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66화 (466/605)

466화. 알코올

수면이 부글부글 끌어 올랐다.

커다란 물거품이 한 번 솟구치고, 이어서 작은 거품이 쉼 없이 올라왔다. 크라켄의 것으로 보이는 파란 피가 아니었으면 여러 사람 뛰어내렸을 것이다.

“빨리 감아라! 더 빨리!”

호른 경의 재촉에 선원 넷이 추가로 달라붙어 캡스턴(Capstan:닻줄을 감는 장치)을 돌렸다. 드르륵- 드르륵- 무쇠로 된 닻이 아니라 가볍게 끌려왔다. 그러나 1초가 1분 같은 호른 경과 마녀 키르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보, 보인다! 머리통이 보인다!”

“공왕 폐하의 머리통을 머리통이라니!”

“호른 나으리도 지금 머리통이라고...”

“시끄럽다! 모포! 모포를 가져와라! 싹 다 가져와!”

험한 말과 심한 말 사이로 웃음이 비쳤다. 정신 나간 왕이 무사했다.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폐하!”

호른 경이 상체를 내밀어 로벨의 팔을 잡았다. 캡스턴을 계속 감으면 알아서 상부갑판까지 올라올 텐데 괜히 마음이 급했다. 로벨은 자루만 남은 바바 야가의 창을 등에 돌려 매고 호른 경의 팔을 잡았다.

여기서 번쩍 당겨 갑판에 올려주면 그림이 되었을 텐데, 그냥 잡고만 있었다. 기사가 아무리 힘이 좋아도 갑옷 입은-그것도 홀딱 젖은- 사람을 한 팔로 끌어올리기는 힘들었다. 결국 닻줄이 끝까지 감겨서 사뿐히 난간을 밟고 내려왔다.

“어, 음, 고맙소.”

“...공왕 폐하!”

호른 경은 선원이 가져온 담요를 닥치는 대로 펼쳐 로벨을 칭칭 감았다. 머리에 하나, 어깨에 하나, 허리에 하나, 이런! 흘러내리잖아? 발치에 쌓아올리자! 과한 배려는 아니었다. 겨울 바다에서 건져낸 사람을 대하는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로벨은 적당히 하라고 말리다가 포기하고 주위를 살폈다. 볼탄 반도 함대를 괴롭히는 거대 다리들이 하나둘 물속에 잠기고 있었다. 이안 선장이 환희에 차서 물었다.

“크라켄을! 크라켄을 해치운 겁니까?”

로벨은 목까지 쌓인 담요를 치우고 자루만 남은 바바 야가의 창을 살폈다.

전쟁에 화약이 사용된 지 100년이 지났지만, 수중에서 폭파한 것은 아마 처음일 것이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일이라 여러모로 대단했다. 크라켄의 눈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수압이 거체를 밀어냈다. 로벨 역시 반대쪽으로 튕겨나갔다. 강철로 된 흉갑과 마도에 물든 몸뚱이가 아니었으면 내장이 터지거나 의식을 잃었을 것이다.

“죽지는 않았지만... 덤비지도 않을 거야.”

크라켄은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직접적인 상해 외에도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가 싸울 의지를 꺾었다. 북해로, 혹은 인지의 세계 너머로 조용히 떠나길 바랬다.

“그럼, 그럼 승리한 것입니까?”

“아직 아니야.”

로벨은 창 자루로 바다 한 곳을 가리켰다. 사물에게 붙이기 어색한 수식어지만, 뻘쭘한 유령선 ‘플라잉 더치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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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탄이 사방으로 날아들고 거대 문어발이 파도를 두드린 것이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가까이서 보면 갑판장의 욕설과 부상자의 신음과 구멍난 곳을 메우는 연장질 소리가 가득하지만, 바다 전체를 보면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돌격해.”

로벨의 명령이 침묵을 깨트렸다. 이안 선장이 눈썹을 살짝 내렸다.

“저건 유령선입니다.”

“그래서?”

크라켄 때문에 간이 작아진 모양이다. ‘신비’를 대적하는데 망설임이 생겼다.

“크라켄을 쫓아냈으니, 저것도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크라켄이 회복되면 다시 나타날지도 몰라.”

조금 전 싸움을 다시 하라면 자신이 없었다. 이안 선장은 한숨을 애써 삼켰다. 선장이 자신감을 보이지 않으면 선원은 따르지 않았다.

