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60화 (460/605)

460화. 말썽쟁이

기사에게 갑옷 디자인은 중대사다.

양동이 같은 통짜 헬름과 치렁치렁한 호버크를 뒤집어쓴 옛날과 달랐다. 수백 년에 걸친 야금술의 발전과 경제부흥으로 자리 잡은 인문학 사상은 기존의 견고함 외에도 인체공학적인 실용성과 심미적인 예술성, 그리고 가문의 업적이 첨가된 상징성을 요구했다.

“그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갑옷 제작자가 자신만만하게 풀 플레이트 아머를 선보였다.

“...와.”

기본 디자인은 프란시스 시티 공방에서 만든 필드 아머와 같았다. 어깨와 팔꿈치는 둥글둥글하고, 가슴과 복부는 세모꼴로 각이 졌다. 창과 화살을 빗겨내기 좋은 구조였다.

“세공에 특별히 신경을 썼습니다. 가까이 와서 보시지요.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갑옷의 굴곡을 따라 여러 개의 홈이 파여져 있었다. 이것도 적의 무기를 흘리기 위한 장치인데, 그 색상과 위치가 독특했다.

강철의 칙칙함과 대비되는 하얀 도료로 홈을 채우고, 가슴에서 옆구리, 쇄골에서 어깨로 자연스럽게 이어갔다. 가만히 서 있어도 바람을 가르는 느낌이 났다.

“...멋져.”

로벨의 입에서 최고의 찬사가 나왔다. 전장에서 입기에 다소 화려한 감이 있지만, 칼부림 몇 번 하면 도색이 벗겨지고 때가 낄 테니 상관없었다.

“내일 저녁에 성으로 와. 작업을 도와준 장인과 도제도 데려와.”

길드 소속이 아니라 텃새에 시달렸을 갑옷 제작자에게 최고의 선물이었다. 로벨의 포상금과 별도로 길드원의 아부와 뇌물이 쏟아질 것이다. 무적무패 왕의 갑옷을 만들어 크게 치하 받았다는 명성이 있으면 망치를 놓을 때까지 굶을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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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성 일대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검은 숲의 영주들이 패배를 인정하지 못해 군대를 모으고 있다. 자유도시연맹이 세금을 바치기 싫어 반기를 들었다. 잉그비아 왕국이 무역협정을 깨고 상인들을 억류했다. 등등... 로벨은 손가락이 있는 최첨단 컨틀렛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말했다.

“왜 그런 소문이 나는 거야? 그거 참 이상하네.”

어린 집사, 리암 수사, 점잖은 페리 행정관까지 한심한 눈으로 로벨을 보았다.

“정말 몰라서 물어요?”

“응?”

로벨은 어깨를 한번 돌리고 팔꿈치를 휘둘렀다. 브레스트 플레이트에 닿을 듯 닿지 않는 폴드런(Pauldron: 어깨 방어구)과 최대로 접어도 불편하지 않은 카우터(Cowter: 팔꿈치 방어구)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어린 집사는 아니었다.

“그 꼴로 다니니까 험한 소문이 나잖아요!”

“...아?”

왕이 완전무장한 채로 시내를 활보하는데 소문이 안 날 리 없었다.

어린 집사 이하 늑대성 식구들이 ‘그냥 갑옷 자랑이오. 아니, 진짜 갑옷 자랑이라고! 멋지다고 칭찬하면 아주 좋아하시오’ 등으로 열심히 해명했지만 불안을 잠재우지 못했다. 무적무패 왕이 꼬까옷을 입은 7살 꼬마와 비슷한 수준이란 것은 쉬이 믿기 힘들었다.

어린 집사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이제 벗으라고 안 할 테니까 괜히 시장을 기웃거리지만 마세요. 관심도 없는 시세 같은 거 묻지 말고요. 그때마다 철광 가격이 미친 듯이 치솟는다고요.”

“내가 언제 기웃거리... 으음...”

양심이 있어 말을 끝맺지 못했다. 어린 집사는 기대도 안 한 듯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올해도 추수제가 다가왔어요. 여기 필요한 예산과 인력 보고서에요. 뉴-뉴... 가 아니라, 호프 마을 축제 말고는 작년하고 비슷해서 크게 복잡할 거 없어요.”

