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70화 (470/605)

470화. 우울

천 년 동안 실전으로 갈고닦아진 포클랜드 검술은 이미 하나의 학문이었다. 무기별, 상황별, 인원별로 분야가 세분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평복차림으로 검기병을 상대할 때는 가급적 짧은 무기로 몸을 낮출 것을 권장했다. 기수의 공격을 무력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앗!”

듀라한의 롱소드가 꽁지머리를 가르며 스쳐 갔다. 최대한 낮게 휘둘렀지만, 더욱 낮아진 로벨을 맞히지 못했다. 로벨은 슬라이딩하다시피 롱소드를 피하고 흐룬팅을 찔러 넣었다. 주인만큼이나 기괴한 해골말이 비명을 질렀다.

-끼이이이이에에-!

로벨은 말의 갈빗대를 여러 개 끊어낸 후 땅바닥을 반 바퀴 굴러 일어났다. 보통 말이면 내장을 쏟아내며 쓰러질 텐데 이미 한 번 죽은 말이라 그런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로벨은 흐룬팅을 양손으로 잡고 중단자세를 취했다. 머리가 제자리에 없다고 머리가 나쁘진 않을 테니, 계속 싸울 거면 해골마에서 내릴 것이다.

-마도의 왕이자... 기사의 왕... 요정의 선물인가...

듀라한은 롱소드를 빙그르 돌려서 칼집에 밀어 넣었다. 조금 전 공격은 인사 내지 실력 테스트였던 모양이다.

‘난 아니야.’

로벨은 코웃음치고 달려들었다. 무기를 거뒀으니 기습하기 딱 좋았다. 기사의 왕이 기사도를 지키지 않자 꼴에 기사라고 분개했다.

-비열한 짓을...!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말(馬)을 먼저 노리는 것도 대(對)기병 검술이다. 검법서와 다른 것은 정강이나 무릎이 아니란 것뿐이다.

로벨은 앞발을 쳐드는 해골마 가슴에 흐룬팅을 꽂고 사선으로 베었다. 늑골에 이어 흉골까지 잘리자 버티지 못했다. 앞다리에 힘을 주지 못하고 풀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같은 과라고 모닝스타가 구슬피 울었다.

듀라한은 쓰러지는 해골마에서 훌쩍 뛰어 땅에 내려섰다. 얼굴이 없어서 감정을 읽을 수 없는데, 추리하자면 썩 좋지 않을 것이다.

-실력은 소문대로... 성격은... 조금 다르군...

성자와 성녀도 평생의 몇 번 없을 오붓한 시간을 방해받으면 화낼 것이다. 로벨이 이빨을 갈며 흐룬팅을 치켜들자 죽음의 전령 듀라한이 한 걸음 물러났다.

-그만... 그만하라...

“누구 마음대로?”

그러나 말과 달리 달려들지 못했다. 듀라한이 넝마 같은 망토를 치우고 허리에 찬 투구를 꺼냈기 때문이다.

‘저것 봐! 머리가 없어도 투구를 가지고 다니는데!’

무겁고 답답하다고 투구를 쓰지 않는 철부지 용병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진짜 보여주면 반성하기에 앞서 비명 지르며 도망갈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냥 투구가 아니었다.

“나는 종말을 고하는 자. 내 앞에서 삶을 바라는 것은 만용이니, 필멸자여, 그대 운명에 순응하라.”

바이저가 덜커덩 덜커덩 움직이며 말을 했다. 호른 경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용감하고 신실한 기사라도 원초적인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없었다. 예외가 있다면 생사에 초탈한 존재였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자기소개야?”

로벨이 의아하게 물었다. 딱히 알고 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듀라한의 마법이 사라졌다.

호른 경이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발이 닿지 않는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온 느낌이었다.

“고, 공왕 폐하, 괜찮으십니까?”

“아니오. 괜찮지 않소. 저게 너무 무례하잖소?”

로벨은 어느 때나 로벨다웠다. 호른 경은 잠시나마 겁먹은 자신을 질책하고 로벨 맞은편에 섰다. 급소 하나가 비었지만, 왕이 명령하면 언제든지 치고 들어갈 수 있었다.

“...불사신 코셰이가 실패한 원인을 알겠다.”

