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9화. 햇살
로벨 일행이 볼탄 반도로 돌아온 지 여러 날이 지났다.
살갗을 간질이는 오후 햇살과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로 겨울의 끝자락을 느꼈다. 바다 건너에서 큰일을 치렀지만, 정작 볼탄 반도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마녀는 불만스러웠다.
“도대체 왜!”
“아익잇-! 깜짝아-!”
어린 집사가 장부 끄트머리에 빗금을 내고 버럭!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녀의 고민은 깊었다.
“도대체 왜? 왜 아무 일 없죠?!”
어린 집사는 깃펜을 잉크통에 꽂으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뭔 소리에요? 지금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새해 예산도 짜야 하고, 용병 계약도 갱신해야 하고, 춘경지도 살펴야 하고, 늑대도로도 망가진 곳이 하나, 둘...”
“그런 쓸데없는 거 말고요!”
“쓰, 쓸데없는...”
어린 집사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늑대성의 수백 마리(?) 식충이가 누구 덕에 먹고 마시는지 깨닫게 해주려는 순간, 의외의 인물이 거론되었다.
“우리 기사님이랑 호른 기사님 말이에요.”
“공왕 폐하? 폐하가 왜요? 모처럼 얌전해서 보기 좋구만?”
“지금 얌전할 때가 아니니까 그렇죠! 으으으... 화가 난다!”
어린 집사는 한숨을 쉬고 장부를 덮었다. 이곳은 어린 집사의 침실 겸 개인 집무실이었다. 왜 여기 와서 짜증을 부리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좋아요. 차근차근 이야기하죠. 공왕 폐하와 호른 경 사이에 무슨 일 있었나요?”
“당연히 있었죠!”
“혹시 나쁜 일인가요?”
“...아니요?”
“그럼 됐네요. 나가 보세요.”
어린 집사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용병 계약서를 꺼냈다. 기간이 만료된 용병을 불러 재계약할지, 짐 싸서 요새를 떠날지 이야기해야 했다.
인원이 적을 때는 구두계약으로 충분했는데, 천 명이 넘어가자 문서로 남기지 않으면 곤란했다. 그런데 글자를 모르는 용병이 많아 손이 많이 갔다.
“아! 몰라요! 어린 집사는 바보 멍청이 개벼룩 오줌 찌꺼기야!”
“개벼룩 오줌 찌꺼기...”
저런 욕은 어디서 배워오나 궁금했다. 그러나 화내는 게 중요해 굳이 묻지 않았다.
“누가 누구보고 바보라는 거야! 진짜 바보를 상대하는 게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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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키르케의 불만은 나름대로 근거 있었다. 로벨의 일상은 기이할 만큼 변화가 없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말이다.
“셋? 셋뿐이야? 더 없어?”
“셋도 많습니다. 급료 따박따박 나오지, 수당 넉넉하게 챙겨주지, 칼질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는 잡놈들한테 최고의 직장 아닙니까.”
로벨은 긍정 부정하지 않고 계약서를 다시 보았다. 고향에 가서 농사짓겠다는 3년 차 풋맨, 노스폴드 시티 상인의 개인 경호원으로 고용되었다는 2년 차 맨앳암즈, 그동안 모은 페닝으로 직접 장사하겠다는 6년 차 파이크맨이었다. 전부 축하할 일인데, 조금은 아쉬웠다.
“몸뚱이 하나로 시작했으니, 몸뚱이만 건사해도 본전은 건진 겁니다. 하물며 이놈들은 한밑천씩 챙겼으니 크게 성공했지요.”
펄프 대장이 용병 대장답게 위로했다. 물론, 이죽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떠난 용병 중 절반은 망하고 다시 용병짓합니다. 이 중 최소 하나는 돌아올 겁니다.”
얼핏 들으면 악담 같지만, 돌아오면 다시 받아주겠다는 자상함이었다. 로벨은 용병 계약서를 치웠다.
“밀린 임금이 있으면 전부 지급하고, 내일 로시난테 한 마리 잡아서 송별회해.”
“어린 집사가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몰래 잡아.”
검술훈련 명목으로 한 시간쯤 잡아둘 수 있으니 그 틈에 발 빠른 기동대로 목장을 습격하면 될 것이다. 전쟁과 전술의 대가들답게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이제 끝난 거지?”