“조타수! 남남서로 15도! 노예장! 신호에 맞춰 미속 전진하라! 손이 남은 선원은 갑판을 치우고 각자 위치에서 전투준비해라! 목표는 ‘해적선’ 플라잉 더치맨 호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지칭에 야유가 나왔지만 금방 잦아들었다. 평소 존경까진 아니어도 존중해온 선장을 믿고, 무적무패가 거짓이 아닌 선주를 믿었다.

기함이 방향을 정하자 함대의 전함이 모두 따랐다. 상어, 인어, 사자, 독수리, 천사 등등의 선수상이 한 곳을 향해 움직였다. 이것도 대단한 광경이었다. 북해에서 온 1척의 갤리선이 볼탄 반도의 7척 전함을 맞상대...

“...할 리가 있겠냐!”

플라잉 더치맨이 급히 방향을 전환했다. 포어, 메인, 미즌마스트의 돛을 모조리 풀고 바람을 최대한 끌어안았다. 부실한 가속도는 한 번 죽은 노잡이를 때려서 채웠다.

“저거, 저거 도망가는뎁쇼?”

허풍쟁이가 다 아는 상황을 굳이 설명했다. 바다의 악몽을 상대할 뻔한 긴장이 풀렸다.

“1대 7이니까 당연한데, 어째 속은 기분이야.”

“쫓을까요?”

“쫓으면 잡을 수 있어?”

이안 선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더치맨의 속도를 가늠했다. 기준 삼을 것이 없는 망망대해에서 적함의 속도를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바람과 해류를 손금 보듯 보는 경험 많은 선장이어야 추측할 수 있었다.

“어렵겠습니다.”

경험 많은 선장이 말했다. 맥이 조금 풀렸다.

“우선 흘수선이 낮습니다. 배가 가볍다는 뜻이죠.”

“우리는... 아...?”

밀과 보리가 가득했다.

크레타 시티에서 나름 비운다고 비웠지만, 워낙 많은 양이라 보관할 곳이 없고, 로벨이 온 뒤로는 시간이 부족했다. 로벨은 친애하는 동료들에게 물었다.

“선실을 비우고 쫓으면 어떻게 될까?”

“저요! 어린 집사가 크라켄이 될 거라 생각해요!”

마녀가 바로 정답을 맞혔다. 곡물을 팔려고 더치맨과 싸웠는데, 곡물을 버리고 더치맨을 쫓으면 주객이 전도된다. 어린 집사와 페리 행정관이 알면 깃펜을 씹어 먹을 것이다.

“그래도 쫓는 시늉을 해야 멀리 도망가겠지? 계속 가.”

로벨은 하루 정도 뒤쫓다가 완전히 놓치면 크레타 시티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그때, 호른 경이 새로운 관점으로 제안했다.

“폐하, 이런 말씀드리기가 송구하나, 굳이 쫓아낼 필요가 있습니까?”

“어째서?”

“수십 일 동안 남해 항로가 막혔으니 알베니아 왕국의 철과 양모, 식량 가격은 최고가로 올랐을 겁니다.”

마녀와 허풍쟁이가 ‘설마? 설마?’ 하는 눈으로 호른 경을 쳐다보았다. 호른 경은 그 눈빛을 빨리 깨달아야 했다.

“저 해적을 풀어놓으면 계속해서 물가가 오르겠지요.”

로벨은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확인차 물었다.

“저 해적들을 그냥 두고 이득을 챙기자는 것이오?”

“감히 폐하의 함대는 건들지 못할 테니, 저들을 놓아주면 오랫동안 남해무역을 독점할 수 있...”

로벨은 더 이상 듣지 않고 선실로 몸을 돌렸다. 시답지 않은 소리도 경청 후 혼내는 평소 태도를 생각하면 놀랄 만큼 냉랭한 반응이었다. 호른 경은 그만 당황했다.

“폐하? 폐하? 폐하!”

“으이구! 기사님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기사님을 몰라요?”

마녀가 혀를 찼다. 호른 경은 뒤늦게 잘못을 깨달았다. 전시징발조차 꺼려하는 로벨에게 전쟁특수를 권한 것이다. 기사답지 못한 일이었다.

“기사든 상인이든 다 하는 것인데...”

“기사님은 보통 기사님이 아니잖아요? 반성 좀 하세요!”

마녀는 애교살을 내리며 혀를 낼름이고 로벨을 쫓아갔다. 선원과 용병들은 눈치껏 자리를 피해 바쁜 척했다.

