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75화 (475/605)

475화. 춘궁기

강철성에 온 것이 헛수고는 아니었다.

흡혈귀 왕은 이름 그대로 왕이었고, 종교모임이나 신앙고백 자리에서 자랑할 수 없는 종류의 수족을 거느리고 있었다.

“케이시, 최근에 출몰한 몬스터 흔적을 쫓아라. 앙드레, 산드라, 볼탄 반도 출신이 아닌 마녀와 소속이 없는 마법사를 찾아라.”

강철성 북쪽 첨탑에 크고 작은 흡혈괴물이 모여들었다. 여든 살쯤 되어 보이는 노파도 있고, 열두어 살 된 소년도 있었다. 햇볕을 쬔 적 없는 창백한 얼굴과 영양이 부족해 움푹 파인 볼살을 했으며, 시체 냄새가 나기도 하고 곰팡이 핀 장작 냄새가 나기도 했다. 뱀파이어가 미인이란 소문은 ‘창백한 피부’와 ‘마른 몸’이 와전된 탓 아닐까.

강철성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광경이지만, 이미 정체를 아는 로벨 일행은 상관없었다. 첨탑 위에 괴물들은 왕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문득 저들에게 쫓기는 동방의 기사 더스틴 폴라 경이 생각났다. 저런 것들을 상대로 용케 살아남았다.

“진짜 왕 노릇 하는 수호자는 처음 봐요.”

“응?”

어린 집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잖아요? 늑대의 왕은 떠돌이 용병이고, 드루이드 왕은 드루이드랑 상관없는 하얀 숲의 시골 영주잖아요.”

로벨은 자칭 왕들을 떠올려보았다. 늑대왕, 요정왕, 죽은 자의 왕 모두 비슷했다.

“그래도 마법을 쓰는데...”

“왕이 아니어도 마법은 쓰는데요?”

다시 생각하니 그러했다. 사신(死神) 그림 리퍼는 사람을 조종하는 마법을 쓰고, 흡혈귀 왕 드라카는 잽싸게 도망가는 마법을 쓰고, 머리 없는 듀라한은 치사하게 겁을 주는 마법을 사용했다.

“마도의 수호자는 한 가지씩 재주가 있는 거야?”

“꼭 그렇지 않아요. 영성이 높은 수호자는 여러 가지 마법을 쓰고, 보잘것없는 수호자는 하나도 못 써요. 기사님이 만난 수호자들은 아주 오래된 수호자들이에요.”

마녀 키르케가 이상한 자부심으로 설명했다. 하긴, 천 년 가까이 살아온 마도의 수호자들이다. 그렇게 오래 살면 미련한 곰도 재주 하나쯤은 익힐 것이다.

“오래 기다리셨소.”

백작이 웃으며 다가왔다. 어쩐지 의기양양해 보였다.

“내 종속들이 정보를 가져오면 공왕이 옛 신의 사제에게 전해주시오.”

어린 집사는 잘난척하는 괴물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봐야 흡혈귀인데, 믿을 수 있어요?”

“흔히 ‘낮에는 새가 듣고 밤에는 쥐가 듣는다’ 말하지. 저들은 새이자 쥐인 박쥐가 아닌가. 낮밤을 가리지 않고 정보를 모아올 것이다.”

뱀파이어만 할 수 있는 고오급 농담이었다. 어린 집사가 입을 벌리고 중얼거렸다.

“그거 유해조수 퇴치하라는 속담 아니었어요?”

동방의 속담은 역시 신비롭다. 해석하기 나름인 모양이다. 견문이 짧은 로벨은 이국의 속담에 관심 두지 않았다.

“얼마나 걸려?”

“그것은 장담 못하오. 악마추종자란 것들이 워낙 은밀해서 말이오.”

“그럼 기사단이 와도 못 잡을 수 있겠네?”

어린 집사와 백작은 로벨의 걱정을 이해했다. 어느 지역 어느 영주나 기사단이 자기 땅에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옛 신의 이름으로 다방면에 민폐를 끼치는 이유도 있지만, 그것보다 일단 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제후들이 싫어할 거야.”

“몬스터를 잡아주는데요?”

“그래서 더 싫어하는 영주도 있을 걸?”

옛 신의 권위가 높아지면 여러모로 불편하다. 차라리 이웃 나라 왕이 와서 잡아주는 편이 좋았다.

“상대는 사악한 마법사와 어둠의 괴물이오. 왕의 군대가 아무리 강해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오.”

“나도 알아...”

“신속히 소탕하고 재빨리 쫓아내면 되지 않겠소?”