듀라한의 머리가 말했다. 그것은 꽤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예의 바른 기사라면 상대방의 눈을 봐야 하는데, 그 위치가 평소보다 많이 낮았다.

‘허파가 없는데 어떻게 말을 하지?’

닥터 줄리안을 불러오고 싶었다. 어쩌면 외과술의 새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이다. 로벨은 흐룬팅을 겨냥한 채 물었다.

“죽지 않는 자의 복수를 하러 온 거야?”

“죽음을 부정한 자에게 우정이 있겠는가.”

“불사신은 꽤 좋게 보던데? 머리 없다고 놀리지 말라는 조언까지... 아, 미안.”

듀라한의 바이저가 덜컥덜컥- 거렸다. 진짜 콤플렉스인 모양이다. 알 수 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대의 힘을 탐하는 자가 있다. 북녘의 사악한 마법사를 경계하라.”

“잉그비아 왕국의 악마추종자? 흑태자가 전부 처치했을 텐데?”

“이 땅에 죽음이 내려질 것이다. 경고하노라, 어린 왕이여. 최후의 순간 망설이지 말지어다.”

그리고 질문은 받지 않았다. 석양이 사라지는 순간, 머리 없는 기사도 사라졌다. 모닝스타가 앞발로 툭툭 치던 해골마도 연기처럼 흩어졌다. 자신도 신비과(?)에 속하면서 깜짝 놀라 도망갔다.

로벨은 삽시간에 어두워진 언덕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삐졌나?”

“그런 모양입니다.”

뭔가 무서운 예언을 한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

청춘 기사의 저녁 데이트는 그렇게 끝이 났다.

왕이란 작자가 해가 지도록 돌아오지 않자 어린 집사가 사람을 풀어 수색했다. 성문을 지나자 횃불을 잔뜩 피운 울프 용병단과 시장 상인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저기 폐하다! 공왕 폐하가 있다!”

“이야앗! 놓치지 마라! 반드시 모셔라!”

누가 보면 ‘공왕 폐하’란 이름의 범죄자인 줄 알 정도였다.

로벨은 영지 밖을 조금 오래 순찰했을 뿐이며, 호른 경이 함께해서 안전하다 해명했다. 의심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은 금방 믿고 흩어졌다. 하지만 의심이 많을뿐더러 의심할 이유까지 있는 어린 집사는 눈초리가 매서웠다.

“이 시간에 호른 경이 왜 있어요? 그것도 왜 공왕 폐하랑 단둘이?”

가족 몰래 사랑한 몬태규 가문의 아들과 캐퓰렛 가문의 딸이 그러했을까, 로벨과 호른 경이 크게 당황했다.

“그냥 어쩌다가, 우연히, 날씨도 좋고, 그렇잖아?”

“기사가 왕을 뵙는데 몸종의 허락이 필요한가!”

화를 내고 딴청 피우니 더욱 의심스럽다. 어린 집사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기 전 화제를 돌렸다.

“듀라한이 찾아왔어.”

효과가 아주 좋았다. 어린 집사는 순결을 중시하는 수도사 마인드를 치우고 마도의 생물에 집중했다.

“대가리 없는 기사요?!”

“대가리는 좀...”

어째 주인보다 입이 걸었다. 로벨은 흥분한 어린 집사를 달래며 듀라한이 남긴 말을 전했다. 어린 집사는 앞으로 혼자 다니지 말라고 잔소리한 후 예언을 고민했다.

“악마추종자를 경계하란 것은 알기 쉽네요. 그놈들이 폐하를 노린 게 한두 번인가요.”

“요즘은 뜸하잖아?”

“흑태자가 열심히 일하나 보죠.”

두 번째 예언이 어려웠다. 사람이 죽는 이유는 수없이 많았다. 전쟁, 질병, 노화, 범죄, 재해, 사고 등등.

“앞 내용하고 맞추면 악마추종자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는 건데... 걔네를 못 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감이 안 잡히네요.”

로벨은 호른 경을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어린 집사의 관심을 완전히 돌렸다. 어린 집사는 늑대성 언덕을 오르는 동안 쉼 없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짜증을 터트렸다.

“에이잇! 안 그래도 할 일이 산더미인데! 그냥 신경 끄죠! 죽음의 전령인지 전갈인지 괘씸하군요! 제대로 된 정보를 줘야지!”

