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63화 (463/605)

463화. 목숨값

솔직히 말이 되지 않았다.

로벨의 갤리선이 5척이고, 페르젠 가문의 갤리선이 4척이었다. 선장과 선원 모두 베테랑이며 무기 또한 충분했다. 해적 따위한테 당할 원정함대가 아니었다.

“혹시... 에르나 왕국 함대가...”

인어해 최강이라 자부하는 에르나 왕국 함대라면 가능했다. 지난 전쟁 때 된통 당했으니 동기도 충분했다.

“페르젠 가문의 덤보 호가 침몰하고, 가마우지 호가 반파됐어요. 그쪽 배들은 전부 자유도시로 피신했다고 해요.”

“그쪽 배? 우리만 당한 게 아니야?”

어린 집사는 쾌속정으로 날아온 피해 보고서를 몹쓸 물건인양 내밀었다.

“그냥 해적이 아니에요. 이안 선장이 농담을 좋아했으면 이것도 농담이라 여겼을 거예요.”

로벨은 피해내역을 훑어본 후 전투 과정을 살폈다. 그리고 어린 집사의 말을 이해했다.

“크라켄?”

육지의 괴물이 사라지니까 바다의 괴물이 난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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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가슴을 크게 부풀린 후 앞서 두 번 읽은 피해 보고서를 다시 펼쳤다.

‘...이하 해적이 괴수 크라켄을 동원하여 함대 후미를 공격, 22만 파운드의 덤보 호가 두 동강이 나 침몰했으며, 생존자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 계절에 바다에 빠지면 죽었다고 봐야 한다.

‘...푸른고래 호와 백상아리 호의 선미포로 반격했으나, 적함-잉크로 지움- 적 괴수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습니다.’

이 보고서가 사실이면 고작 한 척만 잃고 빠져나온 것이 기적이었다.

로벨은 대책 마련을 위해 모인 늑대성 식구들을 보았다. 마녀 키르케가 떡갈나무 지팡이를 꼭 끌어안고 말했다.

“크라켄은 추운 바다에 사는 짐승이에요. 인지의 세계에서 불러내어도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아, 혹시 마도의 수호자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마법 이야기로 넘어가려고 하자 어린 집사와 페리 행정관이 말을 끊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리 배가 발이 묶였다는 거죠!”

“좀 더 정확히는 남해항로가 막혔습니다. 전쟁 중인 나라가 괴물 소탕에 나설 것 같지도 않습니다.”

재정담당들이 곤란해 하자 민생담당의 리암 수사가 제안했다.

“그냥 돌아오라고 하면 안 되나요?”

어린 집사가 성직자에 대한 존경을 잠시 잊고 쌍심지를 켰다. 멱살을 잡지 않은 것은 일말의 이성보다 검술 훈련으로 삐거덕거리는 고관절 탓이다.

“그 배에 투자한 페닝이 얼만 줄 알아요? 영내의 곡식이란 곡식은 죄다 실어 보내고, 그만큼의 양을 다시 구입해서 창고를 채웠는데, 그걸 도로 가져오면 누가 처리하고! 누가 보상해요.”

평소에도 발정 난 살쾡이 같지만, 페닝이 걸리면 동방대륙의 신수 호랑이 같았다. 리암 수사는 성호를 긋고 옛 신과 집사에게 사과했다.

로벨은 늑대성 최고의 지성들을 무시하고 호른 경을 보았다.

“제가 궁금한 것은 크라켄을 부리는 해적입니다.”

역시 군사(軍事)는 기사의 몫이었다. 로벨은 기사의 일인으로 적극 동의했다.

“우연히 나타난 거면 금방 사라지겠지만, 그게 아니면 목적이 있을 거야.”

어린 집사가 화를 가라앉히고 물었다.

“근데 해적이 무슨 수로 괴물을 부려요?”

“평범한 해적은 아니겠지.”

로벨과 호른 경은 짚이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어린 집사가 알면 길길이 날뛸 것이다.

“여기서 고민해 봐야 답이 안 나와. 집사, 지금 쓸 수 있는 배가 뭐 있어? 바다사자 호?”

“바다사자 호는 북해에 있잖아요. 여기로 불러오려면 30일이 걸려요.”

“그럼 뭐야? 청새치 호?”

“아니요. 공짜여행(Free Trip) 호요.”

로벨이 기억을 못 하자 바로 일러주었다.

