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68화 (468/605)

468화. 기억

외형은 특이해도 내부는 평범한 성이었다.

강물을 끌어온 해자를 건너 성 안마당에 들어가자 리히터 가문의 부인과 딸이 뾰족한 애냉을 위협적으로 숙이며 인사했다.

“포클랜드의 후작을 뵙습니다.”

‘볼탄 반도 공왕’이 아니라 ‘포클랜드 후작’이었다. 아들을 죽이고 차지한 왕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에드가 리히터 경이 이겼으면 로벨은 왕이 되지 못했을 테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덤비지 않았으면 됐잖아?’

로벨은 당당하게 인사를 받았다. 정당한 승자는 패자의 원망을 무서워할 필요 없었다. 세 갈래 강 기사도 그리 생각했다.

“부인, 그만 물러가시오.”

리히터 백작이 말을 몰아 로벨과 부인 사이를 막았다. 표정을 보아 부인의 독단적인 행동인 모양이다. 리히터 부인이 표독스럽게 대꾸했다.

“리히터 가문의 안주인으로 손님을 맞이한 것뿐이에요.”

“그럴 필요 없소. 기사들의 일이고, 사내들의 일이오. 조지 경, 부인을 안채로 모셔라.”

조지 볼메른 경이 부인과 딸을 잡아끌었다. 부인이 거칠게 팔을 휘둘렀지만 챔피언의 힘을 당하지 못했다. 그러나 혀까지 막지 못했다.

“이 천박한 사생아가! 감히 누구를 건드리는 것이냐! 놔라! 놓으란 말이다!”

리히터 백작의 표정이 무시무시해졌다. 철없는 아내 탓에 집안의 치부가 드러났다.

‘양자가 아니라 서자구나.’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은 했기에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어색한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리히터 백작이 헛기침을 섞어 정중히 말했다.

“크흠! 조촐하게 연회를 준비했습니다. 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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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부터 천장까지 화강암으로 만든 아성이었다.

이러한 아성은 화재와 공성병기에 강해 전시에 안정감을 주지만, 한기와 습기를 막지 못해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꿉꿉했다.

“이거 참...”

그러나 그 때문에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늑대성도 비슷해서 창틈으로 몰아치는 외풍이나 천장에서 떨어지는 눈 녹은 물은 익숙했다. 그저 80여 명이 모인 자리에 쥐죽은 듯한 침묵이 익숙지 않을 뿐이었다.

리히터 백작이 손바닥만한 칼로 사슴 뒷다리를 썰었다. 칼날이 잘 안 드는지 여러 번 내리찍었다.

“허 참. 아들놈이 하던 일이라 쉽지 않군요.”

자꾸 죽은 아들을 거론하는 것도 불편했다. 로벨은 각자 음식을 담아가는 네일 공국식 연회가 그리웠다.

“후우, 이제 됐다. 공왕 폐하께 가져다 드려라.”

지성이면 감천일까, 마침내 다리 한 짝을 떼어 내는데 성공했다. 시종이 커다란 쟁반으로 사슴 다리를 받아 로벨 앞에 대령했다. 지금 속도면 80명에게 분배하는데 한나절이 걸릴 듯했다.

“나머지는 알아서 나눠 주어라.”

다행히 융통성이 있었다. 공왕에게는 예의를 지켜 가장 크고 맛있는 부위를 직접 썰어 대접하고, 나머지는 주방장에게 맡겼다. 마녀와 용병들 얼굴이 밝아졌다.

오래된 돌 냄새에서 고기냄새와 술 냄새가 스며들자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크게 웃거나 노래 부르지는 않았지만, 옆 사람과 도란도란 이야기하거나 고기 맛을 품평할 정도는 되었다.

리히터 백작은 맞은편에 앉은 로벨에게 술잔을 보이고 단숨에 비웠다. 겨우내 얼리고 녹이기를 반복한 잭킹(Jacking) 와인이었다.

“볼탄 반도의 왕께서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휘하의 항해사가 방위를 잘못 읽어 흘러왔다 말하기는 좀 부끄러웠다.

“세 갈래 강의 겨울 풍경이 아름답다 하여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렸소.”

리히터 백작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술잔을 채우면서 머리를 굴렸다.

‘야심 많은 무적무패 공왕이 이유 없이 왔다고?’

당사자는 억울하지만, 무적무패의 대외 이미지가 그러했다. 이후 백작과 백작의 기사들은 로벨의 속내를 떠보기 위해 계속 말을 걸었으나 없는 것을 만들어 보일 수 없었다. 그때, 허풍쟁이가 이름값을 하였다.