로벨은 쇠 손가락으로 종이를 넘기려 애쓰다 포기했다. 익숙한 광경이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리암 수사가 이어서 보고했다.

“황금 보리 수도원의 입회 희망자가 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일손이 많아 괜찮지만, 갈 곳 없는 고아와 생계가 곤란한 미망인을 돌보려면 아무래도...”

“페닝이 더 필요해?”

어린 집사가 괴로워했다. 허나, 성급한 판단이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물고기가 아니라 물고기 잡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수도원은 작은 장원이었다. 옛 신을 찬미하는 것만큼이나 자급자족을 중시했다. 술을 빚고, 벌을 키우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양봉 사업을 시도했었잖아? 그거 어떻게 됐어?”

어린 집사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야심차게 양봉업자를 모았지만 성과가 없었다. 와인 양조와 마찬가지로 핵심 기술은 수도원이 독점하고 있었다.

“검은 바위 수도원에 연락해 봐. 욕심 많은 왕은 외면해도 형제자매를 외면하지는 않을 거야.”

리암 수사는 정신적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검은 바위 수도원을 떠올리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페리 행정관이 마지막으로 보고했다.

“크레타 시티의 마틴 루드 총독이 보내온 소식입니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총독’이란 호칭에 미소 지었다. 로벨이 볼탄 반도의 왕이 되면서 마틴 수석 행정관은 영외 식민지를 통치하는 총독이 되었다. 기가 막힌 신분 상승이라 들을 때마다 우스웠다. 그러나 ‘소식’을 듣는 순간 미소가 사라졌다.

“알베니아 왕국이 모나카 왕국을 침공했습니다.”

“...뭐?”

“편지에 적힌 일자로 7일 전, 오늘 날짜로 16일 전입니다.”

유라피아 대륙에는 크고 작은 세력이 많은데, 역사와 문화와 국력으로 분류하면 7개국이 대표적이었다. 인어의 바다 북쪽에 에르나 왕국, 포비아 왕국, 잉그비아 왕국, 네일 공국. 인어의 바다 남쪽에 아이란드 왕국, 알베니아 왕국, 모나카 왕국이었다.

“이웃 나라와 사이가 좋을 수 없죠. 남해 3국도 치고받고 싸우는 게 일상 아닌가요?”

에르나 왕국, 잉그비아 왕국, 포비아 왕국이 잊을 만하면 싸우는 것을 보면 이상할 것 없었다. 페리 행정관이 총독의 보고서를 올리며 말했다.

“강 건너 불구경... 아니군요. 바다 건너 싸움 구경할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째서?”

“인어의 바다 남쪽에서 가장 강성한 나라는 아이란드 왕국입니다. 알베니아 왕국과 모나카 왕국은 여지껏 공통된 적을 막기 위해 협력해 왔습니다.”

에르나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매일 같이 욕하면서도 전면전은 피하는 잉그비아, 포비아, 네일 공국과 비슷했다.

“불편한 동맹이 깨지고 정복전쟁이 시작됐다?”

“폭풍이 불어올 겁니다.”

로벨이 인상을 찌푸리자 어린 집사가 희망적으로 말했다.

“지들끼리 싸우다 끝날 가능성이 높죠. 폭풍이 이리로 온다는 보장이 있나요? 뭐, 면직물이랑 향신료 가격이 오르긴 하겠네요.”

로벨도 동의했다. 결과가 나오기 전에 미리 걱정할 필요 없었다.

“혹시 모르니까 그쪽으로 배 보내지 마. 마틴 총독한테는 계속 소식을 보내라고 하고.”

“예.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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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작은 일을 하나씩 처리하다 보니 어느새 가을이 깊어졌다.

석양을 등진 쓸쓸한 바람에 노랗게 익은 곡식이 파도치고, 허수아비 몸짓에 놀란 찌르레기가 화급히 남쪽으로 날아올랐다. 거친 날갯짓에 귀한 낟알들이 떨어졌지만 슬프지 않았다. 어김없는 풍년이었다.

로벨은 성탑 위에서 추경지를 내려다보았다. 한 해의 결실이기 때문일까, 매년 보는 가을 밀밭인데 볼 때마다 새로웠다.

“그야 당연하죠. 작년에는 저쪽이 추경지였고, 재작년에는 저쪽이 추경지였으니까요.”

“...어쩐지.”

