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65화 (465/605)

465화. 폭발

로벨은 슬픈 얼굴로 필드 아머를 벗었다.

이 강철로 빚은 예술품은 병장기를 막는데 탁월하지만 수천 파운드의 괴물과 수천 피트 깊이의 바다 앞에서 유용하지 않았다. 흉갑과 정강이 보호대만 착용하고 나머지는 무명천에 싸서 오동나무 상자에 고이 넣었다.

성지에 이른 순례자만큼 경건한 모습이지만, 선실 밖에서 지켜보는 허풍쟁이 생각은 달랐다.

“폐하? 저기, 폐하? 빨리 나오셔야 하는데요?”

허풍쟁이 보고 안달복달 못한다고 비웃을 수 없었다. 로벨의 머리 위, 그러니까 푸른고래 호 상부갑판은 그보다 훨씬 다급하고 소란스러웠다.

“이 머저리들아! 돛을 접어야지! 바람 맞으면서 노 젓겠냐?!”

“화약상자 가져와! 그래! 뭐, 뭐라? 한 방 쏘면 쟤네가 ‘어이구 무서워라!’ 하고 항복하냐?! 계속 쏴야지! 쏠 때마다 가져와!”

이안 선장이 한 마디 하면 갑판장이 열 마디, 스무 마디로 닦달했다. 그 덕에 로벨이 해치를 열고 올라왔을 때는 전투준비가 끝나 있었다.

“...저거야?”

로벨은 창칼을 빗겨 차고 선수상 너머의 바다 저편을 보았다. 햇살을 부수는 파도를 타고 유유히 흘러가는 갤리선이 있었다.

“일전에 본 무장 갤리선이 맞습니다.”

북해에서 제작된 갤리선은 선체가 길고 건현이 높았다. 거친 파도를 이겨내기 위해 노의 숫자도 많았다. 인어해의 갤리와 나란히 두면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저런 갤리선은 코그선에 밀려서 더 이상 쓰지 않지요. 상당히 오래된 배입니다.”

이안 선장이 속삭이듯 말했다. 험상궂은 전직 해적도 바다의 악몽 앞에서는 긴장했다.

파도가 이물을 넘어 발아래 쏟아졌다. 로벨은 무의식적으로 발을 빼다가 참았다. 피할 수 없고, 피해서 안 되었다.

“포격 거리는?”

“선수포 기준 400야드입니다.”

“그전에 크라켄이 나타날 거야.”

유령선 ‘더치맨’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지만, 7척의 전함을 상대로 저리 여유 부릴 수준은 아니었다. 매우 높은 확률로 함정이었다.

‘선공이 불가능하니, 알고도 당해줄 수밖에...’

마녀 키르케가 떡갈나무 지팡이를 흔들며 주문을 외웠다. 옛 신의 신실한 선원이 기겁해서 기도문을 외웠다.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줄지는 모르지만 마법에 비하면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마녀가 지팡이로 오른쪽을 가리켰다.

“저쪽이에요!”

주어가 빠졌지만 이해하는데 지장 없었다. 이안 선장이 방위를 지정하자 조타수가 바퀴를 돌리고 노잡이가 노를 당겼다. 고래를 닮은 뱃머리가 끼리릭- 소리 내며 돌아갔다.

기함의 돌발행동에 함대가 당황했다. 파비안 자작의 서풍 호는 깃발을 흔들며 항의까지 했다. 그러나 마녀의 마법과 이안 선장의 판단이 옳았다.

쿠르르르르...

“어? 어어어? 어어?”

함대 우측의 청새치 호가 크게 흔들렸다. 술 취한 조타수가 매 맞을 짓을 하나 생각할 때 바다가 갈라졌다. 목욕탕을 즐겨 찾는 음탕한 사내라면 종종 보았을 광경이었다.

“오, 오, 온다! 크라켄이 올라온다!”

“침착해라! 계획대로 한다!”

푸른고래 호의 포수들은 화승에 입김을 불고 대포 위에 고정했다. 거대한 바다 앞에 반딧불 같은 불씨가 애처로웠다.

“왔다! 왔다아앗!”

소용돌이 위로 기둥이 솟구쳤다. 과장이 아니었다. 고개를 한참 꺾어야 끝이 보일 만큼 커다란 기둥이었다. 허풍쟁이가 숨을 헐떡였다.

“뭐가 저렇게 커? 뭐야?”

자연물에 가까운 크기지만 엄연히 생물이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청새치 호를 향해 휘어졌다.

“점화!”

“점화!”

