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화. 거짓말
작년에 왔던 추수제가 죽지도 않고 또 왔다.
로드릭 시티의 추수제는 지역 축제가 되어서 ‘가을 추수를 기뻐하자’ 의미보다 ‘올해 마지막으로 진탕 놀아보자’란 의미가 강했다. 그 탓에 농부보다 기사와 귀부인, 도시의 자유민이 더 많이 보였다.
“그래도 추수제인데, 성 밖의 농민을 돌봐야지.”
로벨은 축제기간 중 하루를 할애해서 성 밖 농가를 순회하고 고기와 술로 잔치를 열었다.
로벨을 오랫동안 모신 찰드 촌장 일가와 고령의 농부들은 매우 좋아했지만, 최근에 정착한 농부와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된 십대들은 몹시 불편해했다. 그러나 그들을 무례하다, 건방지다, 배가 불렀다, 타박할 수 없었다.
“과연! 과연! 늑대성의 농부는 뭐가 달라도 다르군요!”
“공왕 폐하의 보호를 받는 농부가 평범할 리 없지! 보시오, 의상부터 다르잖소?”
로벨을 쫓아온 기사들이 앞다퉈서 호들갑 떨었다. 그것은 우습기보다 공포스러웠다.
평소에는 눈조차 마주치지 못할 ‘귀한 분’이 떼거리로 찾아와 아는 척, 친한 척하니 보통 난감한 것이 아니었다. 일 년에 한 번뿐인 잔치라 깨끗한 옷을 입었더니 농부조차 품위 있다고 칭찬하고, 연자방아를 돌릴 농마에게 귀리를 먹였더니 농한기 가축조차 곡물을 먹는다고 감탄했다. 눈치 볼 일이 없어 눈치가 부족한 로벨조차 이상한 것을 알 정도였다.
“왜들 저래?”
호른 경은 기사들의 복잡한 속내를 한마디로 정리했다.
“욕심이지요.‘
로벨 로드릭 왕이 페르젠 가문과 손잡고 ‘사업’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인어해 남쪽 나라를 정복할 거란 황당한 소문도 있고, 모나카 왕국의 17살 둘째 공주와 혼인동맹을 맺고 울프 용병단을 지원할 거란 구체적으로 황당한 소문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기회라 생각할 겁니다.”
“그게 기회가 되오?”
“사람이 모이면 페닝도 모이지요.”
로벨은 팔짱 끼고 턱을 만졌다. 이제 알 것 같았다. 로벨이 군대를 이끌고 인어해를 건널 때 한 다리 끼고 싶어 했다.
“하긴... 무기와 식량을 모으고 있으니 오해할 수밖에...”
“오해가 풀려도 욕심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정복사업은 아니지만, 전쟁과 바다는 페닝이 되었다. 인어해를 건너는 것 자체에 관심 가질 만했다.
“그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합시다.”
로벨은 쭈뼛거리는 찰드 촌장을 반갑게 맞이한 후 장인이 만든 지팡이를 하사했다. 기사라면 칼을 선물하겠지만 사냥꾼 출신이라 지팡이로 대신했다. 쉰이 넘은 나이를 생각하면 크고 무거운 칼보다 유용할 것이다.
찰드 촌장은 감격해서 가보로 삼겠다는 둥 매일 같이 닦아서 자랑하겠다는 둥 입에 발린 소리를 했다. 왕의 하사품이니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무 상관도 없는 기사들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지팡이라니! 참으로 복된 자로다!”
“무적무패 왕께서 하사하셨는데 보통 물건일 리 없지!”
보통 물건 맞았다. 부러지면 새로 만들어 줄 테니 편하게 쓰라고 당부했다. 물론, 새겨듣지 않았다. 로벨은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이럴 때는 술이 약이었다.
“불을 피우고 악공을 부르시오. 술잔을 채우고 크게 웃으시오. 다 함께 축제를 즐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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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른 경이 말한 대로였다. 기사들은 전쟁이 아니란 설명에 실망했지만 관심을 놓지는 않았다.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죽이고, 부수고, 빼앗는 일에는 전문가지만, 장사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장 비싼 대포를 팔아야지 않습니까?”
“대포를 팔 거면 화약도 가져가야지! 그렇지 않습니까?”
로벨은 술잔으로 표정을 숨겼다. 어린 집사의 평소 심정을 조금 알 것 같았다. 기사들은 하나같이 바보였다. 그나마 똑똑한 호른 경이 대신 설명했다.
“대포를 무엇으로 만드오?”
