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화. 차별
크레타 시청사.
혹은 ‘크레타 총독부’나 ‘영외 행정부’라 불리는 곳이 아주 난리 났다.
치안유지 겸 행정관 보호로 파견된 크레타 시티 주둔 울프 용병단이 완전무장한 채 도로를 통제했다. 거리의 상인과 행인이 소리를 높여 항의했지만 번뜩이는 창칼 앞에 금방 잦아들었다.
엄마 말씀이 진리란 것을 깨달을 나이의 중후한 사회구성원은 평소보다 거친 언동과 바다를 힐끔거리는 불안한 눈빛의 용병들로 상황을 추론했다.
‘본토에서 높으신 양반이 왔군.’
‘무슨 일로?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이군.’
빌어도 먹지 못할 바다 괴물이 남해항로를 꽉 틀어막았으니 기사든 외교관이든 파견오는 것이 당연했다.
수염이 풍성한 선주들은 서로를 보고 껄껄 웃었다. 두족류 괴물과 교섭할 리 없으니 십중팔구 기사일 것이다.
이토록 세상사에 밝은 현인이지만, 기사의 신분만큼은 짐작하지 못했다. 싸우는 족족 이겨 북부의 땅을 장악한 무적무패 왕 로벨 로드릭은 골칫거리 크라켄보다 현실성이 없었다.
‘저기 온다.’
‘쇳덩이 입은 거 보니 기사가 맞구만.’
혹여 모닝스타라도 타고 나타났으면 의심 정도는 했을 텐데, 급히 공수한 점박이 승용마를 타고 와 정체를 알아채지 못했다. 로벨의 안전을 최우선시한 마틴 루드 총독의 의도이기도 했다.
로벨은 인파에 주눅이 든 승용마를 달래며 불만을 표시했다.
“너무 요란 떠는 거 아니야?”
호른 경 역시 로벨을 달래주었다.
“공왕 폐하의 영외 식민지입니다. 이 정도 환영은 당연합니다.”
그것 외에도 크라켄 출몰로 불안한 민심을 달래려는 의도가 있었다.
로벨 일행이 시청으로 들어가고, 애꾸눈의 크로스보우 소대와 시청 소속 소대가 건물을 둘러쌌다. 적으로 만난 적 있는 만큼 무서우면서 믿음직한 모습이었다.
“뭔가 하긴 하려나 보오.”
“크라켄을 쫓아낼 모양이야.”
크레타 시민과 자유도시 선장들 얼굴이 점차 밝아졌다.
그러나 시청 안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마틴 총독, 이안 선장, 그리고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의 조카 파비안 자작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장황하게 피해보고한 만큼 ‘높은 분’이 올 거라 짐작은 했는데, 설마 공왕이 직접 올 줄은 몰랐다.
“이렇게 먼 곳까지 왕림하셔서...”
“회의실이 어디야?”
마틴 총독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환영파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쪽입니다.”
그래도 왕을 소홀히 대접할 수 없기에 다과를 준비했다. 제대로 접대하려면 술을 가져오는 편이 좋겠지만, 아무래도 취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건 뭐야?”
유라피아 대륙의 모든 물산이 모이는 자유도시답게 평범한 차가 아니었다. 잉크처럼 새까만 차가 관심을 끌었다.
“커피나무의 씨앗을 볶아서 우려낸 차입니다. 향과 맛이 좋고 정신을 맑게 해줍니다.”
‘맛이 좋다’는 말에 마녀가 냉큼 들이켰다. 그리고 오만상을 쓰며 평가를 부정했다.
“도, 독이에요...”
마틴 총독이 웃으며 커피의 장점을 설명했다.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로벨은 혀를 살짝 담가보고 멀찍이 치웠다. 호른 경은 입맛에 맞는지 고개를 한번 갸웃이고 계속 마셨다.
로벨과 마녀는 냄새만 좋은 잉크빛깔 차를 노려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
‘어린 집사한테 갖다 줘야지.’
선물이 될지 골탕이 될지 모르지만, 지금 할 일은 아니었다.
로벨은 보고서를 꺼내놓고 팔짱을 끼었다. 자세히 설명하라는 뜻이었다. 이안 선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크라켄에 관해서라면...”
“크라켄을 소환한 해적을 먼저 말해 봐.”
“해적 말입니까?”
“응. 왠지 내가 아는 해적 같아.”