앞서 경험이 있는 푸른고래 호 포수들은 당황하지 않고 불을 댕겼다. 진자리 마른자리 골라가며 애지중지 실어온 화약이 보답하듯 폭발했다. 콰콰콰쾅-!

12파운드의 포탄이 차례로 쏘아졌다. 한 발은 너울에 흔들려 멀찍이 빗나갔지만, 한 발은 실력인지 요행인지 수면 위의 크라겐 다리를 맞췄다. 펑-!

살점이 둥그렇게 터지고 파란 피가 뿜어졌다. 수백 야드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강렬한 이미지였다.

구오오오오...

충격을 입은 크라켄 다리가 채찍처럼 휘어졌다. 하늘에서 앞뒤로 춤을 추다가 청새치 호 옆자리에 떨어졌다. 4~5피트 높이의 파도가 일어났다.

“효, 효과가 있다!”

“재장전! 재장전해!”

선원들은 롤링에 이리저리 구르면서도 좋아했다. 거칠기로 둘째가라면 서운한 용병 가슴에 불을 지폈다.

“저거 덩치만 큰 물살이잖아?”

“핸드 캐논 준비! 똥꼬에 힘 팍 주고 자리 잡아!”

겁쟁이 데비의 포수가 뱃전에 핸드 캐논을 올렸다. 캘버린과 팔코넷에 비하면 우스울 만큼 작지만, 그래도 ‘캐논(Cannon)’이었다.

“쏴랏!”

“파이어!”

사수가 포구를 겨냥하자 부사수가 불을 붙였다. 콰과과과광-! 작은 만큼 장점이 있었다. 고정된 함포보다 명중률이 높았다. 총 10발 중 7발이 크라켄 다리에 맞았다. 표적이 집채만한 탓도 있으나, 그걸 감안해도 놀라운 포술이었다.

구오오... 구오오오...

크라켄의 다리가 소용돌이에 빨려들듯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조용했다. 파도가 선체를 때리며 첨벙첨벙 소리를 낼 뿐이었다. 겁쟁이 데비가 중얼거렸다.

“해, 해치웠나?”

“야! 이...!”

모두가 한마음으로 겁쟁이를 욕할 때, 거짓말처럼 바다가 흔들렸다. 쿵... 그리고 한 번 더. 쿠궁... 갑판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육지였으면 지진이나 화산폭발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꽉 잡아!”

로벨은 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마녀 키르케의 허리를 감쌌다. 파도가 선현을 넘어 가슴을 때렸다. 호른 경이 젖은 머리를 털고 좌측 바다를 가리켰다.

“공왕 폐하!”

크라켄은 문어 비슷한 괴물이다. 그리고 문어의 가장 큰 특징은 8개의 다리였다.

“어어? 저쪽도! 저쪽도!”

바다 곳곳에서 조금 전과 같은 문어 다리가 솟아났다. 하나, 둘, 셋... 숨이 막혀 전부 헤아릴 수 없었다. 바닷물이 중력을 거슬러 치솟은 후 비가 되어 쏟아졌다. 현장에서 위협받는 처지만 아니면 넋을 잃고 감상할 신화적인 광경이었다.

“쏴! 대포를 쏴!”

이안 선장이 갈라지는 목으로 소리쳤다. 히스테릭하게 명령하지 않아도 총 6척의 전함이 포격을 시작했다. 콰- 콰광- 콰앙- 포성이 먹먹하게 울리고, 포탄이 거미줄처럼 수면 위를 지났다.

그러나 푸른고래 호에 비해 포수의 실력이 미흡한 건지, 아니면 파도 탓에 조준이 안 된 건지 대부분 엉뚱한 곳에 떨어졌다. 심각한 경우 아군의 배를 맞힐 뻔했다. 푸른고래 호 후미 돛에 포탄이 스쳐 갔다.

“저, 저, 저 도움 안 되는 것들!”

크라켄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공격받은 것은 페르젠 가문의 중형 갤리어스 민들레 호였다. 크라켄 다리가 갑판을 때리고 돛대를 휘어 감았다. 절구통만한 빨판이 사람사물을 가리지 않고 흡입했다.

“불을 질러! 달라붙지 못하게 해!”

인간의 지혜를 우습게보면 안 되었다. 횃불로 위협하고 작살과 갈고리를 이용해 긁어냈다. 그 과정에서 대여섯 명이 치여 바다에 빠졌지만, 배가 물속으로 끌려가는 것은 막았다.

“이런 제길! 이쪽으로 온다!”