“청동 아니오?”
호른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청동 대포를 어디서 수입하는지 떠올린 기사가 얼굴을 붉혔다. 이 정도면 대단히 지혜로운 기사였다.
“화약! 화약을 가져가야 한다니까!”
“...화약의 주재료가 무엇이오?”
“초, 초석이잖소! 본인을 바보로 아시오?”
아직도 못 알아들은 거 보면 바보 맞았다.
“초석 최대 생산지가 어딘지 아시오?”
“에르나 왕국과 아이란드 왕국이오!”
호른 경은 이제 이해했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시골 기사는 자기 고향 외에 깜깜했다.
“전쟁이 난 곳은 알베니아 왕국과 모나카 왕국이잖소?”
“이런... 세 나라는 모두 국경이 닿아 있소. 대포와 화약은 아이란드 왕국 특산품이고, 소모품이오. 지금쯤 쾌재를 부르며 팔아치우고 있을 거란 말이오.”
“아... 그런 것이오?”
시골 기사는 머쓱해서 ‘진작 그렇게 말하면 되잖소...’ 어쩌고 중얼거렸다.
“애초에 무기는 페르젠 가문 소관이오. 공왕 폐하께서는 밀과 보리를 가져갈 생각이오.”
로벨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은 농장에 남는 잉여작물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쉬운 일이 아니라 영지 일을 도와주는 사제와 행정관을 호출했다.
그래도 쇳덩이가 두 자릿수 모이니 조금은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동부평야의 기사가 물었다.
“남부의 가을은 길고 느립니다. 눈이 내리지 않으니까요. 출항 시기가 언제입니까?”
지금 가봐야 비싸게 팔지 못한다는 뜻이다. 어린 집사와 이안 선장이 말한 것과 같았다. 로벨은 두 사람의 조언을 바탕으로 잘난 척했다.
“북풍이 부는 겨울이오. 달이 두 번 차면 출항할 것이오.”
허나, 거짓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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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 이후에는 곡물값이 떨어져야 하는데 이상하게 점점 올랐다. 흉년이 든 것도 아니고, 첫눈이 일찍 온 것도 아니었다. 영주들이 잉여 작물을 내놓지 않기 때문이었다.
“힛! 바보들이죠.”
그들의 속셈은 뻔했다. 로벨 로드릭 왕이 조만간 곡식을 대량 매입할 테니, 그때 값을 올리려는 것이었다. 늑대성의 귀재를 잘 모르는 수작이었다.
“지금 비축한 양으로도 선창을 가득 채울 수 있어요.”
“그럼 우리가 먹을 빵이 부족해지지 않아?”
“그때는 곡물값이 폭락할 거예요.”
로벨은 거래품목과 출항시기를 공개해서 곡물 가격을 올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린 집사는 자신만만했다.
“동부평야 기사들의 주 수입은 농작물이에요. 가을에 곡식을 팔아 생계를 꾸리죠.”
“어느 영주나 그렇잖아?”
“우리는 아니죠. 우리는 소금광산도 있고, 교역선도 있고, 저 남쪽의 자유도시도 있으니까요.”
로벨이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짓자 차근차근 설명했다.
“기사들한테 50일 뒤에 출항한다고 했죠?”
“응.”
“사실은 30일 뒤에 출항할 거예요. 페르젠 가문 함대와 합류한 후 크레타 시티를 경유해 갈 거라 일찍 출발해야 해요.”
“으응.”
“곡물을 사지 않고 예정보다 빨리 배가 출항하면, 기회를 보던 영주들이 어떻게 반응하겠어요?”
로벨은 곰곰이 생각한 후 맹점을 찾았다.
“늑대성에 남은 식량이 없는 것을 알고 계속 안 팔면? 아쉬운 것은 우리니까 결국 비싸게 사야 하잖아?”
“구매자는 하나인데 판매자가 여럿이면 가격은 필히 떨어져요. 물론, 저들이 단합할 수 있으니 약간의 선동은 필요하죠. 폭풍성의 조단 랭스터 경이 작년 가을 시세로 곡물을 팔 거예요.”
“별로 싸지 않은데?”
“그게 시작가니까요. 그 다음은 더 싸게 사야죠. 우리가 먹을 최소한의 식량은 확보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될까요? 배는 이미 떠났고, 잉여작물은 가득한데, 시간이 지나면 본전도 못 찾는다는 불안이 생기겠죠?”
로벨은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운 리액션이었다. 어린 집사는 신바람 나서 설명했다.