“예. 저녁 식사를 준비할까요?”
“아직 이르잖아. 잠깐 나갔다 올게.”
로벨은 벽에 걸어둔 소드 벨트를 허리에 묶고 흐룬팅과 아론다이트를 잡았다. 로벨을 오래 모신 펄프 대장은 말없이 자리를 피했다. 용병을 부르거나 말을 준비하지 않았다. 후자의 경우는 ‘못’하는 것이었다.
로벨은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조용히 아성을 빠져나왔다. 눈 쌓인 안마당을 지나 근무 중인 초병과 인사하고 밀짚더미에 둘러싸인 마구간에 들어갔다. 주인의 냄새를 맡은 모닝스타가 반갑게 머리를 내밀었다.
“푸히히히힝-! 푸히잉-!”
“쉿! 쉿!”
로벨은 조용하라는 제스처를 취하고 마구(馬具)를 꺼냈다. 고삐를 채우고, 등자를 끼우고, 안장을 얹어서 단단히 쪼였다. 기사 종자나 시종이 할 일을 20년 넘게 혼자 했다. 그래서 빠르고 정확했다.
“한 바퀴 돌고 오자.”
“푸릉-!”
‘조랑말’을 비롯한 전투마들이 부러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워낙 활동적인 동물이라 퀴퀴한 축사에 갇혀있는 게 괴로웠다.
“너희 주인을 불러줄게.”
말을 알아듣는지 몇몇 말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닝스타가 쟤네 신경 쓰지 말고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기사와 기사의 말이 하얀 세상으로 나왔다.
“공왕 폐하, 산책 가십니까?”
“순시야. 순시라고.”
성 문지기가 낄낄 웃으며 ‘어린 집사에게는 그리 말하겠습니다!’ 외쳤다. 훌륭한 군 기강이었다.
늑대성 언덕길은 가늘고 가파르지만, 모닝스타의 억센 발을 붙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로벨은 안장에 편히 앉아서 성 아래 풍경을 감상했다.
“옛날에는 저기가 공유지였어. 농민들을 불러서 사흘에 한 번씩 쟁기질했지.”
지금은 2~3층짜리 목조 빌라가 늘어섰다. 시내에 집을 구하지 못한 가난한 상인과 부상으로 은퇴한 용병이 지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집세 내는 사용인이 반갑게 인사했다.
“어, 어어? 저 말은...?”
“공왕 폐하! 안녕하십니까요?”
검은 갈기의 늠름한 백마와 젊고 잘생긴 기사 왕은 인기가 많았다. 로벨은-그리고 모닝스타도-시민들의 인사를 받으며 남문을 지났다. 눈치 없이 어디 가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은 로벨의 고향이었다.
“그쪽이 아니야.”
로벨은 남쪽으로 가는 모닝스타의 목덜미를 두드려 방향을 바꿨다. 영리한 말이라 금방 알아들었다.
작년 가을에 밀을 수확한 휴경지와 올봄에 보리를 파종할 춘경지 사이에 이정표처럼 자리한 느티나무가 있었다. 농경지를 확장하면서 몇 번이나 뽑으려 했지만, 한 번은 전쟁으로, 한 번은 가뭄으로, 한 번은 농마가 병이 나서 그냥 포기한 나무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두기를 참 잘했다. 농사일에 지친 농부들이 땀을 식히고, 먼 곳에서 온 여행자가 숨 돌리기 좋았다. 지금처럼 말이다.
“공왕 폐하.”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고삐를 말아 쥐었다. 로벨의 신분상 굳이 하마(下馬)할 필요 없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호른 경.”
입꼬리가 올라가고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호른 경이 늙은 말을 내버려두고 한 걸음 다가왔다. 로벨도 두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봄기운이 가득한 햇살 때문일까, 느티나무의 산뜻한 향기 때문일까, 이 순간이 너무 좋았다. 호른 경이 무릎을 꿇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나의 왕을 뵈어 영광입니다.”
로벨은 호른 경을 일으켰다. 충성에 답례할 차례였다. 기사의 목덜미를 감싸고 끌어당겼다. 입술에 닿은 입술이 따뜻했다.