“에르나 왕국 수송선이요. 공왕 폐하가 납치, 아니아니, 나포해서 크레타 시티 정기 연락선으로 삼았잖아요.”

“자유도시정기왕복 호 아니었어?”

“너무 길어서 줄이기로 했잖아요. 기억 안 나요?”

“그, 그랬나? 근데 하필...”

“에에잇! 옛날이야기 그만하고요! 그래서 배는 왜요?”

로벨은 ‘다 알면서?’하는 표정을 지었다. 겨울 바다가 얼마나 춥고 위험한지, 공왕의 자리가 얼마나 무겁고 중요한지 설교가 이어졌지만, 그전에 다들 결과를 짐작했다.

‘마법사를 빼고 가지 않겠죠?’

‘이번에는 얼마나 걸릴지...’

‘로드릭 항에서 출발할 테니 미리 준비해야겠군.’

워낙 익숙한 일이라 눈빛만으로 성에 남을 사람과 함께 갈 사람을 정했다. 굳이 의견이 필요 없는 사람은 허풍쟁이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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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여행은 결코 권장할 수 없다.

겨울에 집을 떠나야 할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면, 열두 번쯤 재고해서 ‘떠나지 못할 사정’으로 바꾸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세상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 사랑과 후회처럼 수십 번을 재고해도 피할 수 없을 때가 있었다.

마녀 키르케가 허풍쟁이 주위를 기웃거렸다.

“그거 안 해요?”

“그거 뭐요?”

“왜 또 나야! 왜! 끄아아아!”

“...이제 포기했소. 죽을 때까지 공왕 폐하 꽁무니를 따라다닐 운명인 게지.”

마녀가 정답이란 듯 ‘히히힛!’ 웃었다. 그런 운명이 몇 명 더 있었다.

“성을 이렇게 자주 비워도 되오?”

“겨울이라 할 일도 없습니다.”

“겨울이니까 하는 말이오. 춥고 힘들 텐데...”

“남쪽은 따뜻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폐하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어린 집사를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호른 경이었다. 실제로 도움을 자주 받았다. 로벨은 시선을 피해 울프 용병단을 살피는 거로 허락했다.

울프 용병단 숫자는 소금바위 마을을 갈 때와 비슷했다. 단, 싸움개 패거리 대신 겁쟁이의 포병대 동원되었다.

“팔코넷 10문, 핸드 캐논 5문, 화약 20상자, 포탄 32발입니다. 아, 소구경 포탄 포함입니다요.”

“엥? 포탄이 너무 적은데요?”

“그게... 수도원 공사에 석공들이 동원되어서...”

석공의 주 수입 중 하나가 포탄을 깎는 것인데,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황금 보리 수도원을 짓느라 딴 일을 못 했다. 석공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 없었다. 돌멩이를 둥글게 깎는 것보다 예배당을 짓는 쪽이 보람찼다. 직계가족 한정 천국행 티켓이 주어지니 말이다.

“모자란 것은 자유도시에서 사면 돼. 정 급하면 못이나 은화를 넣고 쏴도 되고.”

“...은화는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어린 집사가 진지하게 경고했다. 로벨의 용돈으로는 포신을 채울 수 없으니 괜한 경고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걱정은 진심이었다.

“크라켄이란 놈이 얼마나 큰지 모르지만, 딱 보고 안 될 거 같으면 도망치세요. 그깟 밀 없어도 안 망해요.”

“응.”

“진심이에요. 공왕 폐하가 가장 중요해요. 조심하고 또 조심하세요. 무사히 돌아오면 용돈 올려줄게요.”

“응!”

로벨은 어린 집사의 축복을 받으며 모닝스타에 올랐다. 펄프 대장, 리암 수사, 아야와 이야카가 각자의 방식으로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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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늑대성을 떠나 빡빡한 일정을 보냈다.

호른 성에 한나절을 쉬고, 바닷물이 들어오는 이른 아침 구슬피 우는 모닝스타와 작별해 '공짜여행' 호에 올랐다. 이름과 달리 즐겁지는 않았다.

10문의 대포를 갑판에 올리고 묶는 것부터 고욕이었다. 겨울바람은 살을 에고 뼈를 쑤셨다. 선실도 춥기는 매한가지였다. 화재 위험 탓에 불을 피우지 못했다. 넉넉한 담요와 독한 포도주를 주었지만 하루가 못 가 독감이 돌았다. 약학에 밝은 마녀 키르케가 있어 다행이었다. 오죽하면 호른 경이 한탄했다.