“그럼 곡물값이 곤두박질칠 테고, 기회를 봐서 전량 매입하면 돼요. 가을 시세로 사는 것보다 훨씬 싸게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계속해서 교역선을 보낼 수 있겠네?”
“계속해서 페닝을 벌 수 있는 거죠.”
볼탄 반도에 주식시장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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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의 사악한 음모는 거의 맞아떨어졌다.
푸른고래 호를 기함으로 한 남해 원정함대가 30일 만에 출항하자 보리 판매시기를 가늠하던 영주와 지주들이 크게 당황했다. 폭풍성의 도움조차 필요 없었다. 조급증이 심한 영주들은 즉시 창고를 열었다.
“이거 기대 이상인데요?”
흥정과 모략에 도가 튼 도시 부르주아라면 쉽게 당하지 않았겠지만, 전쟁과 농사밖에 모르는 기사들은 당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예년의 반값으로 로드릭 상회 창고가 가득 채워졌다. 지금 물자면 봄이 오기 전에 한 번 더 원정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첫눈이 내렸다.
흔히 겨울을 죽음의 계절이라 부르지만, 충분한 식량과 장작, 그리고 함께한 가족이나 친구가 있다면 휴식의 계절이 되기도 했다. 로벨과 그 일당들이 그러했다.
“히야하아... 이렇게 평화로운 게 얼마 만이냐.”
싸움개가 하얀 입김을 뿜으며 중얼거렸다.
매년 그렇게 생각하지만, 올해는 유독 힘들고 정신없었다. 봄에는 검은 숲으로 원정 가고, 여름에는 동쪽 바다로 원정 가고, 가을에는 원정함대를 꾸린다고 도시와 항구를 뻔질나게 왕복했다.
“덕분에 주머니가 두둑하지 않소.”
“주머니만 배불러서 뭐하냐. 죽을 때 가져갈 것도 아닌데.”
조금 전과 다른 의미로 한탄했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연애하고 결혼하는 놈들이 있으니 놀라웠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부러웠다.
“허풍쟁이만 신났지. 수시로 로드릭 항에 가잖아.”
허풍쟁이는 호른 가문에서 일하는 미망인과 눈이 맞았다. 옛날에 공왕 폐하와 함께 못된 영주에게서 구해준 인연이라는데, 허풍쟁이 말이라 100% 신뢰하기는 힘들었다. 갓 성인이 된 짐이란 아들이 아저씨, 아저씨, 하면서 따르는 것을 보면 나쁜 만남은 아닌 듯했다.
“겁쟁이가 더 문제 아니오. 우리 로자니아 씨는 그깟 놈이 뭐 좋다고... 크흑...”
“아니야! 아니야! 내가 들었는데 로자니아 씨는 결혼할 생각 없다고 했어!”
“뭐? 정말?”
“겁쟁이 놈이 고백했다가 차였다는 이야기도...”
“그런데 계속 들이댄다고? 겁쟁이가?”
첫눈의 묘한 감성 때문일까, 우락부락한 용병들이 사춘기 소녀처럼 ‘누가 누구를 좋아하네’ 떠들었다. 합의된 결론이 ‘아구창을 부숴주자’, ‘갈빗대를 몇 개 뽑아내자’인 것만 살짝 달랐다.
“용병과 과부라... 잘 어울리긴 하지.”
남의 것을 빼앗는 잡놈과 빼앗긴 여인. 뒤틀린 채로 꼭 맞는 한 쌍이었다.
싸움개는 입김을 길게 뿜어 센티멘탈한 생각을 몰아냈다.
“저 눈 때문이야. 빌어먹을.”
로벨도 동의했다.
아야와 이야카가 혓바닥을 내밀고 헥헥- 걸릴 만큼 세게 불을 지피고 시 서펜트 가죽으로 만든 망토를 발끝까지 둘렀지만 어딘가 허전했다.
‘뭔가 중요한 걸 빼먹은 것 같은데...’
로벨은 흐룬팅을 닦아서 창가에 비추었다. 까만 칼에 하얀 눈이 흘렀다. 눈송이 하나에 지난 일 하나를 새겼다.
‘검은 숲의 불만은 해결했고, 가을 추수도 무사히 끝냈고, 원정함대도 차질 없이 출발했고...’
로벨은 칼을 치우고 중얼거렸다.
“어린 집사가 없어서 그런가?”
그것도 아니었다. 어린 집사가 방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더욱 싱숭생숭해졌다.
“해적이에요! 해적이 우리 함대를 공격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