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61화 (461/605)

461화. 힌트

참나무로 만든 3.2피트짜리 목검을 비스듬히 내밀었다. 열두 살 이후 잡아본 적 없는 장난감이지만 곧장 제 몸처럼 다루었다. 연륜이 연륜이라 병장기에 휘둘리지 않았다.

“허리 숙이지 마.”

로벨은 옆으로 서너 걸음 가다가 불쑥 칼을 찔렀다. 어린 집사가 기겁하며 방어했다.

‘저게 방어인가?’

우정의 이름으로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다. 소신껏 말하면 허우적거렸다. 로벨은 한숨을 쉬고 칼자루를 때렸다. 주인 잃은 칼이 빙글빙글 날아갔다.

“공격을 끝까지 봐야지. 검술은 7할이 눈이고 3할이 발이야. 칼끝을 보고 간격을 맞추면 무조건 이겨.”

“그, 그게 말이 돼요?”

“매의 눈, 사자의 심장, 사슴의 다리. 포클랜드 검술학회에서 강조하는 문구야.”

어린 집사는 멀리 날아간 목검을 주우며 투덜거렸다. 대충 천재는 범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불만이었다. 아주 부정할 수 없었다. 로벨은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치마 입은 시절에도 아름드리나무를 아무렇지 않게 오르고, 커다란 사냥개를 목 졸라 기절시켰다. 사냥꾼이 쏜 화살이 코끝을 스칠 때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참 좋은 시절이었지...”

“엥? 뭐가요?”

“아니야. 아니야.”

로벨은 어린 집사의 자세를 고쳐주고 팔짱을 끼었다. 사실 검술 훈련은 이렇게 하는 게 아니었다. 입에서 단내가 나게 뜀박질하고 적절한 크기의 바위를 골라 빙글빙글 돌려야 했다. 악력, 각력, 균형 감각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쇠토막을 휘두르는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천 번 만 번 휘두르면 저절로 달인이 되는 거 아니에요?”

“이게 춤도 아닌데 혼자 휘둘러서 뭐해? 싸움은 경험이야.”

기사 종자가 괜히 수 년 간 봉사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술은 보름이면 배우지만, 실력은 실전을 치러야 쌓였다.

“기초부터 하지 않을 거면 이게 가장 빨라.”

로벨은 목검을 좌우로 까딱였다. 실전 같은 대련 시간이었다.

“잠깐. 잠깐만요.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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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랬던가.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거라고. 어린 집사는 머리와 어깨와 옆구리와 종아리를 동시에 어루만지고 싶어 했고, 최종적으로 꿈틀거렸다. 늙은 집사가 살아 돌아와도 당장은 외면할 볼품없는 자태였다.

로벨은 목검을 주워 몇 가지 자세를 취하며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검술이야?”

어린 집사를 어린 육포로 다지기 전에 물었어야 할 질문이었다. 어린 집사는 비장했던 아침식사 시간을 후회하며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요. 그냥.”

“혹시 키르케 때문이야?”

“아니거든요? 진짜 그냥이거든요?”

로벨은 웃지도, 놀리지도 않았다. 그저 침묵으로 압박했다. 어린 집사는 곁눈질하다가 마지못해 고백했다.

“키, 키르케가 기사들을 좋아하는 것도 쬐금은 있지만... 그것보다 제가 필요해요.”

“네게는 그랜드 챔피언과 무적의 용병단이 있는데?”

장엄한 홀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들었으면 감동할 대사였다. 흙투성이 연병장에서 엉덩이를 쭉 빼고 엎어진 자세가 문제였다.

“폐하와 용병이 침실까지 지켜주진 않잖아요.”

로벨은 목검을 옆구리에 끼우고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로벨이 옛날의 세습 기사가 아닌 것처럼 어린 집사도 옛날의 가정 집사가 아니었다.

“경호원을 붙여줄까?”

“에이, 그 정도는 아니고요.”

어린 집사 나이가 어느덧 20대 중반이었다. 주인을 잘못 만나 아직 혼자지만, 보통은 아들딸 하나씩 가질 나이였다.

“하긴, 칼 정도는 다룰 줄 알아야지.”

꼭 기사가 아니어도 교양 있는 신사라면 자신과 가족을 지킬 줄 알아야 했다.

“좋아! 오늘부터 매일 훈련시켜줄게!”

“매, 매일은 조금... 이틀에 한 번... 아, 아니, 사흘에 한 번만 해요.”

