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화. 편지
찬바람이 몇 번 불더니 따뜻한 햇살이 쏟아졌다. 눈 녹은 평야에 파란 새싹이 하나둘 머리를 내밀고, 겨울잠 자는 짐승이 풀내음에 눈 비비고 일어났다. 옛 추억에 젖은 봄바람이 불자 땅이 녹고 눈이 녹고 사람의 마음이 녹았다. 바야흐로 봄이 찾아왔다.
“그게 아니야. 발을 써야지. 간격을 읽으라고.”
로벨은 목검을 좌우로 흔들었다. 솜씨 좋은 검객이면 칼끝이 아니라 발끝으로 공격을 예측하지만, 검객 비슷한 것도 못 되는 어린 집사는 금방 현혹되었다. 어느 쪽을 공격할지 몰라 바쁘게 칼을 옮겼다. 그래도 지난 수십 일간 얻어터진 보람이 있어 눈을 감지는 않았다.
“좋아.”
로벨은 목검을 쑥 내밀었다. 어린 집사는 반사적으로 거리를 벌리며 칼날을 쳐냈다. 제법 훌륭했다.
“공방일체야. 공격으로 바로 연계해야지.”
로벨은 튕겨진 목검을 다시 휘둘렀다. 한 손으로 휘젓는데 흡사 회초리 같았다. 어린 집사는 비명을 지르며 다시 쳐냈다.
“막기도 바빠요!”
탁! 타닥! 타다닥-!
예니 곱 합이 빠르게 오갔다. 얼핏 보면 대등했다. 막을 만한 힘과 피할 만한 속도로 공격하기 때문이다. 한 손을 뒷짐 쥐고 한 손으로 휘두르는 것이 증거였다.
“머리!”
로벨이 경고를 하고 수직으로 휘둘렀다. 어린 집사는 두 손으로 목검을 받치고 정수리를 지켜냈다. 타앙-!
로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린 집사의 다리를 걷어찼다. 온 신경이 머리에 쏠린 어린 집사는 피하지 못했다. 옆으로 붕 떠서 그대로 추락했다. 우당탕-!
“으으으으... 으...”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로벨은 목검을 어깨에 걸치고 한 걸음 떨어졌다.
“속임수는 기본이야. 무기에 너무 집착하지 마.”
“저번에는 칼끝을 집중해서 보라면서요!”
“...그것부터 속임수야. 대단하지?”
“공왕 폐하는 거짓말쟁이야!”
심오한 검술의 세계를 몇 마디 말로 깨우칠 수 없으니, 오직 피와 땀과 먼지로 체득할 뿐이다.
로벨이 도발적인 몸짓으로 ‘한 판 더?’ 물었다. 어린 집사는 피가 섞인 침을 뱉은 후 정중히 거절했다.
“더 하면 저 죽어요.”
깨지고 부러진 곳은 없지만, 멍들고 까진 곳은 엄청 많았다. 마녀 키르케가 매일 타박상에 좋은 약을 발라주지 않았으면 진작 그만뒀을 것이다. 약효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로벨은 수통을 꺼내 한 모금 마시고 건네주었다. 어린 집사는 조금 마시는 듯하더니 입안을 씻어 도로 뱉었다. 넘어질 때 안 좋은 곳을 씹은 모양이다. 오늘 훈련은 여기서 끝이었다. 펄프 대장이 연병장 밖에서 헛기침했다.
“공왕 폐하, 청옥성의 펠릭스 경이 찾아왔습니다.”
“아...”
로벨이 환하게 웃었다. 얼굴 몇 번 안 본 청옥성 기사가 반가워서는 아니었다.
“호른 경이 보냈소?”
펠릭스 경은 열렬한 반응에 의아해하며 고급 면지를 꺼냈다. 인장을 찍고, 봉인줄을 두 곳에 감았다. 잉그비아 왕가의 비밀, 혹은 치부가 고스란히 담긴 거라 보안에 특히 신경 썼다. 바다사자 호 선장이 직접 가져온 이유도 그러했다.
로벨이 편지를 가장한 잉그비아 왕국 정황 보고서를 여는 사이 어린 집사는 주변을 정리했다. 말로는 자기가 받아보겠다 했지만, 군사와 외교를 왕에게 숨길 수 없었다. 청옥성의 영주대리 겸 바다사자 호 선장 펠릭스 경이 괜히 참견했다.
“자네 낯이 익은데, 공왕 폐하의 종자인가?”
“아닌데요? 집사인데요?”