쉬운 먹잇감을 찾는 걸까. 크라켄의 다리가 흔들거리며 다른 배를 노렸다. 선장과 갑판장이 격려 반 욕설 반으로 재장전을 독려했지만 쉽지 않았다. 예상보다 훨씬 심하게 흔들렸다. 화약이 바닥에 뿌려지고, 포탄이 파도 반대 방향으로 데구르르 굴러갔다. 무기를 나르는 선원이 포탄에 치여 자빠지는 사고도 일어났다.

로벨은 야전 지휘관답게 전장을 넓게 살폈다. 그리고 기사답게 결론을 내렸다.

“머리를 노려야 해!”

8개나 되는 데다 죽지도 않는 다리를 공격해서 승산이 없었다. 로벨에게 꽉 안긴 마녀가 수줍게 말했다.

“문어 머리는 사실 머리가 아닌데...”

“머리든 몸통이든 중요한 게 아니잖아?”

로벨은 마녀의 손을 풀어 호른 경 허리에 감아주었다. 호른 경과 마녀의 얼굴이 동시에 썩어가는 것이 볼만했지만 놀릴 시간이 없었다.

“이안 선장! 오른쪽으로 가!”

상식에서 벗어난 괴물이라고 하나, 한 덩이의 생물이었다. 저 발이 모인 중심에 머리-혹은 몸통-가 있을 것이다.

푸른고래 호는 폭풍의 눈, 아니, 크라켄의 눈이라 할 수 있는 잔잔한 바다에 도달했다. 사방팔방에서 크라켄 다리가 날뛰는데 이곳은 조용했다. 눈을 부릅뜨고 살피면 크라켄의 본체가 보일 것 같았다.

“물속에 있는 머리를 무슨 수로...”

상식 밖의 괴물은 상식 밖의 방법으로 잡아야 한다. 로벨은 흐룬팅을 뽑아 닻줄을 잘랐다. 손목 굵기의 단단한 대마 밧줄이라 날붙이가 아니면 끊어질 일이 없어 보였다. 마녀 키르케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설마... 또...?”

“또라니? 이건 처음인데?”

로벨은 닻줄을 허리와 어깨에 한 번씩 감아 단단히 쪼였다. 로벨의 기행을 모르는 사람도 슬슬 이상함을 눈치챘다.

“공왕 폐하...?”

“선주님?!”

로벨은 난간 위에 올라서서 가볍게 말했다.

“저거 혼내주고 올게. 조금 있다가 당겨.”

봄꽃이 만발한 화원에서 ‘산책 다녀올게. 차를 끓여놔’ 말하는 투였다. 그래서 말릴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로벨은 난간 너머로 한 발 내디뎠다. 무적무패의 닻이 떨어졌다. 풍덩-!

“으아아아아! 폐하! 폐하!”

“갑판장! 갑판장! 닻줄 감아!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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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에서 자란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지만, 로벨은 수영을 할 줄 모른다.

허리 이상 잠기는 물에 들어간 적이 거의 없었다. 수심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다, 그것도 익사보다 동사가 빠를 겨울 바다에 뛰어든 것은 미친 짓이었다.

‘앞이 안 보여...’

사실 물에 뜨는 것보다 어려운 게 가라앉기였다. 맨몸으로 뛰어들었으면 잠수를 못해 허우적거렸을 텐데, 가슴과 정강이의 20파운드 갑옷이 해저로 안내했다. 로벨이 할 일은 돛줄을 꽉 쥐고 크라켄을 찾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햇빛이 닿지 않아 온통 시커멨다. 물거품과 죽은 해초가 안 그래도 좁은 시야를 자꾸 가렸다. 로벨은 자세를 바꿔가며 주위를 살폈다. 걱정이 많은 호른 경은 1분도 못 기다리고 끌어올릴 것이다. 그 전에 크라켄을 찾아야 했다.

‘너무 깊으면 안 되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크라켄은 가까이 있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가까웠다. 팔이 닿을 듯 말 듯 한 곳에서 바닷물이 갈라졌다. 거대한 질량감과 함께 물레방아만한 흑수정이 나타났다. 깜짝 놀라서 공기를 반쯤 토해냈다.

‘이것은...’

이성은 어이가 없어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본능이 속삭였다. 전설 속의 바다 괴물, 크라켄의 눈이었다.

육지에서 온 손님에 놀란 것은 크라켄도 마찬가지였다. 도망치려는 듯 꿈틀거렸다. 로벨은 몸을 비틀어 창을 잡았다. 안전상의 이유로 꽁꽁 감싼 헝겊이 풀려 어디론가 떠내려갔다. 손에 쥐어진 것은 마상용으로 쓰는 해비 랜스였다.

‘괴물은 너 혼자가 아니야.’

로벨은 위로를 한 줌 던지고 바바 야가의 창을 찔렀다.

괴물이, 그리고 바다가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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