“그래서 언제 실력을 쌓고, 언제 키르케 사랑을 받아?”

“키르케가 왜 또 나와요!”

“저요? 저 불렀어요?”

마녀도 제 말 하면 찾아온다는 잉그비아 왕국 속담이 기가 막히게 맞았다.

마녀 키르케가 아야와 이야카를 좌우에 거느리고 나타났다. 어린 집사는 초인적인 힘으로 벌떡 일어나 백만 대군에 대적한 용감한 기사처럼 칼을 짚고 섰다. 가상한 노력이지만 최고의 기사를 매일 봐온 마녀에게 감동을 주지 못했다.

로벨은 머리를 절레절레 젓고 마녀에게 물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병원에 환자 없어?”

“낫질하다 다친 꼬마 농부랑 일하기 싫은 꾀병 영감님이 있는데, 제 담당이 아니에요.”

원장이 진득하지 못한 탓에 닥터 줄리안이 고생이었다.

로벨은 어깨에 목검을 걸치고 산도적처럼 어슬렁어슬렁 케이프를 챙겼다. 열기가 식으니 제법 서늘했다. 땀범벅이 된 어린 집사는 슬슬 추울 것이다. 한여름의 무더위가 거짓말 같았다.

“그럼 놀러 온 거야? 어린 집사 보려고?”

“아니요? 기사님 보러 왔어요.”

어린 집사가 입술을 삐죽였다. 로벨은 집사 머리에 케이프를 씌워주고 목검을 빼앗아 뒷정리했다. 주종간의 역할이 바뀌었지만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마녀가 뒷짐 쥐고 따라다녔다.

“성(Borough) 밖에 사람이 많이 왔어요.”

“추수제 준비 중이니까. 상인도 바쁠 거야.”

“아니요? 상인이 아닌데요? 기사님이랑 병사들이에요.”

마녀는 심각할 수 있는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했다. 건성으로 들으면 옆집의 염소가 놀러 왔다는 이야기 같았다. 어린 집사가 왕의 케이프를 두르고 소리쳤다.

“기사랑 병사요? 그럼 군대잖아요!”

“앗! 맞아요! 그래서 펄프 대장이 용병들을 모아서 갔어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왜 아무도 보고를 안 해!”

펄프 대장과 용병들을 변호하자면 성문을 닫고 방문 목적을 확인하는 사이 마녀 키르케가 먼저 출발한 것이다. 그 증거로 지금 허풍쟁이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공왕 폐하! 공왕 폐하! 헉! 헉! 나 죽겠다!”

로벨은 잠깐 고민하는 자세를 취하고 허풍쟁이의 말을 선수 쳤다.

“남문에서 뛰어왔어?”

“예? 예예! 지금 남쪽에서...!”

“페르젠 가문이지?”

“예예? 예! 페르젠 백작 나으리가...!”

“화가 많이 났다고?”

“...마법입니까요?”

추수제 전에 찾아뵙겠노라 ‘통보’했으니, 기사 몇 명 데리고 올 리 없었다. 그런 방문이면 전날에 사람을 보내도 충분했다.

“화난 것은 어떻게 알았습니까요?”

“그 백작이 좀 그래. 간에 열이 많나 봐.”

미리 연락하고 깃발을 걸었는데 성문을 걸어 잠가 화난 거지만, 거기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

“왜 왔는지도 짐작이 되니까.”

“그것까지 아십니까요? 진짜 마법 아닙니까요?”

로벨은 마법보다 유용한 어린 집사를 보았다. 칼끝은 못 봐도 유라피아 대륙의 정세는 한눈에 보았다.

“기사들만 들어오라고 해. 소란을 피우면 가만 안 둔다고 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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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하품하는 아야를 툭툭 치고 자꾸 삐뚤어지는 알루미늄 왕관을 고쳐 썼다.

지금 모습만 보면 늑대성의 주인이자 볼탄 반도의 왕으로 손색없었다. 귀찮아서 도망가는 늑대들을 돼지뼈로 꼬시고 삐죽삐죽 솟은 사자머리를 포마드로 긴급 공사하는 것을 모르면 말이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목을 가다듬고 크게 고했다.

“페르젠 가문의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이 볼탄 반도의 공작이자 포클랜드의 후작이자 늑대성의...”