옛 신의 교단을 가장 싫어해야 할 백작이 저러니 로벨도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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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과거 인연이 있는 포클랜드 시티 주교와 저스티스 기사단의 자크 니폴론 경과 더글라스 무리엘 경에게 편지를 썼다. 꽤 복잡한 일이었다.

기사단(Order)은 이름처럼 수도회(Religious Order) 소속이지만, 수도원을 떠나려면 수도원장이 아니라 교단 본청(Old God's Curia)의 직접적인 허락이 필요했다. ‘옛 신의 대리인이 친히 보살피는 신실한 수사들...’ 어쩌고 포장하나, 사실은 그냥 목줄이었다. 옛 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창칼을 휘두르는 중무장 기사들을 자유로이 풀어놓으면 어떤 참사가 일어날지 본인들 빼고 잘 알았다. 그런 이유로 기사단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했다.

“이단의 증거가 필요해요. 마녀나 마법사요,”

열 명, 스무 명 불러오는 것은 왕의 이름으로 청탁해 어찌어찌 되지만, 세 자릿수 이상 동원하려면 뚜렷한 명분과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과거 붉은 산에서 그랬듯 말이다.

“몬스터가 출몰한 걸로 안 돼?”

“몬스터가 이단의 증거는 아니잖아요. 최소한 악마추종자와 관련 있음을 입증해야죠.”

“뱀파이어 군주가 꼬리를 잡을 때까지 할 게 없네...?”

“그래도 운은 띄워놔야죠. 그래야 저쪽도 준비할 테니까요. 자크 경이랑 더글라스 경한테 편지 썼죠?”

“응.”

어린 집사는 편지의 오탈자를 확인하다가 피식- 웃었다. 악마와 교회의 합동 작전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왜? 잘못됐어? 세 번이나 확인했는데?”

로벨이 우물쭈물 물었다. 가정교사한테 검사받는 7살 소년 같았다. 어린 집사는 잘 썼다고 칭찬하려다가 귀여워서 그만뒀다.

“교회가 나설 때까지 마냥 기다릴 필요 없잖아요?”

로벨은 편지 내용으로 아무 말 없자 안도했다.

“안 그래도 소탕 작전을 시작할 거야.”

로벨의 소환에 응한 기사가 40여 명이었다. 기사 가문의 차남 이하 출신으로 무적무패 왕 눈에 띄어 봉신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이었다.

“솔직히 미덥지 않은데요? 무장도 변변치 않잖아요.”

기사의 무구는 가문의 보물이다. 당연히 가문을 계승하는 장남에게 주어졌다. 고로 차남 이하 아들들은 제대로 된 갑옷을 갖추기가 어려웠다.

증조할아버지가 사용했을 원통 헬름과 사슬 갑옷을 입으면 그나마 봐줄 만하고, 공방의 도제나 종군 상인이 몰래 가져온 갑옷 파츠를 되는 대로 끼운 것이 평균이었다. 심지어 누비 갑옷에 찢어진 가죽 신발을 신은 자칭 기사도 있었다.

“장인은 연장을 탓하지 않고! 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소! 이걸로도 충분히 싸울 수 있소!”

그것은 잘못된 말이었다. 연장을 잘 관리하는 것도 장인의 덕목이니, 연장이 부실하면 애초에 장인 자격이 없었다. 기사로 대입하면 좋은 갑옷을 갖추는 것도 기사의 실력이었다.

“자격이 없는 기사는 돌려보낼 거야.”

그렇게 숫자를 줄이면 30명 남짓 되었다. 전쟁을 치르기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각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출몰하는 몬스터를 잡기는 충분했다.

“차라리 봉신들을 소집하는 게 어때요?”

“안 돼. 춘궁기잖아. 그리고 진짜 싸움이 시작됐을 때 의무종군일을 핑계로 등 돌리 게 할 수 없어.”

어린 집사는 ‘진짜 싸움’이란 말에 오싹함을 느꼈다. 사실 집사도 직감은 하고 있었다. 이번 일은 몬스터 소동이 끝이 아닐 것이다.

“불길한 소리 하기 싫은데... 많이 죽겠죠?”

로벨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렇지 않게 우리가 힘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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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어린 집사는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군사적으로 가진 힘을 끌어 모았다. 그렇다고 악마추종자 잡는 일만 한 것은 아니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가파른 계절. 춘경지와 추경지에 작물이 가득한 계절. 그렇기에 헛간에는 먹을 것이 없는 계절. 로벨의 말대로 춘궁기였다.

“우리 마을은 그래도 살만해요. 가시성이랑 바위성 영지민은 먹을 게 없어서 순무를 삶아 먹는다고 해요.”

“우웩- 그거 맛없는데.”

마녀 키르케가 혀를 내밀고 토하는 시늉했다.