“겨울 항해가 힘들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나마 선원과 용병은 나았다. 노잡이 노예 중 상당수가 겨울에 죽었다. 주된 사인(死因)은 동사였다.

자유도시연맹 출신 선장이 술잔을 건네며 말했다.

“며칠 지나면 좋아질 겁니다.”

“남쪽은 따뜻하니까?”

“하하! 아닙니다. 약한 놈은 다 죽으니까요.”

이 시대 뱃사람다운 말이다.

추위와 멀미를 제외하면 항해 자체는 순탄했다. 거센 북풍이 부는 시기라 노를 젓지 않아도 빠르게 남하했다.

페르젠 시티와 프란시스 시티를 지나 볼탄 반도 남쪽에서 발레아 해류에 올랐다. 이름이 어려운 항해도구로 해와 별을 관측하지 않아도 하루 이틀이면 크레타 시티에 도착할 것이다.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지금까지와 다른 근심·걱정이 피어났다. 전대미문의 해양 괴물, 크라켄의 공포였다.

사실 육지에서 살아온 용병들은 크라켄이라 해봐야 조금 큰 문어로 여겼는데, 선원들이 근거 없는 소문과 목격담을 퍼트려 공포가 확산됐다.

“달빛이 어두운 새벽녘이야. 견시원이 망루에 올라 주위를 살피는데, 이상하게 돛대가 하나 더 많은 거야. 괴상한 일이지. 잠이 덜 깼나 싶어서 눈을 비비는데, 제일 후미의 돛대가 휘어지더래! 맙소사! 크라켄 발이었던 거지!”

로벨은 돛대를 올려다보았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호른 경이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입니다.”

온갖 소문에 시달린 로벨이라 알고 있었다.

“페르젠 백작의 전함을 부순 것은 사실이잖소.”

거인 버그베어를 처치하고, 시 서펜트의 가죽을 벗긴 로벨이지만, 이번에는 바다라 자신이 없었다. 호른 경이 지금껏 참아온 질문을 슬그머니 보였다.

“크라켄을 잡을 방법이 있습니까?”

로벨은 비장한 얼굴로 끄덕였다.

“이안 선장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겠지만, 기본적으로 생각한 바는 있소.”

“역시 폐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배에 대포를 달고, 죽을 때까지 쏘는 것이오.”

“......”

아주 잠깐이지만, 괜히 따라왔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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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켄의 덩치가 이안 선장의 보고대로면 창칼이나 쿼럴로 타격을 줄 수 없다. 심해를 넘나드니 불을 쓸 수도 없다. 이모저모 따져 봐도 대포 말고 답이 없었다. 그러나 무작정 대포만 믿고 온 것은 아니었다.

“크레타 시티입니다! 공왕 폐하! 항구가 보입니다!”

로벨을 불렀는데 시커먼 용병들이 우르르 뛰쳐나왔다. 추위와 멀미로 죽어가던 모습이 거짓말 같았다. 약사 키르케의 지론대로 희망은 만병통치약이었다.

“와... 배가 엄청 많아요.”

“크라켄 때문에 도망온 상선이겠지.”

호른 경이 못마땅하게 말했다. 겁쟁이들의 모임 같아서 불쾌했다.

로벨도 선실 밖으로 나와 감탄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크레타 시티가 몇 년 만에 재건되어 놀라고, 정박지에 늘어선 수십 척의 갤리선에 놀랐다. 부두에 댈 수 있는 작은 배조차 자리가 없어 쫓겨나왔다.

“우리 못 들어가는 거 아니야?”

사회생활을 잘하는 선장이 크게 웃었다. 재미난 농담이었다.

“왕의 깃발을 올려라!”

로드릭 가문의 깃발이 메인마스트 꼭대기에 걸렸다. 공국령에서는 자유통행증이었다. 공짜여행 호를 알아본 부두관리인이 깃발로 신호를 보냈다. 빈자리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모실 것이다.

“저기 푸른고래 호에요!”

왕의 이름표를 단 배가 몇 척 더 있었다. 로벨은 제1부두에 정박한 원정함대를 보고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옆구리에 자상을 입은 가마우지 호가 안쓰러웠다.

“이제 복수의 시간이야.”

적어도 죽은 선원의 목숨값은 받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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