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74화 (474/605)

474화. 고발

도반 도트넘 백작이 거주하는 강철성도 많이 바뀌었다.

기존 15피트 성벽 앞에 7피트 누벽(壘壁)을 새로 쌓고, 보루 위의 구식 발리스타를 전부 캘버린 포로 교체했다. 성벽 돌출부도 나무로 된 호딩(Hoarding)이 아니라 성벽과 일체화된 마시쿨리(Machicoulis)였다. 솔직히 말하면, 늑대성보다 더 왕성 같았다.

“돈이 어디 있어서...”

“도반 도트넘 백작은 울프 용병단을 운영하지 않으니까요.”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북부대로와 늑대도로 사이에서 막대한 이문을 쌓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북해무역협정으로 이득을 봤죠. 잉그비아 왕국에 판 철광석이 전부 여기 거잖아요.”

“아하?”

로벨의 콩고물을 제대로 주워 담았다. 이렇게 된 거 북부대로 통행세를 5할로 올리던가, 철광 가격을 절반으로 낮추자는 희망뿐인 이야기를 하며 성문에 도착했다. 성문지기가 할버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이곳은 도트넘 백작님의 강철성입니다. 어디에서 오신 누구십니까?”

로벨의 갑옷과 모닝스타 때깔에 절로 정중했다.

여담으로 하는 말이지만, 직업이 ‘문지기’일 때 가장 짜증나는 상황이었다. 지체 높은 귀족은 전날에 사람을 보내 방문을 알리고, 보잘것없는 농민은 알아서 굽신거려 상대하기 편했다. 어중간한 기사들이 문제였다.

약속도 없이 찾아와 가문의 업적을 줄줄 읊는데, 표현이 어렵고 과장이 심해서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다. 얼핏 대단해 보여서 성 안으로 안내했더니 잡상인인 경우가 있고, 별 볼 일 없어 보여서 쫓아냈더니 명성 높은 기사인 경우가 있었다. 어느 쪽이든 욕먹는 것은 문지기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젊은 수행원이 기사 양반을 소개했다.

“로드릭 왕가의 적법한 왕이자 포클랜드 시티의 명예로운 후작이자 포비아 왕국의 위대한 그랜드 챔피언이자 늑대성의 유일한 주인이자...”

‘왕? 후작? 챔피언?’

성문지기 얼굴에 의심이 떠올랐다. 질리지도 않고 찾아오는 사기꾼인지, 진짜 대단한 기사 나리인지 판단해야 했다. 어린 집사가 고민을 덜어주었다.

“...처럼 칭송받는 무적무패 왕 로벨 로드릭이 왔다고 알리세요.”

“무, 무적무패 왕!”

장황한 소개가 부질없었다. 두 자릿수의 업적과 호칭이 ‘무적무패’ 한마디로 요약되었다. 그래도 효과는 확실했다. 허세 가득해 보이던 로벨이 고귀해 보이고, 까불거리는 것 같던 어린 집사가 유능해 보이고, 조금 모자란 듯하던 마녀가 사악하고 음침한 진짜 마녀처럼 보였다.

‘왜 나만 이상한데!’

마녀가 속마음에 항의했지만, 그저 속마음이라 마녀 빼고 알지 못했다.

“지금 당장 백작님께 알리겠습니다! 아, 아니,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성문지기를 시작으로 강철성이 흔들렸다. ‘누구라고?’, ‘무적무패 왕!’, ‘그자가 왜?’, ‘난들 아나!’, ‘이럴 때가 아니군! 당장 가세나!’ 강철성의 상주하는 기사, 기사 종자, 시종, 시녀, 심지어 요리사와 마구간지기까지 성 안뜰로 몰려나왔다. 급하게 뛰어오다 로벨과 부딪칠 뻔한 자도 있었다. 로벨의 위명이 드러난 광경이며, 늑대성과 강철성의 관계가 엿보이는 자태였다.

“으아... 적진에 온 거 같아요.”

어린 집사가 사방팔방에서 지켜보는 강철성 사람들을 보며 속삭였다. 고작 스무여 명뿐인-그것도 대부분 초병인- 늑대성과 비교되는 인파였다.

“그것보다 던전(Dungeon)이죠. 아니요. 지하감옥 말고요. 몬스터 나오는 곳 있잖아요.”

“그럼 저게 던전 보스야?”