“그으럼! 그으럼요! 우리 폐하께서 문어 괴물을 쫙! 쫘악-! 찢어 죽이셨습니다요! 왜냐고요? 왜? 우리 폐하는 최강이니까!”

허풍쟁이가 허풍쟁이인 것을 모르는 세 갈래 강 기사와 용병이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크라켄은 덩치가 성보다 큰 괴물인데 어찌 찢을 수 있소?”

허풍쟁이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우리 무적무패 폐하를 의심하는 겁니까요?”

“그, 그럴 리가? 믿소이다! 아, 믿는다니까?”

소신 있는 기사가 ‘무적무패 왕이 아니라 네놈이 의심스럽다!’ 소리쳤지만, 지혜로운 기사와 호기심 많은 용병 손에 강제로 끌려나갔다. 공왕의 수행원 중 이자만큼 입이 싼 자가 없었다. 아무튼 정보가 필요했다.

“그런데 공왕께서 크라켄을 왜 사냥한 것이오? 무명(武名)이라면 이미 차고 넘칠 텐데?”

허풍쟁이는 트림을 하고 빈 잔을 내밀었다. 기사 종자가 재빨리 술을 채워주었다. 옛날 같으면 쳐다보지도 못했을 높은 양반이 정중히 질문하는 게 기분 좋았다.

“그거야, 당연히, 그 뭐냐, 어라, 이거 말해도 되나?”

허풍을 칠 때 중요한 것은 분위기였다. 목소리를 깔고 뜸을 들이자 기사들 상체가 앞으로 끌려왔다.

“남쪽 나라가 전쟁 중 아닙니까요.”

“모나카 왕국 말인가?”

“알베니아 왕국 말입니다요. 아, 모나카 왕국이랑 싸우고 있지... 아무튼, 그쪽으로 가려고 길을 연 것입죠.”

기사들이 눈을 빛냈다.

“거기 가서 무엇을 하려고? 동맹이라도 맺은 건가?”

“우리 폐하는 이미 무적인데, 그런 게 왜 필요합니까요? 그냥 뭐, 먹을 거 좀 주려고 갔습니다요.”

나이 많은 기사가 시종에게 눈짓했다. 시종은 하인 몇 명을 성 밖에 내보내고, 리히터 백작을 찾아가 속삭였다. 오해가 시작되었다.

‘그럼 그렇지. 세 갈래 강의 곡식을 매입하러 왔군.’

리히터 백작은 별일 아니란 듯 술잔을 비우고 껄껄 웃었다. 그러나 심장은 차갑고 사나웠다.

‘공왕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오. 내 땅에서 난 것은 밀알 한 톨 내어주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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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이 저녁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공짜여행 호에서 골골거릴 무렵, 앵글 시티 시장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오늘 시장에 가 보았소? 보리값이 세 배로 올랐소이다.”

“엥? 갑자기?”

“그러니까 말이오. 리히터 백작이 시장에 나온 곡식을 전부 사들였다고 하오.”

“가을에 걷은 밀이 아직 충분할 텐데, 대체 무슨 일로... 호, 혹시...?”

곡식은 장기보관이 어려운 소비품이다. 여윳돈이 있다고 창고 가득히 쌓아두지 않았다. 그런 곡식을 대량으로 사들이는 경우는 하나뿐이었다.

“저, 전쟁인가?!”

“그거 말고 이유가 없지.”

“그런데 누구랑 싸우는가?”

“새로운 후계자-조지 볼메른 경 때문에 고드만 가문하고 사이가 안 좋잖은가.”

조지 볼메른 ‘고드만’ 폰 리히터 경. 이름으로 알 수 있듯 고드만 가문 핏줄이었다. 딱히 출생의 비밀이라 할 것도 없었다. 혈기 넘치는 젊은 기사와 위험한 사랑에 빠진 귀부인의 흔하디흔한 이야기였다.

“조지 경이 백작이 되면, 고드만 가문의 정통성까지 가질 수 있으니까.”

“그게 아니어도 고드만 가문의 치부 아닌가. 고드만 백작 입장에서 부인이 간통하여 낳은 자식이 달갑겠는가.”

오해가 오해를 불러 더 큰 오해가 되었다. 어린 집사가 말한 ‘복잡한 출신’이 문제였다. 아니, 사실은 상황을 설명하지 않은 로벨이 문제였다.

“볼탄 반도의 왕이 군사를 이끌고 온 것이...”

“그, 그렇군! 조지 경이 무적무패 왕과 손잡은 것이야!”

