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67화 (467/605)

467화. 삼각성

푸른고래 호 이하 볼탄 반도 함대는 다시 남쪽으로 출항했다.

예정보다 스무날 가까이 늦은 데다 크라켄 처치 소식을 접한 상인들이 야비하게 먼저 출항하여 서둘러야 했다. 호른 경의 제안이 옳았을지 모른다.

로벨과 로벨을 따라온 일행은 한나절 늦게 공짜여행 호에 올랐다. 바람과 파도의 나라는 질렸다. 숲과 구릉의 나라 늑대성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으... 머리야...”

귀향길이지만 이름처럼 포근하지 않았다. 밤새워 마신 ‘생명의 물’ 탓에 여기저기 구울이 가득했다. 그중 무적무패 구울이 생기발랄한 마녀에게 물었다.

“키르케는 괜찮아?”

“저요? 아주 멀쩡해요! 포도주보다 훨씬 좋은 걸요?”

마틴 총독은 숙취가 없는 것이 증류주의 장점이라고 추가 설명했다. 로벨을 보면 그냥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 듯 하지만...

“폐, 폐하?! 아, 안녕하십니까!”

“호른 경, 푹 쉬었소?”

또 다른 케이스가 나타났다. 호른 경은 선교에 기대앉은 로벨을 보고 도망치듯 선실로 들어갔다. 술이 잘 안 깨는 케이스인지 얼굴이 붉고 여러 번 비틀거렸다.

“정말 신기한 술이야. 사람마다 뒤끝이 다르구나.”

“...저 경우는 아닌 거 같은데요.”

찬바람이 부는 시기라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힘들었다. 서쪽으로 한참 더 가서 남방해류를 타는 방법과 갑판원을 밤낮으로 굴려서 지그재그로 항해하는 방법과 노잡이를 여럿 갈아치울 각오로 채찍질하는 방법이 있는데, 여러 조언을 받아 첫 번째를 택했다. 폭풍의 위협도 없고, 급하지도 않은데, 선원을 혹사시키고 싶지 않았다.

“어린 집사는 애가 타겠지만요.”

“항상 걱정이 많으니까.”

“맞아요. 맞아. 나중에 탈모 올 거예요.”

“원형탈모야. 장담해.”

로벨과 마녀는 오랜 벗의 정수리를 여러 사이즈로 벗기며 키득거렸다. 어린 집사보다 리암 수사가 화를 낼 것 같지만, 둘 다 이곳에 없었다.

춥고 눅눅하지만, 그래도 평화로운 항해였다. 햇살이 좋을 때는 상부갑판에 옹기종기 모여 이를 잡고, 바람이 쌀쌀하면 아껴둔 술을 꺼내 한 모금씩 돌려 마시고, 밤이 깊어 할 일이 없으면 10로닝 은화로 카드게임을 했다.

술이 바닥나도 기분 좋게 껄껄 웃고, 주머니가 텅 비어도 아쉬운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늑대성에 도착하면 밀린 급료에 각종 수당을 더해서 봄까지 흥청망청 놀 생각이었다. 모두가 행복했다. 항로가 잘못되었다는 소리가 나오기 전까지 말이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호른 경이 나직이 화를 내었다. 집에 갈 생각에 들뜬 용병이 알아서 좋을 것 없었다. 입이 가벼운 사동이 벌써 소문을 냈지만 말이다.

‘공짜여행 호’ 선장이 모자를 벗고 공손히 조아렸다.

“제 불찰입니다.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선장이 직접 잘못한 것은 아니다. 지인을 통해 도제(徒弟)로 받은 이등항해사에게 야간 당직을 맡겼는데, 늘상 다니던 항로가 아니라 그런지 방위를 잘못 읽었다. 어린 항해사에게 일을 맡기고 확인을 게을리 한 책임은 있었다. 로벨은 책망에 앞서 상황을 파악했다.

“그래서 여기가 어디야?”

선장은 미리 펼쳐놓은 해도로 설명했다.

“이곳에서 방향을 잘못 잡아, 이곳으로, 북북서로 이틀간 이동했습니다. 이대로 계속 가면 포클랜드 서쪽... 그러니까 세 갈래 강 지방에 도착합니다.”

호른 경이 다시 으르렁거렸다.

“세 갈래 강? 어이가 없군. 무슨 짓을 해야 30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흘러올 수 있지?”

그냥 사고 쳐도 큰일인데, 공왕 일행을 태우고 사고 쳤으니 입이 열두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로벨은 해안선 말고 익숙한 것이 없는 해도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소란 피우지 마시오. 사나흘 정도 일정이 늘어난 것뿐이잖소?”