어린 집사가 대충 넘어가라고 손짓했다. 페르젠 백작 정도면 제후 중의 제후인데 오래 세워둘 수 없었다. 그걸 아는 양반이 성문을 걸어 잠그고 쇠뇌를 겨눴냐 따지면 할 말 없지만...

“...왕 폐하께 알현을 청합니다!”

아성의 문이 활짝 열리고, 수염을 길게 기른 페르젠 ‘주니어’ 백작과 제법 낯이 익은 페르젠 가문 기사들이 들어왔다.

로벨은 자신도 모르게 수염에 집중했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로망이 있는 법이라 풍성한 수염이 멋있게 보였다.

“오랜만이오. 신수가 훤해지셨소.”

페르젠 백작과 기사들은 왕좌 아래 무릎을 꿇어 충성을 증명한 후 곧장 일어났다. 일어나라고 할 때 일어나는 게 좀 더 예의 바른 충성이지만, 기사에게 예의를 강요하는 것만큼 입 아픈 것도 없었다.

“공왕 폐하께서도 얼굴이 참 좋아...”

페르젠 백작이 뚱하게 말하다 흠칫했다. 로벨의 얼굴이 ‘진짜’ 좋았기 때문이다.

‘무적무패 왕의 올해 나이가 서른일곱 아니었나?’

지금의 로벨은 4살 빼야 하지만, 그래도 믿기지 않는 동안이었다. 족히 열 살은 어려 보이니 말이다.

‘아, 수염이 없어서 그런가?’

페르젠 백작다운 결론이었다. 파도성에 가면 면도부터 할 것이다.

그렇게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딱히 음흉하지는 않은- 본론에 들어갔다.

“공왕 폐하께 부탁할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언어해 남쪽의 일이오?”

“역시 알고 계시군요. 맞습니다.”

로벨은 자세를 조금 바꿨다. 왕관이 삐뚤어지지 않는 범위에서 움직였기에 여전히 경청하는 자세였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시오.”

로벨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페르젠 백작은 신이 났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주어와 동사가 몇 개씩 빠졌다. 그래서 이해한 것은 로벨의 전함과 페르젠 가문의 전함을 합치면 무려 11척이며, 인어해의 해적이 합심해도 당해낼 전력이 아니란 것뿐이었다.

“알베니아 왕국과 모나카 왕국은 육지에서 땅따먹기 하느라 바쁠 테니, 지금이 기회입니다.”

로벨은 무슨 기회인지 알지 못해 생각나는 대로 찍어보았다.

“해적을 소탕할 기회?”

“그것들은 구더기와 같아 치워도 치워도 다시 나타나는데 소탕하여 무엇을 합니까?”

구더기 때문에 꽉 막힌 해상무역이 정상화되겠지만, 반응을 보아 좀 더 큰 것을 노리는 듯했다.

“두 왕국 중 하나를 지원해서 항구권리나 관세협정을...”

...얻는 것도 아닌 듯했다. 페르젠 백작 얼굴에 ‘그런 방법이?!’ 하는 글자가 생겼다. 정리해서 해적소탕보단 크고, 전쟁개입보단 작은 일이었다.

“그냥 속 시원히 말하시오. 무엇을 하고 싶은 거요?”

페르젠 백작은 옛날이야기의 악당처럼 웃었다.

“양쪽 모두에게 무기와 병사를 파는 겁니다. 전세가 불리한 쪽이 비싼 값을 치를 테니 번갈아 거래하면 큰 이문을 남길 수 있습니다.”

로벨은 페르젠 백작에 관한 평을 일부 수정했다. 페르젠 가문의 피가 어디 가지 않았다. 위기를 기회로 바꿀 줄 아는, 부르주아보다 탐욕스러운 기사였다.

“제가 데려온 용병들이 첫 거래품입니다. 제값을 할 놈들이죠. 공왕 폐하께서 전함을 빌려주시면 전체 수익의 2할을 드리겠습니다.”

그의 구상대로 된다면 2할도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게다가 남부 정세에 관여할 기회였다.

“무기 말고 다른 것을 팔았으면 하오.”

허나, 로벨은 상재로 가문을 일으킨 페르젠과 달랐다. 페르젠 백작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전쟁이 길어지면 필히 부족하고 전세와 상관없이 항상 필요한 것이오.”

이제 페르젠 백작이 정답을 맞힐 차례였다. 로벨은 힌트를 주었다. 기사들의 오랜 권력이며, 지금 성 밖에서 한창 베고, 털고, 줍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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