“나의 기사를 만나 기쁘오.”
아름다운 초봄에 아름다운 오후였다.
모닝스타의 얼굴이 백 년 묵은 마녀처럼 썩어가는 것만 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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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중반. 그것도 거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근육질 기사들이 이상하게 수줍음이 많았다.
“저, 못 본 사이에... 음... 아닙니다.”
“그러는 경도... 으음... 아무것도 아니오.”
한 명은 성(性)을 숨겨왔고, 한 명은 이상형을 속여왔다. 즉, 연애경험이 부족했다. 한 명의 이성(異姓)을 대하는 것보다 백 명의 적과 싸우는 것이 익숙한 작자들이었다.
춘경지를 한 바퀴 돌고, 추경지를 두 바퀴 돌고, 아쉬운 마음에 수도원이 있는 목초지로 발을 옮겼다. 말(馬)이 있어도 타지 않고, 말(言)이 없어도 그냥 좋았다.
“여름이 오면 꽃을 심을 것이오.”
“이곳에 말입니까?”
“리암 수사와 수도원 아이들이 관리하니 아주 멋질 것이오.”
양봉업을 위해 꾸역꾸역 심는 거지만, 낭만으로 무시했다.
“어린 소를 냇가에 풀고, 그 사이 어미 소를 배불리 먹일 것이오.”
“한낱 짐승에게도 자상하시군요.”
어린 소가 없는 틈에 어미 소를 도축할 예정이지만, 집안일이라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이른 봄이라 해가 짧았다. 몇 분 안 된 거 같은데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모닝스타가 지쳐서 헐떡이는 것이 이상할 뿐이다. 청춘 기사들은 목초지 언덕 꼭대기에서 멈춰 섰다. 연애경험이 부족해도 본능적인 감은 있었다. 오늘이 끝나기 전에 내일을 기약해야 했다.
“공왕 폐하, 시간이 되면 자작나무 숲에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경의 고향 말이오?”
“지난번 초대에는 미흡한 것이 많았으니... 폐하께서 괜찮으시면...”
그게 뭐 어려운 청이라고 목소리를 떨었다. 로벨은 평소처럼 덤덤하게 대답했다.
“어린 집사와 상의해서 일정을 잡겠소.”
“아니요! 아닙니다! 폐하 혼자 오셨으면 합니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입 밖으로 꺼내니까 이상했다. 그러나 다행히 상대가 로벨 로드릭이었다.
“본인이 이래 봬도 왕이라 혼자 다니기가 곤란하오. 혹시 비밀로 해야 할 이유가 있소?”
호른 경은 자신보다 더 한, 그래서 더 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운 왕을 설득했다.
“그, 그것이... 그러니까... 폐하와 단둘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로벨의 부족한 연애감각이 깨어났다.
“아, 앗? 그런 것이오? 그건, 뭐, 음, 그렇지만...”
짙어지는 노을 때문일까,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단둘이 있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소.”
그 말은 진짜였다. 겨울 추위가 가시지 않은 황량한 목초지조차 단둘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손톱 같은 노을 아래 그림자가 드리웠다. 로벨은 낯선 이의 등장에 눈살을 찌푸렸다.
-로벨 로드릭... 새로운 마도의 왕...
호른 경은 목소리에 한 번 놀라고, 그림자에 한 번 더 놀랐다. 성대를 걸쳐 나오는 평범한 울림이 아니었다. 수천, 수만 명의 비명을 모아 단어 비슷하게 만든 ‘무언가’였다. 그 이유는 그림자로 알 수 있었다.
“머, 머리가...!”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정확히는 엉뚱한 곳에 있었다. 호른 경은 발작하듯 워 해머를 뽑았다. “괴물!” 그 괴물은 로벨과 구면이었다.
“죽음의 전령, 안개의 정령, 머리 없는 기사...”
조만간 찾아올 거라 들었지만, 그것이 지금일 줄은 몰랐다.
“...듀라한.”
이름값 못하는 친구 말대로 특정 호칭을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말안장에서 칼을 뽑아 다짜고짜 달려왔다. 로벨은 흐룬팅을 뽑아 몸을 낮췄다. 호른 경이 소리치고, 모닝스타가 울부짖었다. 그리고 기사의 칼이 비명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