죽음의 전령이 들으면 섭섭할 소리였다. 하루가 지나자 이유가 밝혀졌다.

“잉그비아 왕국의 흑태자 에드워드가 사망했습니다! 사인은 이질(痢疾)이고, 시신은 성 어거스틴 수도원에 안장되었습니다! 다시 고합니다! 잉그비아 왕국의 흑태자 에드워드가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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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침통했다.

옛 친구라 할 수 있는 기사가 또 죽었다. 맥켈런 남작 때와 달리 너무 멀어 찾아갈 수도 없었다.

“그 건강한 대공이 이질이라니...”

왕이 침울하니 왕을 따르는 사람들 모두 우울했다. 아무 생각 없이 껄껄 웃던 외팔이가 애꾸눈과 과묵한 몬트 손에 두들겨 맞아서 더욱 그러했다. 사실 이 우울함은 슬픔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질은 가난한 사람이 걸리는 거 아닌가요? 전쟁 중에는 건강하다가 전쟁이 끝나고 왕성에서 위독해지다니요?”

“그럴 수 있기는 한데...”

로벨, 어린 집사, 그리고 마녀 키르케는 악마추종자를 떠올렸다.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듀라한이 경고한 타이밍이 절묘했기에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주가 아닐까?”

“예전에도 말했지만, 저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마음이 아픈 사람을 괴롭힐 수는 있지만, 건강한 사람을 아프게 할 수는 없어요.”

“저주가 아니면 독일 수 있죠. 마법사가 마법만 쓰진 않잖아요?”

마녀 키르케도 그렇지만, 마법사가 주로 사용하는 것은 마술(魔術)이 아니라 약술(醫術)이다. 그리고 약과 독은 구분하기 힘들었다. 지난밤 은근슬쩍 늑대성에 머문 호른 경이 말했다.

“잉그비아 왕실에 사람을 보내시지요.”

어린 집사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거 좋은 생각이에요! 흑태자와 맺은 북해무역협정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알아봐야 하고, 잉그비아 해군의 동향도 확인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근데 아직도 집에 안 갔어요? 호른 성은 한가한가 봐요?”

“...왕께서 편찮은데 어찌 자리를 비울까.”

“호른 경이 있다고 편해지진 않잖아요? 성을 자꾸 비우면 직무유기인 거 알아요? 가만 생각하니까 오래전부터 이상했어요. 머를 브릭 경이 잘 다스리는 성을 빼앗아 자기 성으로 삼은 것도 그렇고, 공왕 폐하가 어디 갈 때마다 쫓아오는 것도 그렇고...”

로벨과 호른 경, 그리고 이유는 모르지만 마녀 키르케까지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했다. 어린 집사의 의심에 소외감이 더해졌다.

“혹시 두 사람, 나 몰래...”

“조, 조문객으로 호른 경을 보내려고! 그러려고 내가 불렀어!”

로벨이 큰 소리로 어린 집사 허리를 잘랐다. 우울함이 싹 가셨다.

“잉? 호른 경이 온 것은 어제인데요?”

“그러니까! 오늘 보내려고 어제 불렀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요?”

“감히 주인의 뜻을 의심하는가!”

“맞아요! 기사님 말씀에 토 달지 마요!”

어린 집사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흥분한 세 사람은 논리적으로 완벽하다는 눈빛을 교환했다. 허나, 세 사람의 지능을 합쳐도 어린 집사의 절반밖에 안 되었다.

“뭐, 좋아요. 호른 경이 사절단장으로 간다는 거죠?”

“그, 그런가? 그렇게 되나?”

“청옥성의 함대를 빌려줄게요. 그쪽 기사들과 함께 가면 얕보이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해야 할 일이 많은데요. 악마추종자의 흔적을 찾는 것부터 다음 왕위 계승자를 만나는 것까지...”

호른 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일이 잘못되었다. 이렇게 되면 봄꽃이 질 때까지 로벨을 만날 수 없었다.

“이걸 저어언~부 할 때까지 돌아올 필요 없어요. 공왕 폐하는 바쁘시니 중간보고서는 제가 받을게요. 괜한 안부 같은 거 쓸 필요 없어요. 어서 준비하세요. 어서요.”

어린 집사한테 당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는 저리 얄미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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