연병장과 정원을 지나 아성 앞에 이르자 보스가 나타났다. 북부의 뿌리 깊은 호족이자 사트로 가문의 첫째가는 봉신 도트넘 백작. 그러나 실상은 수백 년을 살아온 마도의 수호자자 인간의 피를 탐하는 흡혈귀 왕 드라카였다.

“뭐, 어울리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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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반 도트넘 백작은 오래전부터 기다렸다는 듯 로벨 일행을 맞이했다.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정중하게 응접실로 안내했다. 허세였다. 가면이라 해도 될 것이다. 기사들의 시선이 멀어지자 바로 표정을 바꿨다.

“오해요.”

“뭐?”

“오해라 했소. 본인이 한 짓이 아니요.”

잘은 모르지만, 오해가 분명했다. 로벨이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자 백작이 미심쩍게 반응했다.

“...몬스터 때문에 온 것이 아니오?”

“그건 맞아.”

“...본인이 몬스터를 불러냈다고 생각한 것 아니오?”

“뭐라고? 그런 거야?”

로벨이 칼자루를 쥐었다. 그러고 보니 백작은 전과가 있었다. 백작은 급한 나머지 마법을 써서 물러났다. 눈 깜짝할 사이 응접실 끝으로 이동했다.

“아니오! 오해라 말했잖소! 본인이 아니오!”

로벨을 통해 많은 것을 이룬 백작이다. 비단 부귀영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로벨의 영성이 강해질수록 마도의 수호자도 강해졌다. 북해의 유령선장이 인어해에서 크라켄을 소환할 정도니, 신화시대 이후 마(魔)의 힘이 가장 강한 시기였다.

“그 힘으로 몬스터를...”

“아니라니까!”

인지의 존재가 현신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옛 신의 천사나 나팔꽃 요정처럼 긍정적인 것도 있지만, 대개는 미지의 공포-옷장 속의 악령이나 침대 아래 괴물이 흔했다.

“그 때문에 많은 수호자가 공포를 조장하오.”

“남 일처럼 말하지 마.”

그 공포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뱀파이어였다. 백작은 슬그머니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상대가 왕이라 해도 집주인의 체면이 있었다.

“여기서 짚고 가야 할 것이 있소.”

“짚어봐.”

왠지 ‘짖어봐’ 처럼 들리는데, 착각일 것이다.

“나와 같은 수호자는 결코 인간의 파멸을 바라지 않소.”

로벨이 즉시 반박했다.

“죽은 자의 왕은 어떻게 설명할 거야?”

“그새 잊었소? 그들을 처치하도록 도운 것이 본인이오.”

“아?”

듣고 보니 그러했다. 로벨이 칼자루에서 손을 떼자 백작이 한결 편하게 말했다.

“본인은 인간의 피로 연명하는 뱀파이어요. 재미있지 않소?”

“어느 부분이?”

“인간이 없으면 살 수 없소. 그것이 수호자의 본질이오.”

뇌로 되새김질하니 어렴풋이 이해되었다.

인간의 공포에서 비롯된 수호자는 인간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에 무턱대고 인간을 해치는 수호자, 와이트나 버그베어 등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뱀파이어 군주가 와이트의 위치를 일러바치고, 대마녀 바바 야가가 절굿공이를 선물한 것이 그 때문이다. 그들이 선량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으... 머리 아파...”

“어렵게 생각할 것 없소. 인간이 필요해서 인간을 보호하는 것이요.”

“그거 꼭 가축 같은데요?”

어린 집사가 조그맣게 구시렁거렸다. 그러자 백작이 웃었다.

“인간과 가축이 다를 것이 무엇인가? 지성? 그것으로 얻은 것이 배불리 먹고 진흙탕에서 노는 돼지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지? 자유의지? 법과 질서라는 울타리에서 진정 자유로운 인간이 있는가? 혹여 도축 당하지 않을 권리라 말하면 웃겠다. 전쟁터에서 죽고 교수대에서 죽는 것이 개인의 선택은 아닐지니. 주인에게 잡히지 않은 닭장 속 짐승처럼 그저 운이 좋아 살아갈 뿐이지.”

인본주의에 물들지 않아도 화가 날 말이다. 하지만 어린 집사는 화내지 않았다. 백작은 아무 반응이 없자 실망해서 마무리했다.