선장의 송구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돌아가는 시간도 있으니, 저, 엿새 정도 늦어질 겁니다.”

“...사흘이나 엿새나...”

“그리고 그때쯤이면 식수가 바닥나니, 가까운 항구에서 보급해야 합니다.”

로벨의 이마에 계곡이 세 갈래 생겼다. 이제 좀 화가 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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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왕국 시절에 사라진 ‘민주주의’가 아직 작동하는 곳이 있으니, 바로 해적과 용병이다.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다. 다수가 동의하면 대표를 ‘해임’할 수 있는데, 상어밥, 물고기밥, 들짐승밥 등으로 치환해도 어색하지 않은 용어였다.

물론, 공짜여행 호의 선원은 해적이 아니고, 울프 용병단은 어중이떠중이 집합이 아니다. 그러나 능력이 의심되면 직위가 위태로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선장은 필사적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설득해야 했다.

“세 갈래 강에 머물러야 한다는 거잖수?”

“거기가 어디야?”

“넌 용병이란 놈이... 아, 잉그비아 왕국 출신이랬나?”

세 갈래 강은 포클랜드 북서쪽 하얀 숲에서 저지대를 지나 인어해로 통하는 론 강과 누아르 강 하류지역을 가리킨다. 영토는 볼탄 반도의 1/5밖에 안 되지만, 포클랜드에서 손꼽히는 곡창지대로 부유한 도시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곳이...

“앵글 시티입니다.”

제방을 쌓아 올린 부둣가에 거대한 배가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외해에서 들어온 큼직한 범선도 있고, 근해를 떠도는 얄팍한 갤리선도 있고, 거함 사이를 누비는 돛대 하나짜리 조각배도 있었다.

부두를 지나면 더욱 화려했다. 강줄기를 따라 4~5층짜리 건물이 늘어서 있고, 그 사이사이로 흐르는 운하에는 꽁꽁 싸맨 곤돌라가 떠다녔다. 시가지 너머로 교회의 종이 크고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댕- 댕- 대애앵- 강가의 생선을 노리는 갈매기가 푸드드득- 소리 내며 날아올랐다. 강과 호수의 나라란 소개가 딱 맞았다.

‘강과 호수? 누구한테 들은 말이더라?’

호른 경이 나직이 말했다.

“리히터 가문이 다스리는 땅입니다.”

“리히터... 리히터...”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기억을 더듬어서 간신히 떠올렸다.

“에드가 리히터 경?”

겨울성에서 로벨과 호른 경이 사살한 기사였다.

“조용히 보급만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전쟁 중에 일어나 일이라 해도 친아들, 그것도 가문을 이을 장남을 해친 로벨 일당을 곱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로벨 로드릭 공작!”

그러나 이번 항해는 시작부터 끝까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땅을 딛자마자 아는 사람이 나타났다.

“이제 공왕이신가? 여기서 그랜드 챔피언을 보게 될 줄이야! 혹시 본인을 만나러 왔소?”

오늘은 전두엽이 혹사하는 날이다. 로벨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떠올렸다.

“조지... 볼메른 경?”

그랜드 토너먼트 1차전에서 겨룬 세 갈래 강 챔피언이었다. 기사를 정중히 대하는 로벨이지만 지금은 좀 난감했다.

“경을 만나러 온 것은 아니오. 물론 다시 보니 반갑소만...”

“으하하핫! 농담! 농담이오! 볼탄 반도의 왕 자리가 그리 한가한 자리는 아닐 테지!”

한가해 죽을 것 같아도 마상시합 한 번 치른 상대를 굳이 만나러 올 일은 없었다. 호른 경이 불쾌한 티를 내며 말했다.

“경, 폐하께 예의를 갖추시오.”

로벨에게 충성하는 볼탄 반도 기사가 아니라 해도, 일국의 왕이면 마땅히 존중 받아야 했다. 조지 볼메른 경도 그걸 깨닫고 모자를 벗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군. 실례했소. 아니, 실례했습니다, 공왕 폐하.”

조지 경은 생긴 것과 달리 상식이 있는 기사였다. 호른 경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로벨은 선장과 겁쟁이에게 눈짓해서 보급품을 실어오라 명령하고 조지 볼메른 경을 상대했다. 일찍 보내면 리히터 가문 귀에 소식이 들어 갈 테니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였다.

