이면 불을 피워내는 마녀가 불만 붙이면 사람 잡는 무기를 쥐고 흔드니 무서울 만했다. 더욱이 저 총은 류트 프란시스가 로벨을 향해 쏜 총이었다.

“제길... 나도 모르겠다.”

로벨은 갑옷을 차례로 두드려 점검했다.

“음지에서 음모를 꾸미는 사악한 마법사를 잡는 거야. 멋지지 않아?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거 같아.”

“허무맹랑한 기사 소설 좀 그만 보라구요.”

그래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파츠를 최대한 줄인 하프 아머 차림이지만, 덕지덕지 바른 페닝이 어디 가지 않아 충분히 화려했다. 무엇보다 로벨의 외모와 모닝스타의 자태가 남달랐다. 30대 후반으로 보이지 않는 화사한 얼굴과 10대 후반으로 보이지 않는 늠름한 백마가 절로 눈길을 끌었다.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주인공이라 말하면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법했다.

“왕처럼 보이지 않아 그나마 다행인가...?”

이름만큼이나 적도 많은 ‘무적무패 왕’이 수행원 셋만 데리고 볼탄 반도를 횡단하리라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수행원 셋이 철부지 마녀와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이었다. 차라리 유랑극단이라 하면 믿을 것이다.

“짐 다 챙겼습니다요.”

수행원으로 해탈의 경지에 이른 허풍쟁이가 짐수레를 끌며 말했다. 로벨은 아직도 못마땅한 최측근을 위로했다.

“조용히 가서 조용히 악마추종자를 잡을 거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하나만 잡아서 교회에 보낼게. 그럼 델 포니 수도원의 저스티스 기사단이 올 거야. 정말 완벽하잖아.”

펄프 대장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악마추종자를 잡을 건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보다 똑똑한 어린 집사와 리암 수사가 가만있는 것을 보고 포기했다. 왕의 실룩이는 입술이 이미 대답하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봉토가 바위성이에요. 그쪽에 싸움개 소대를 보내놓을 테니까 여차하면 피신하세요.”

“그럴 일 없다니까. 저쪽에서 눈치 채면 어쩌려고.”

“보리 수송을 위해 보내는 거예요. 몬스터 피해가 커서 소대 하나, 아니, 두 개 정도 동원해도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어린 집사는 역시 철두철미했다. 로벨은 건성으로 대꾸하고 모닝스타에 올랐다. 주인만큼 신이 난 말은 발을 굴리며 콧소리 냈다. 역시 마구간보다 여행이 좋은 모양이다.

“그럼 출발!”

마녀 키르케가 호탕하게 소리쳤다. 외팔이 맥 빠지게 복창한 후 채찍을 휘둘렀다. 비밀여행이라 왕의 깃발도, 문장도 없었다. 무거운 임무에 비해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

다른 것은 몰라도 계절은 좋았다.

봄에서 여름으로 막 넘어가는 계절. 춥지도 덥지도 않고 소나기와 폭풍우를 걱정할 필요 없는 계절. 일 년 중 여행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었다.

게다가 볼탄 반도 한정으로 봄 농사가 끝나는 시기였다. 좋은 날씨에 풍부한 먹거리가 있으니 지나는 마을마다 흥겨운 노래가 흘러나왔다. 외지인에게 모질기로 유명한 시골 마을조차 웃음으로 로벨 일행을 맞이했다.

“그게 아니어도 기사 나리 앞에서 인상 쓸 미친놈은 없습니다요.”

“뭐, 있을 수야 있지. 이미 죽어서 안 보이겠지만.”

외팔이와 허풍쟁이가 한 마디씩 주고받고 껄껄 웃었다. 로벨은 뭐가 재미있는지 이해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웃는 거야? 무례하게 굴면 당연히 죽여야 하는데, 우스운 이유가 뭐야?”

이제 웃음이 사라졌다. 진짜배기 기사 앞에서 농담은 농담이 아니었다.

“커흠! 이 다음 마을이 곤트 백작의 마을이라 합니다. 돼지 치는 농가가 보이면 반나절 안에 도착한다고 하니까, 간단히 요기만 하고 마을에서 저녁을 먹는 게 어떻습니까?”

허풍쟁이가 평소보다 정중하게 제안했다. 로벨은 평소처럼 전반적인 일정을 맡겼다.

볼탄 반도 토박이로 안 가본 곳이 없고, 타고난 친화력으로 상인, 용병, 농민, 순례자 가리지 않고 사귀어 주변 정보를 얻어내는 허풍쟁이는 훌륭한 길잡이였다. 입심 좋고 길눈 밝으니 도저히 안 데려갈 수 없었다.

“오늘 점심은 돼지고기인가요?”

마녀가 침을 주르륵- 흘렸다. 소와 양은 종종 먹지만, 돼지는 쉬이 먹지 못했다. 고기와 가죽 외에 생산성이 없는 가축이라 도토리가 많이 나는 일부 지역이 아니면 키우지 않았다.

“고기보다 술이 땡기는데... 목이 칼칼하니 시원한 맥주로 씻으면... 크윽-!”

“난 생명의 물! 그게 좋더라!”

로벨 일행은 곧 있을 휴식을 기대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요 며칠 평화로워 잊고 있었다. 지금 볼탄 반도는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더욱이 이곳은 혼란의 심장부였다. 따뜻한 햇살과 포근한 바람에 어울리지 않는, 피와 폭력이 기다리고 있었다.

“끼에에에엑-!”

농가의 울타리가 띄엄띄엄 보일 무렵 우렁찬 비명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허풍쟁이가 얼이 빠져 중얼거렸다.

“돼지 잡는 것은... 아니겠죠?”

만약 그렇다면 덩치가 외팔이만한 돼지일 것이다. 늑대성 식구의 걱정이 바로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로벨은 피하지 않았다.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머리에 쓰고 마녀에게 손을 뻗었다.

“랜스!”

싸움의 시간이었다.

고로 기사의 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