뱃사람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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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선장과 파비안 자작은 지도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현장의 위치와 직업적인 편견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전문가답게 수정·보완해서 확실한 정보만 짚어냈다.
“고의로 막은 게 확실해?”
“그것은 확실합니다. 처음에는 해적들이 단체로 독버섯을 먹었거나 악마가 농간을 부리는 줄 알았습니다.”
이안 선장이 부족한 그림 솜씨에 멋쩍어하며 일명 ‘크라켄 해적선’을 그렸다. 로벨과 호른 경은 선수상, 충각 모양, 노의 숫자, 선미루 등을 확인한 후 진짜 이름을 알려주었다.
“더치맨(Dutchman)이야.”
“예? 볼탄 반도 해적입니까?”
형용사가 잘못되었다. 로벨은 첫마디를 지우고 다시 말했다.
“플라잉 더치맨이야.”
“...누가 날아요?”
마틴 총독이 얼빠져서 되물었다. 평소 총독의 지혜와 평판을 존중해온 나머지 일당은 못 들은 척하고 알아서 놀았다.
“서, 설마, 북해의 유령선 말씁입니까?”
“맙소사! 이곳은 인어해입니다!”
“가만, 가만, 크라켄도 북해의 괴물이잖소?”
이안 선장과 파비안 자작은 뱃사람답게 유령선 전설에 해박했다. 자문자답을 몇 번 하고 그럴듯하다 결론지었다.
“그런데 폐하께서 플라잉 더치맨을 어찌 아십니까? 바다에서 평생을 보낸 선원도 볼까말까 한 악마의 배인데...”
그리고 ‘진짜 악마 짓이었어...’ 등을 중얼거렸다. 로벨은 뒷세계의 일-마도의 수호자 정체를 설명하는 대신 간략히 말했다.
“내가 혼내주려고 했는데 도망갔거든.”
이안 선장은 입을 딱 벌렸다. 생각해보니 멀리 있지 않았다. 전설의 유령선을 혼내준 전설의 무적무패 왕이 눈앞에 있었다.
‘이분도 보통 분은 아니었지...’
든든하고 믿음직스럽지만, 조금은 무서웠다. 무서운 왕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무튼 잘 됐어.”
“잘 되다니요?”
로벨은 그림을 가로로 접어서 테이블 위에 세웠다.
“바닷속에 크라켄은 잡을 수 없지만, 물 위의 더치맨은 잡을 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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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딱 하루 쉬고서 ‘유령선과 바다 괴물 소탕작전’에 돌입했다.
푸른고래 호처럼 대포가 탑재된 전함은 그대로 두고, 청동인어 호처럼 대포가 없는 전함에 늑대성에서 가져온 대포를 실었다.
“창은 쓸모없어. 작살을 준비해. 배틀 훅도 좋아.”
백병전(?)을 대비해 냉병기도 최대한 챙겼다. 시 서펜트를 사냥한 경험이 도움되었다. 덩치 큰 괴물은 단숨에 해치우기보다 제풀에 지치게 몰아야 했다.
“저, 나으리, 크라켄을 잡으러 간다는 게 사실입니까요?”
모험심이 넘치는-혹은 복수심이나 명예욕이 넘치는- 선장과 선원이 부두 주위를 맴돌았다. 대놓고 한 자리 끼어달라는 사람도 있고, 넌지시 출항날짜를 물으며 기회를 엿보는 사람도 있었다. 로벨의 함대가 크라켄과 싸우는 사이 남국으로 내려갈 속셈이었다. 호른 경이 못마땅하게 말했다.
“깡그리 징발해서 군함으로 사용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가까이 있던 선장이 딸꾹질하고 도망쳤다. 로벨도 승냥이 같은 선장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제안은 기각했다.
“대포가 없는 배는 쓸모없소. 아군의 포격을 방해할 뿐이오.”
하루하고 한나절 동안 철저히 준비하여 푸른고래 호를 비롯한 전함 7척이 출항했다. 전 함선에 대포를 2~3문씩 탑재하고 용병을 20~30명씩 탑승시킨 막강한 함대였다.
이안 선장이 흉터투성이 얼굴로 조언했다.
“상대는 유령선과 거대 괴물입니다. 방심해서 안 됩니다.”
“전쟁에 임하며 한 번도 방심한 적 없어.”
로벨의 대답에 선장과 선원이 모두 감탄했다. 무적무패의 비밀을 엿들은 느낌이었다.