“공왕 폐하를 뵈어 진실로 기쁘지만, 가문의 사정으로 예전처럼 환영할 수 없으니 매우 안타깝습니다.”

“사정? 볼메른 가문의 우환이 있소?”

조지 볼메른 경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 모르시는군요. 아니, 당연한 건가?”

조지 볼메른 경은 습관적으로 옷매를 고치고 자신을 소개했다.

“조지 볼메른 고드만 폰 리히터라고 합니다. 전사한 에드가 리히터 경을 대신해 리히터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어린 집사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들을 걸 그랬다. ‘나를 만나러 왔냐’는 농담이 근본 없는 농담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은인이나 가문의 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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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가 이미 까발려졌으니 구태여 숨거나 피할 필요가 없어졌다.

볼탄 반도의 왕이자 포비아 왕국의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이 방문했다는 소문이 도시에 퍼졌다. 이렇게 되면 도시의 주인 입장에서 초대를 안 할 수 없었다. 리히터 가문의 시종이 공짜여행 호로 초대장을 가져왔다. 정말 배 이름을 잘 지었다.

“일이 커지는군요.”

초대장은 정갈하고 질박했다. 좋은 술이 있으니 한 잔 대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밤에 몰래 떠나는 게 어떨 깝쇼?”

허풍쟁이가 묘안이지 않냐는 듯 말했다. 이쪽 세계를 잘 모르고 한 말이다.

“그랬다가는 공식적인 원수가 될 거야.”

“이미 원수가 아닙니까요?”

“공개적으론 아니야. 전쟁과 결투로 죽은 것은 원한이 될 수 없으니까.”

자식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의 습성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힘들었다. 기사인 호른 경이 제대로 된 대안을 내놓았다.

“출항준비를 마친 후 호위 병력을 대동해 찾아가시지요.”

“무례하지 않겠소?”

“왕의 행차입니다. 수행원이 많은 것은 양해해야지요.”

그리고 왕의 위세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애꾸눈이 골라 선발한 크로스보우맨 20명과 핸드 캐논을 소지한 사수-부사수 20명과 수행기사로 완전무장한 호른 경과 신비로운 마녀 복장에 아쿼버스를 숨긴 키르케를 대동했다. 그리고 로벨은 모닝스타를 닮은 백마를 빌려 하얀 마의(馬衣)를 입히고 올라탔다.

“와! 멋있어요! 정말 왕 같아요!”

왕관을 쓰고, 망토를 두르고, 손잡이가 화려한 흐룬팅을 빗겨차니 늑대성에서 알현 받을 때처럼 화려했다. 한 가지 흠은 알루미늄 왕관이 아니란 것이다.

“어린 집사가 못 가져가게 하니까.”

알루미늄은 소중하기 때문에 싸구려 금관을 가져왔다. 그것도 사실 도금이었다. 늑대성 식구만 아는 작은 비밀이다.

로벨은 묵직한 왕관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출발하자.”

“깃발을 올려라! 성으로 간다!”

로벨 일행은 최대한 요란을 떨며 리히터 가문의 삼각성으로 출발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방문하면 음해하기 힘들 것이다.

시민과 상인이 우르르 몰려와 왕과 왕의 군사를 구경했다. 본의 아니게 대로를 점령했지만 위세에 눌려 아무도 항의하지 않았다. 시티 가드조차 멀찍이 떨어져 손가락을 빨았다. 조그맣게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랜드 챔피언’, ‘무적무패’, ‘어려 보이는’, ‘왕의 후계자’ 등등. 좋은 소리도 있고, 나쁜 소리도 있고, 의심과 불신도 있었다. 마녀 키르케가 잡소리를 걷어냈다.

“이름이 왜 삼각성(Triangle)이에요?”

로벨은 턱을 괴고 말했다.

“세 갈래 강과 앵글 시티를 상징하니까?”

그럴듯한 추리지만 아니었다. 리히터 백작 가문의 성은 진짜 삼각형이었다.

“...신기한 구조야.”

론 강이 갈라지는 삼각지에 꼭짓점을 두고 강물을 천연 해자로 삼은 성이었다. 로벨은 군사적 관점에서 삼각성을 분석했다. 세 개의 강 중 하나라 강폭이 넓지는 않지만, 성벽 위에서 쏘아댈 화살과 포탄을 피해 사다리를 놓기는 어려웠다.

“폐하, 성문이 열렸습니다.”

군사적인 것은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리히터 가문의 주인이 기사 셋과 용병 스물을 거느리고 나왔다. 묘하게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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