“자신의 목장에 늑대를 들이는 주인은 없소. 본인 또한 마찬가지요. 양을 잡기 위해 칼을 쓴 적은 있으나, 이미 잡은 양을 해칠 만큼 우매하지 않소.”

로벨은 악마의 주장 혹은 변명을 유심히 들은 후 일축했다.

“정리해서, 지금 난동 중인 몬스터가 네 잘못은 아니란 거지?”

“...바로 그거요.”

“그럴 거라 생각했어.”

뱀파이어 군주는 지혜로웠다. 그래서 왜 칼을 뽑으려 했느냐 따지지 않았다. 로벨은 유력한 범인을 지목했다.

“악마추종자가 다시 나타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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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키르케는 본인이 항상 말하듯 사랑과 우정의 드루이드였다.

평소 모습을 보면 사랑 비슷한 것도 해본 적 없고, 우정 비슷한 것도 나누지 않는 듯하지만, 본질은 분명 긍정적인(Positive) 힘을 다루는 백마법 계통 드루이드였다.

“백마법이란 게 있어?”

“흑마법의 반대가 백마법이죠.”

옛 신의 교단은 마법 자체를 부정한(Negative) 것으로 여겼다. 인간을 현혹해서 실체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낸다는 이유였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옛 신이나 천사도 엄밀히 말하면 실체하지 않는 것이라 우습죠. 인지의 존재를 불러낸다는 점에서 사제님도 마법사라고요.”

“그런가? 그렇구나.”

리암 수사가 하는 기도와 축복도 백마법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튼, 긍정적인 믿음을 다루는 마녀 키르케는 공포, 의심, 증오, 탐욕 따위로 이루어진 몬스터를 부릴 수 없었다. 그것은 악마추종자 같은 흑마법사의 영역이었다. 어린 집사가 의문을 제기했다.

“악마를 추종하면, 악마인 백작님이 나서서 하지 말라고 하면 되잖아요?”

“악마추종자란 명칭은 편의적인 것이다. 그들 스스로는 ‘진리탐구자’라 부르며, 자신의 모임을 ‘진리탐구회’라 하지. 그 탐구란 것을 위해 수호자와 거래할 때가 있지만, 옛 신의 제자처럼 우리를 추종하거나 하진 않는다.”

“...이야기하면서 느끼는 건데, 마도의 수호자란 것도 별것 없군요? 이름 있는 몬스터 수준 아닌가?”

“무례하군. 진실을 말한다는 점에서 더욱 말이야.”

백작이 씨익- 웃었다. 뾰족한 송곳니를 보이는 것이 칭찬은 아니었다. 어린 집사는 목을 감싸고 로벨 뒤에 숨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실체한다는 것이죠.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니에요. 이름이 없으면 인지할 수 없고, 인지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데...”

마녀 키르케가 잘난 척하다가 로벨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름이 없기에 왕이 된 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사악한 흡혈귀 마법사 도움이 필요해.”

“표현이 별로요.”

“몬스터를 없앨 수 있어?”

“저 마녀가 말한 것과 비슷한 이유로, 이미 실체를 가진 것은 없앨 수 없소. 그것은 현세에 생물이나 마찬가지니 죽여서 썩히거나 불로 태워야 하오.”

“그럼 악마추종자를 찾아내는 것은?”

로벨의 목적이 드러났다. 지극히 기사다운 발상이었다. 머리를 치는 것이 전술의 기본이니까.

“마법에 대한 환상을 깨기 싫으나 상황이 급하니 솔직히 고백하겠소. 점을 치거나 악마를 소환해 상대를 찾는 것은 허구요. 어린아이들이나 좋아할 동화지.”

“흡혈귀도 동화 비슷한... 웁스!”

어린 집사가 깐죽거리다가 입을 막았다. 로벨은 현학적인 이야기만 실컷 하고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되는 뱀파이어 군주를 경멸스럽게 보았다.

“그럼 어린 양을 위해 아무 것도 할 게 없다?”

로벨을 왕으로 추대한 것이 백작이었다. 왕의 질책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마법만이 능사가 아니잖소. 고전적인 방법을 사용합시다.”

“고전적인?”

“사람을 풀어 찾는 거요. 지능이 있는 몬스터를 잡아 심문하면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밝힐 것이오.”

“그리고?”

“그리고 교회에 고발하시오. 옛 신의 기사들은 요즘 뭐하오?”

흡혈귀가 교회에 고발하라고 종용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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