어린 집사가 뚱하게 대꾸했다. 청옥성 해전 때 봐놓고 기억 못 하는 게 참 기사다웠다.
로벨은 긴 편지를 한 번 읽고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읽었다. 어색해진 어린 집사와 펠릭스 경이 뚫어져라 쳐다보자 그제야 반응했다.
“점심 먹었소?”
할 이야기가 많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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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알보다 조금 큰 글씨로 2피트 길이의 종이를 가득 채운 편지지만, 주인을 위한 절절한 기사의 마음을 제외하면 세 줄로 요약이 가능했다.
“이질에 걸린 사람이 흑태자 하나 뿐이야.”
이븐 시나의 ‘액체론’을 부정하는 의사도 이질 같은 배앓이는 물에서 비롯된 질병이라 말했다.
“흑태자 혼자 강물을 마셨을 리 없고...”
“응. 독일 가능성이 높아.”
독을 다룰 줄 알고, 흑태자를 싫어하는 집단은 악마추종자뿐이었다. 심증이 더욱 견고해졌다.
“저쪽도 난리 났겠군요. 그럼 후계자는 어찌 되나요?”
그것은 편지보다 직접 보고 온 펠릭스 경이 정확했다.
“흑태자의 차남 리처드 공이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이제 리처드 2세라 해야겠지.”
“에드워드 4세가 아니고요?”
“장남 에드워드는 수년 전에 열병으로 죽었다.”
잉그비아 왕실은 가족 이름이 같아서 헷갈렸다. 몇 대에 걸쳐 이름을 물려 쓰니까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 정도는 가소로웠다.
“그러니까 에드워드 3세 후계자가 리처드 2세란 거죠? 그 사람은 어떤가요?”
그것은 왕에게 고할 일이었다. 펠릭스 경은 어린 집사에게 손바닥을 보이고 로벨을 보았다.
“리처드 2세는 이제 겨우 9살입니다.”
어린 왕은 때로 폭군보다 안 좋았다. 이용하려는 자가 많기 때문이다.
로벨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하얀 빵과 삶은 계란이 나왔지만 식욕이 없었다.
“에드워드 3세 왕이 오래 살기를 바래야겠군.”
“그럼 북해무역협정은? 흑태자가 한 약속은 어떻게 되었죠?”
펠릭스 경은 자꾸 끼어드는 젊은 집사가 못마땅했지만, 공왕이 잠자코 있어 차마 혼내지 못했다. 그리고 북해무역협정은 청옥성 입장에서도 중요했다. 그것은 무역협정인 동시에 평화협정이기 때문이다. 펠릭스 경의 표정이 어두웠다.
“호른 경이 왕족들과 협상 중이지만, 여론이 좋지 않다. 예로부터 잉그비아 왕국과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
어린 집사가 울상이 되었다. 에드워드든 리처드든 협정은 깨질 가능성이 높았다.
“협정만 깨지면 다행이지...”
잉그비아 왕실 뒤에는 악마추종자가 있었다. 머리 없는 기사의 예언이 아니어도 지금까지 행적을 보면 큰일을 저지를 것이다.
“포클랜드와 검은 숲에 사람을 보내. 악마추종자라 하면 안 믿을 테니까, 잉그비아 왕국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것만 전해.”
“걔네가 폐하 말을 들을까요?”
“글쎄... 그래도 해봐야지. 우리가 대비하면 잉그비아 왕국 기사들도 딴생각 못 할 거야.”
로벨은 차갑게 식어가는 계란을 보며 말했다.
“청옥성도 대비하시오. 평화협정이 깨지면 잉그비아 해군이 어찌 나올지 모르오.”
“해군이 아니라 해적이죠. 왕립해적. 칫!”
어린 집사가 잇소리를 내었다. 펠릭스 경이 처음으로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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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해 남쪽 나라가 치열하게 싸우고, 북해 너머의 나라가 음흉하게 음모를 꾸미는 가운데, 볼탄 반도는 봄 작물을 큼직이 키우고 가을 작물을 파종했다. 작금의 유라피아 대륙에서 가장 평화로운 동네였다.
“이게 다 공왕 폐하 덕분이지.”
“맞네. 맞아. 프란시스 공작 시절에는 맨날 싸움질이었잖은가.”
전쟁은 지금도 일어나지만, 영지 밖으로 나가 두들겨 패고 돌아오니 영내 주민들은 마음 편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나날이 커지는 도시와 매일 쌓여가는 재화가 로벨 로드릭 왕의 위대함을 증명했다.
그러나 위대한 왕은 기분이 안 좋았다.
“내 말을 무시했다고?”