어린 집사가 삼포제의 특징을 잘 짚었다. 로벨은 감상을 치우고 몸을 돌렸다. 일 년 중 가장 바쁜 시기였다. 다시 말해 어린 집사가 가장 예민한 시기였다. 이맘때는 말을 잘 들어야 했다.

“영주들이 진상품을 보냈어요. 구릉평야랑 동부평야는 벌써 밀 수확이 끝난 모양이에요.”

“우리보다 일찍 파종했으니까.”

“가죽이랑 고기를 보낸 영주도 있어요. 이쪽은 농사 팽개치고 사냥 다닌 모양이에요. 속 편해서 좋겠네요.”

로벨은 어린 집사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쉼 없이 툴툴거리는 것에 비해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지난 경험으로 추리하면 예년보다 진상품이 많을 것이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어린 집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집사가 기분 좋을 일은 그거뿐이니까’라고 말하는 대신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이 많아.”

어린 집사는 활짝 웃고 진상목록을 읊었다. 귀한 자기를 보낸 가문도 있고, 고운 설탕을 보낸 가문도 있었다. 형식적인 가을 공물치고 대단히 화려했다.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소금바위 마을 일로 감격한 모양이에요.”

용병 40명으로 해적 200명-사실은 170명-을 격퇴한 업적이 볼탄 반도 구석구석에 알려졌다. 늑대성의 용병이 총 1천 명이란 것은 대단한 비밀이 아니었다. 셈에 약한 기사도 감은 있었다. 주종관계를 떠나 무조건 잘 보여야 했다.

“그 덕분에 추수제 부담을 덜었어요.”

고작 축제 때문에 휘청할 늑대성이 아니니 단순 엄살이었다. 로벨은 어린 집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참았다. 어린 집사는 이름과 달리 어리지 않았다. 옛날처럼 취급하면 기분이 상할 수 있었다.

“내가 도울 일 있어?”

“...거듭 말하지만 제가 폐하를 돕는 거거든요? 전 재무대신이 아니라 그냥 집사라고요.”

로드릭 가문의 실세이자 볼탄 반도의 최고 권력자가 많이 겸손했다. 로벨이 칭찬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어린 집사는 헤실헤실- 웃다가 깜박한 내용을 보고했다.

“아참, 페르젠 백작이 사람을 보냈어요. 추수제 전에 찾아뵙고 싶데요.”

“페르젠 주니어 백작이? 왜?”

“이유는 안 밝혔는데, 대충 짐작이 가요.”

어린 집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집사’가 할 일이 아니었다.

“인어해 남쪽 나라가 피 터지게 싸우는 일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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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젠 가문은 일찍이 해상교역으로 부를 쌓았다.

지금은 프란시스 시티에 밀려 제2항구로 취급되지만, 샘 포클 시대 전후에는 볼탄 반도에서 가장 번화한 교역항을 운영했다.

“지금도 나쁘진 않아요. 내륙으로 화물을 옮길 때는 남쪽 끝에 위치한 프란시스 시티보다 페르젠 시티가 좋으니까요.”

로벨은 지리적인 요소에 집중했다.

“서쪽으로는 포클랜드 시티, 남쪽으로는 알베니아 왕국과 가깝지?”

“육로로 북해와 교역하고요. 뭐, 로드릭 항이 생기기 전 이야기지만요.”

실제로 페르젠 시티는 로드릭 시티 때문에 큰 타격을 입었다. 페르젠 가문 기사들이 괜히 로벨을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동방으로 가는 길은 프란시스에게 뺏기고, 북해로 가는 길은 로드릭에게 뺏기고, 남은 것은 인어해 남쪽 나라들인데, 그것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기 시작했으니 애가 타겠죠. 헨리 상회장을 불러 확인해야겠지만, 페르젠 항구는 지금 파리만 날릴 거예요.”

“어어억-! 공왕 폐하?!”

어느새 근무교대 시간이 되었다. 용병 하나가 올라오다 로벨과 눈이 마주쳤다. 로벨은 잠깐 기다리라고 손짓하고 대화를 이어갔다.

“날 찾는 이유가 뭘까?”

“음... 로드릭 항을 내놓으란 게 아니면, 남쪽의 말썽쟁이를 타일러보자는 거겠죠?”

볼탄 반도보다 덩치가 큰 말썽쟁이라 조금 부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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