“맙소사! 그럼 진짜 전쟁이잖아!”

리히터 백작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무적무패 왕과 동맹을 맺었다. 어쩐지 밤새 축배를 들더라. 조지 볼메른 경이 후계자가 된 것은 무적무패 왕 때문이니까. 두 사람은 오랜 친구 사이야. 왕이 도시에 와서 몰래 만났어! 내가 부두에서 봤어!

로벨은 선교 난간에 기대어서 바다를 보았다. 방파제를 힘겹게 넘은 파도가 선현을 두드렸다. 수천 파운드의 갤리를 흔들기에 너무나 미약했다. 거품 한 줌 뿌리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 시선을 위로 올리자 끼룩끼룩 소리 내는 갈매기 무리가 보였다. 부두 한 켠에 쌓인 생선 찌꺼기로 만족하지 못해 어부의 일당을 호시탐탐 노렸다. 아침 해가 찬란히 떠올라 하늘과 땅과 바다를 비추었다. 숙취가 아니어도 멋진 일출이었다.

“일몰이에요.”

“응?”

“하루 종일 주무셨어요.”

로벨은 도시 방향으로 서서 왼팔을 들었다. 해가 비추는 방향이었다.

“...그렇네.”

마녀 키르케가 비스겟 담긴 주머니와 수통을 내밀었다. 배고플까 봐 챙겨온 모양이다. 고맙긴 한데 입맛이 없었다.

“빵 없어? 꿀 바른 걸로.”

“꿀은 있는데, 빵이 없어요.”

“왜? 여긴 도시잖아.”

“그러게 말이에요. 이상한 일이죠.”

리히터 백작이 매점매석해도 시민이 먹을 빵까지 사들이진 않았다. 이것은 전쟁 소문이 돌면서 곡물 상회가 식량을 꼭꼭 숨긴 탓이다.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로벨은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다.

“이 동네는 이상하다니까.”

“먹을 것을 미리 사서 다행이에요. 조금 있다가 생선 스튜 해드릴게요.”

“정어리?”

“고등어요.”

로벨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비스켓을 씹었다. 갈매기가 극성이라 오래 나와 있지 못했다.

“그거 먹고 집에 가자. 백작 가문도 눈치 주고, 갈매기도 눈치 줘서 오래 못 있겠어.”

앵글 시티의 전쟁 소식이 누아르 강 저지대에 위치한 고드만 가문에 전해지고, 무적무패 왕에 겁먹은 고드만 백작이 앞뒤 재지 않고 징집령을 내리고, 거기에 다시 놀란 리히터 가문이 휘하 기사들을 소집하고, 봄꽃이 필 무렵 기어이 한판 붙게 되는데, 300마일 떨어진 볼탄 반도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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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여행 호는 먼바다를 돌고 돌아 로드릭 항에 들어왔다.

왕의 깃발을 알아본 어부가 바삐 연락해서 호른 가문 사람들이 마중나왔다. 로벨은 기뻐하는 호른 성 사람들을 보고 함께 기뻐했다.

“역시 경은 인기가 많소.”

“폐하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호른 경이 피곤한 얼굴로 답했다. 최근 며칠 동안 이상하게 서먹서먹했는데, 고향에 와서 기분이 풀린 듯했다.

기분이 좋은 것은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제2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로드릭 령(領)에 도착해 다들 들떴다. 얼마나 좋은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짐을 싸서 내릴 준비했다.

“저기, 폐하?”

“응? 말하시오.”

호른 경은 지난 며칠간 고민하고 또 고민한 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약은 짓이었다. 이제 집에 왔으니 잘못되어도 도망갈 수 있었다.

“크레타 시티에서 술에 취한 날... 그날 일을... 기억하십니까?”

호른 경은 저지른 후 눈을 감았다. 기대하지 않았다. 술김에 한 말이라 잊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지금의 로벨을 보면 분명 잊었을 것이다. 평소처럼 무뚝뚝하고, 평소처럼 호른 경이라 부르는데, 기억할 리가...

“기억하오.”

“예. 그렇군요.”

호른 경은 반사적으로 대답한 후 당황했다.

“뭐, 뭐라고 하셨습니까?”

로벨은 몸을 돌려 호른 경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겨울바람이 차가웠다. 그러나 불 가에 앉은 것처럼 얼굴이 화끈했다. 아름다운 꽃도, 반짝이는 별도, 감미로운 음악도 없지만, 포근한 분위기가 있었다.

“경을 좋아하오. 그리 말한 것을 기억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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