“폐, 폐하...?”

선상에는 신세 처량한 기사만 남았다.

꽤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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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탄 반도 함대는 하루 동안 ‘플라잉 더치맨’을 추격한 후 크레타 시티로 귀항했다. 소식을 전하는 갈매기가 따로 있는지 크라켄이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뱃사람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까지 항구로 나와 로벨 일행을 환영했다.

“흠흠. 폐하의 용맹함이 남해를 뒤덮었습니다.”

호른 경이 곁눈질하며 아부했다. 평소에도 ‘잘한다~ 잘한다~ 우리 폐하 잘한다~’하는 호른 경이니 이상할 것 없는데 괜히 눈치가 보였다.

“이틀 뒤 늑대성으로 돌아가겠소. 채비하시오.”

“예. 폐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호른 경은 냉담한 반응에 풀이 죽었다. 그런데 진실을 말하면 로벨은 화나지 않았다. 이런 일로 화가 나면 어린 집사하고 못 살았다. 정의로운 기사라 생각한 호른 경이 살짝 엇나가 조금 실망했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었다. 다만, 주위를 맴돌며 사소한 것 하나하나 신경 써주는 것이 기분 좋아 계속 화난 척, 삐진 척하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러지? 어린애도 아닌데...’

물론 유치하단 생각도 했다. 기사답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사랑은 본디 유치한 것인데.

길진 않았지만, 어느 때보다 험난한 항해라 휴식이 필요했다. 고생한 선원과 용병에게 술과 고기를 주었다. 마틴 총독은 지난번의 실수-커피를 만회하기 위해 작정하고 술을 준비했다. 이것 역시 보통 술이 아니었다.

“꾸으으아아-! 이거 뭐에요?”

마녀 키르케가 술을 한 잔 마시고 자지러졌다. 마녀의 주량을 잘 아는 로벨과 허풍쟁이는 깜짝 놀라 술병을 살폈다. 진짜 독일지도 모른다. 마틴 총독이 껄껄 웃으며 신문물을 설명했다.

“생명의 물(Aqua vitae)입니다. 포도주를 증류해서 만든 술이지요.”

“증류?”

“수분을 날려서 술의 정수만 남긴 거라 합니다. 그걸 뭐라고 하던데... 알코? 알코올? 동방어라 정확하진 않습니다.”

대학물을 먹은 총독도 잘 모르는 것을 보면 동방의 기술이 대단했다. 로벨은 ‘생명의 물’이란 것을 한 모금 마시고 감탄했다.

“이건... 물처럼 흐르는 불이야.”

기사 종자에게 먹이면 좋을 듯했다. 식도와 위장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으니 칼로 쑤실 때 장기를 고를 수 있을 것이다.

로벨이 로벨다운 생각을 하는 사이, 마틴 총독은 생명의 물-알코올을 이용하면 음식을 상하지 않게 보관할 수 있고 정신을 잃은 사람을 깨울 수 있으며 각종 냄새를 녹이고 저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대부분 알딸딸하게 취해서 알아듣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향후 수백 년간 유라피아 대륙의 시장을 장악할 기술을 놓치고 말았다.

로벨은 상인도 아니고, 연금술사도 아니었다. 좋은 것을 봐도 무구(武具)가 아니면 관심두지 않았다. 다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커피랑 술이랑 집에 가져가자.”

“어린 집사 주려고요?”

“어린 집사도 주고, 펄프 대장도 주고, 외팔이도 주고, 리암 수사랑 헨리 상회장이랑...”

“아주 많이 가져가야겠네요? 깔깔!”

로벨과 마녀가 취해서 주거니 받거니 떠들었다. 호른 경이 한숨 쉬었다.

“그래도 한 사람 몫은 덜었어.”

“누구요? 누구 안 주려고요?”

“그게 아니야. 아니야.”

로벨은 얼마 안 남은 생명의 물을 잔에 가득 따라 호른 경에게 주었다.

“지금 줄 수 있으니까. 가까이 있으니까.”

“폐, 폐하?”

로벨은 베시시- 웃으며 북부 야만인처럼 술잔을 부딪쳤다.

“내가 좋아하는 호른 경이야.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공왕 폐하!”

한 명은 웃고, 한 명은 울고, 한 명은 감동하는 가운데 알코올이 비어갔다.

선뜻 믿기지 않지만, 크라켄을 무찌른 용감무쌍한 일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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