“그걸 맛으로 먹나요? 죽기 싫어서 먹지. 가난한 사람을 비웃으면 나중에 벌 받아요.”

어린 집사가 기적적인 소리를 했다. 악덕 부르주아의 표본 생물이 할 말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럼요. 굶주림은 민란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요. 제깟 것들이 덤벼봐야 기사의 상대가 될 리 없지만, 다음해 세금이 줄어들잖아요?”

“...역시 집사야.”

로벨은 변함없는 어린 집사에 안도했다. 지구의 종말은 근시일에 오지 않을 것이다.

“보리가 잘 익었네.”

“보름 후에 수확할 거예요. 켈트 남작이 통 사정하니 일부는 그쪽으로 보내고요.”

“공짜로?”

“그럴 리가 있나요. 겨울에 고기와 모피로 받아낼 거예요. 그 동네 사냥꾼이 실력은 좋잖아요.”

로벨은 물결치는 보리밭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곳이 늑대성이라 하는 말은 아니지만, 보리줄기가 한데 뭉쳐서 흔들리는 것이 흡사 늑대 무리가 달리는 것 같았다. 아야와 이야카도 그리 생각하는지 오랜만에 소리 내어 짖었다. 컹! 컹컹!

로벨,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아야와 이야카는 모처럼 시간 내어 성 밖 농장을 순시했다. 그람 형제가 보고한 봄 작황이 실제로 맞는지 확인하고, 겸사겸사 민심과 민생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식량 사정이 안 좋은 것은 다른 성(城)도 비슷해요.”

“역시 몬스터 때문이야?”

“그것도 그거지만, 남쪽 나라의 싸움이 끝나지 않으니까요.”

인어해 남쪽의 3국 전쟁이 심화되었다. 모나카 왕국이 알베니아 왕국을 몰아내나 했는데, 기회를 엿보던 아이란드 왕국이 참전하여 먹고 먹히는 싸움이 되었다. 그 덕분에 로벨과 페르젠 백작은 페닝을 벌었지만, 그 외 인어해 북쪽 영주들은 생계곤란에 빠졌다. 곡물값이 가파르게 오른 것이다.

“자급자족하는 장원이 아니에요?”

“폐쇄적인 장원도 시장 경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요. 밀값이 오르면 밀로 빵을 지어 먹기보다 시장에 팔고 보리를 사서 먹으니까요. 그게 현명하죠. 그런데 보리값도 오르고, 귀리값도 오르니 살 게 없잖아요.”

“그럼 가진 걸 먹으면 되잖아요?”

“그래서 더 빠르게 물가가 올라요.”

절대적인 물량이 부족하지 않아도 물류가 돌지 않으면 품귀현상이 일어난다. 동부평야의 곡창지대 영주는 먹고 살만 하지만, 바위성처럼 농사가 어려운 곳은 가죽이나 양털을 팔아도 식량을 구하기 힘들었다.

“이걸 해소하려면 고대 왕국처럼 강력한 중앙기구가 있어야 하는데...”

겔몬 족이 지배하는 기사의 시대에서는 불가능했다. 로벨이 귀를 한번 후비고 말했다.

“어려운 이야기는 됐어.”

보리 수확이 시작되면 식량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될 것이다. 적어도 로벨이 다스리는 땅에 굶어 죽는 농민은 없을 것이다.

“몬스터를 처리하면 말이야.”

남쪽 나라의 전쟁 외에도 몬스터 때문에 상행이 끊긴 탓이 컸다. 실제로 로드릭 시티를 찾아오는 상인 숫자가 크게 줄었다.

로벨 일행을 본 농민 가족이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였다. 로벨은 모닝스타를 세우고 자상하게 물었다.

“요즘 불편한 거 없어?”

고된 농사일로 허리와 무릎이 아프고, 나이를 먹어 아침저녁으로 눈이 침침하며, 옆집 존스한테 사온 암탉이 달걀을 낳지 않아 심기 불편하다는 말을 할 정도로 모자라지 않았다.

“예예. 예이. 영주님의 보살핌으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요.”

요즘 같이 암울할 때 굶주리지 않으면 잘 사는 것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로벨은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늑대성에 오라고 다독였다. 어린 집사가 표독하게 노려보지 않아도 진짜 성에 갈 일은 없을 것이다. 찰드 촌장이나 리암 수사를 통해 하소연할지는 모르지만.

“공왕 폐하! 공왕 폐하!”

그때 리암 수사가 춘경지 저편에서 뛰어왔다. 수사가 아니라 악마나 호랑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진짜 악마 소식은 따로 있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이 사람을 보냈어요! 성으로! 성으로 오셔야 해요! 지금 바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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