“무시까지는 아니지만... 썩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
“그게 무시한 거잖아.”
“그것이 사정이 있습니다. 검은 숲은 전쟁 배상금과 포로 몸값을 내느라 여력이 없다고 하고, 포클랜드는 리히터 가문과 고드만 가문이 갑자기 전쟁을 벌여서 외부 일에 신경 쓰지 못한다고 합니다.”
“리히터? 고드만? 걔네는 왜 또 싸우는 거야? 하여간 욕심은 많아서...”
리히터 백작이 알면 열불이 나서 쓰러질 소리를 하고 호른 경의 두 번째 편지를 펼쳤다. 정갈한 글씨에 애틋한 문장을 읽으니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흔치 않은 표정에 어린 집사 이하 늑대성 식구들이 불편해했다.
“그렇게 좋아요?”
“응?”
“아니에요. 대답하지 마세요.”
어린 집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페리 행정관, 리암 수사 등을 힐끔 보았다. 그러나 로벨은 순진무구했다.
“아직은 좋아.”
마녀 키르케가 깜짝 놀랐다.
“아직이요? 그럼 나중에 안 좋아지나요?”
“나중의 일은 모르잖아?”
마녀 얼굴이 경악에 물들었다. ‘기사님, 그렇게 안 봤는데...’ 어쩌고 중얼거렸다. 로벨은 심각한 오해를 깨달았다.
“그, 그거 말고! 잉그비아 왕국 정세 말이야!”
로벨은 편지를 건네주려다가 참았다. 이상한 내용은 없지만 괜히 부끄러웠다. 그래서 해당 부분을 간략히 요약했다.
“에드워드 3세가 몸이 안 좋아. 조만간 왕위계승식이 있을 모양인데, 리처드 2세의 후계 문제로 왕실 가문이 마찰을 빚고 있어.”
“어린 왕의 숙명이죠.”
어린 집사 외에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인재들이지만, 늑대성 특성상 정쟁(政爭)은 좀 생소했다. 사실 로벨도 마찬가지였다.
“에드워드 3세의 넷째 아들, 그러니까 흑태자의 동생 존 오브 곤트 공작이 실권을 잡았는데, 이 공작이 다른 형제들과 사이가 안 좋아.”
“그럼 또 내전인가요?”
“그건 모르지. 지금은 왕이 있으니까. 하지만 볼탄 반도에 신경 쓰지 못할 것은 확실해.”
“으으... 복잡하네요.”
자식이 많은 것도 골치 아팠다. 자식 비슷한 것이 없는 로드릭 왕가와 달랐다. 그때, 허풍쟁이가 중얼거렸다.
“곤트의 존... 곤트 령(領)이면 사트로 가문에 속한 땅 아닙니까요?”
“뭐? 진짜?”
로벨이 깜짝 놀라 물었다. 볼탄 반도의 왕이라 불리지만, 실제로 다스리는 땅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3분지 2가 조금 안 되었다. 나머지는 볼프 사트로 후작의 땅이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사트로 시티 동쪽에 있는 영지입니다. 이야, 거기 영주가 잉그비아 왕자였군요?”
허풍쟁이가 새로운 지식을 얻어 좋아했다. 그러나 ‘땅’과 ‘소유주’에 민감한 기사와 행정관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럴 리 없잖아. 곤트 영주와 혼인 동맹을 맺은 거겠지.”
“이거 느낌이 안 좋은데요? 그 사람이 실권을 쥐면 위험한 거 아니에요?”
전쟁은 명분이었다. 힘이 있으면 종종 무시되지만, 그래도 시작부터 건너뛸 수 없었다. 로벨은 호른 경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정보가 부족했다. 게다가 자꾸 이상한 정보가 끼어들었다.
“공왕 폐하! 로드릭 마을의 촌장이, 어, 누구라고? 맞다! 찰드 촌장이 알현을 요청했습니다!”
“지금 회의 중인 거 안 보이느냐!”
펄프 대장이 로벨과 어린 집사를 대신해 화를 냈다. 평소처럼 대수롭지 않게 찾아왔다가 호되게 혼난 신참 용병이 목을 움츠리고 변명했다.
“저, 저도 안 된다고 했는데, 그 영감탱이가 하도 난리를 피워서...”
“찰드 촌장이? 무례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닌데?”
로벨은 달달 외운 호른 경의 편지를 접고 신참 용병을 보았다. 용병은 용기를 얻어 촌장의 말을 전달했다.
“뉴 로드릭 마을 북쪽에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상하지만, 아주 심각한 정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