“아니, 가끔 했나? 근데 지금은 아니야. 진짜야.”
감동적이지 못한 뒷부분은 빼고, 그럴듯한 부분만 로벨 로드릭 어록으로 전해지게 되는데, 그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지금은 남쪽으로 가는 게 급했다.
이안 선장은 돛대 위 풍향을 살핀 후 항해사에게 명령했다.
“노를 치워라.”
항해사는 욕 비슷한 것을 더해서 갑판장에게 명령했고, 갑판장은 의심할 여지없는 쌍욕으로 노예장에게 명령했고, 노예장은 혓바닥에 채찍질을 더해서 노잡이를 움직였다. 선체 좌우의 노가 하늘로 올라갔다. 로벨이 명령을 조금 보탰다.
“노잡이에게 물을 충분히 먹여. 고기와 비스킷도 좀 주고.”
“헤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지들도 살고 싶으면 죽을 똥 싸며 노를 저을 겁니다요.”
항해사가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왕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한 말 같은데 주제넘었다. 호른 경이 눈을 부라리자 이안 선장이 먼저 질책했다.
“선주님 명령은 선장의 명령이다! 일항사가 언제부터 선장에게 토를 달았나!”
그렇게 안 보이지만 식구 챙기기였다. 호른 경이 나섰으면 쇠장갑으로 두들겨 맞았을 것이다. 선장의 휙휙 돌아가는 눈빛을 읽었을까, 항해사는 즉시 머리를 조아렸다.
“어, 어이구! 죄송합니다! 물과 빵을 준비하겠습니다!”
로벨은 만족하고 선교 주위를 보았다. 밧줄을 오르며 훔쳐보는 선원들과 무기를 점검하며 힐끔거리는 용병들. 추위와 긴장이 느껴졌다.
조금 먼 곳을 보았다. 인어해가 자랑하는 에메랄드빛 바다가 하늘까지 뻗어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파도가 넘실대고, 여섯 척의 갤리어스가 차례로 돛을 펼치고 있었다.
“가까이 가면 지저분하고 냄새나지만, 이렇게 떨어져서 보면 아름답고 낭만적이야.”
“인간의 삶도 그래요.”
어느새 옆자리에 다가온 마녀가 말했다.
“힘들고, 아프고, 슬프고, 배고픈 날이 매일 이어지지만, 지나고 보면 아름다운 게 인생이잖아요.”
로벨도 동의했다. 하나만 빼고 말이다.
“좋은 말인데, 수염이 하얀 수도사가 해야 어울릴 것 같아.”
“그거 직업 차별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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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의 장점은 밥을 먹고 잠을 자도 계속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특히 일할 필요 없는 승객은 지루할 정도였다.
크레타 시티에서 출항한지 사흘하고 반나절이 지나자 문제의 해역의 도착했다.
크라켄을 본 적 없는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이제야 왔구나’하는 가벼운 마음이지만, 죽다 살아난 선원들은 잠시도 긴장을 풀지 않고 사방을 경계했다.
“크라켄이 찾을 수 있을까요?”
“크라켄이 아니야.”
헤엄치는 물고기가 보일 만큼 투명한 바다지만, 햇빛이 닿지 않는 수십 피트 아래까지 볼 수 없었다. 이 깊은 바다에서 크라켄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플라잉 더치맨 호를 찾아. 그러면 크라켄이 나타날 거야.”
그러나 수면 위의 적을 찾는 것은 아주 쉬웠다. 여러 척의 갤리선을 1마일 간격으로 세우고 수평선 위주로 견시하면 통나무 이상의 물체는 거의 잡아냈다. 비구름이 끼거나 섬그늘이 많으면 조금 어렵지만...
“오늘은 아닙니다.”
옛 신도 문어 괴물이 싫은 듯 화창한 날씨를 보장했다.
이안 선장은 크고 무거운 배를 중심에 두고, 작고 빠른 배를 외곽으로 옮겨 감시망을 펼쳤다. 크라켄이 기습 공격해도 대응할 수 있도록 전함의 대포를 장전하고 견시원을 두 배로 늘렸다. 로벨이 따로 명령할 것은 없었다.
“동서로 9마일씩 훑으며 내려갈까 합니다.”
로벨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훑는지 묻지 않았다. 선장의 표정을 보아 들어도 이해 못 할 것 같았다.
“유령선을 찾으면 바로 불러.”
이안 선장이 로벨을 부른 것은 다음날 제6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