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59화 (459/605)

459화. 황금 보리

로벨은 풀러를 타고 흐르는 피를 옆으로 털어내고 바이저를 올렸다.

악에 박친 해적이 창이라 부르기 민망한 꼬챙이를 들고 덤볐지만 주의조차 끌지 못했다. 손목을 한번 돌려서 창날을 치우고 목을 베었다.

두 눈을 부릅뜬 채 땅에 떨어진 해적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졸릴 때 눈을 비비거나 하품할 때 입을 가리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칼질이었다.

“공왕 폐하! 해적 두목이 도망갑니다!”

로벨도 보고 있었다. 팔켄 선장 패거리가 보트에 올랐다. 육지에 남은 것은 실컷 이용당하고 버려진 잡졸이었다. 허벅지에 칼 맞은 20살 기사 종자가 마구잡이로 메이스를 휘둘렀다.

“네놈들의 대장은 도망갔다! 항복해라! 제발 항복하라고!”

로벨은 점점 멀어지는 팔켄베르크 선장을 향해 잇소리를 내고 기사 종자를 구하러 갔다. 무쇠발로 차고, 재차 덤비면 아론다이트로 쪼개고, 머리, 어깨, 가슴, 뒷목에 가리지 않고 칼날을 담가주었다. 그러나 해적은 물러나지 않았다. 항복해도 교수대에 걸려 건조될 운명이라 죽기 살기로 덤볐다.

“공왕 폐하! 제가 왔습니다!”

호른 경이 기어코 남쪽 방어선을 뚫고 해안에 도착했다. 싸움개 패거리도 가까이 온 듯 북쪽이 시끌시끌했다.

“바다로 몰아! 못 도망가게 막아!”

로벨도 번거롭게 교수형을 집행할 생각 없었다. 숲이든 바다든 무법자가 왕의 땅을 넘보지 못하게 본보기를 보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자 로벨에게 점점 유리해졌다. 로벨의 의지와 전황을 알아챈 애꾸눈이 크로스보우 소대를 이끌고 지원 나오자 우두머리를 잃은 해적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던 해적이 한 줌도 안 되는 해변 끝에 몰렸다.

“사, 살려... 살려주세...”

로벨은 기름 때문에 피가 떨어지지 않는 아론다이트로 남은 잔당을 가리켰다.

“전부 죽여.”

로벨을 자상한 왕으로 아는 로드릭 시민이 들으면 깜짝 놀랄 명령이었다. 그러나 함께 전쟁을 치른 울프 용병단은 ‘무적무패’의 진면목을 잘 알고 있었다. 아군에게 자상한 만큼 적에게 잔혹하며 본보기를 보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동부평야 주민이 증인이 되어 줄 것이다.

“안 돼! 하지 마!”

“어, 엄마, 살려...!”

해적들은 창에 찔리고 도끼에 쪼개졌다. 바다에 뛰어든 해적에게는 쿼럴이 날아들었다. 짤막한 비명과 함께 피거품이 일어났다. 목에 맞아 즉사한 해적과 주요 장기 서너 방씩 맞아 가망 없는 해적이 파도에 춤을 췄다.

해적과 죽음과 바다의 무도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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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가을바람과 함께 새로운 소문이 퍼졌다.

‘로벨 로드릭 왕이 2천 명의 해적을 소탕하고 소금바위 마을을 탈환했다!’

숫자가 이상한 것은 용병들의 산술 능력이 떨어지는 탓이고, 그 외에는 전부 사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를 피해 도망간 소금바위 주민과 그들을 찾기 위한 일가친척과 페닝 냄새를 맡은 상인이 몰려왔다.

로벨은 몰매 맞아 죽다 살아난 솔트락 경을 새 영주로 임명하고 충성맹세를 받았다. 하나만 빼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사람이 있어도 식량이 없으니 큰일이야.”

여름 끝자락에 기대어 어찌어찌 먹을 것을 구하고 있지만,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찾아오면 고난이 시작될 것이다. 싸움개가 의아한 듯 물었다.

“어부 아닙니까요? 물고기 잡아서 말리면 되잖습니까?”

이제 아자르 마을이 된 옛 쉬폰 마을을 떠올린 듯했다. 로벨이 외면하자 애꾸눈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무슨 외팔이도 아니고...”

“그, 그런 심한 말을...!”

외팔이가 없어서 모두 웃을 수 있었다.

“저 중에 물질이 가능한 사내가 몇이나 되냐.”

“그... 뭐... 많아 보이진 않네.”

젊은 사내들은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배가 망가지고 그물도 성한 게 없지.”

“육지에서 잡으면 안 되나? 예전에 갔던 마을은 물고기가 마을까지 올라오던데?”

“이곳에는 연어가 없다. 그리고 다른 물고기는 제 발로-지느러미로- 찾아오는 연어만큼 잡히지 않아.”

어촌이라고 물고기만 잡아먹지 않고, 물고기도 철이 있어 시기를 놓치면 많이 잡지 못했다. 한마디로 겨울을 날 식량이 부족했다.

“근데 그걸 우리가 걱정해야 하나?”

싸움개가 마침내 맞는 말을 했다. 로벨에게 기어이 한 대 맞는 말이었다. “으악-!”

싸움개가 정수리를 붙잡고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바른 말이었다. 로벨이 직접 다스리는 땅이 아니니 솔트락 경과 소금바위 주민의 사정이었다.

“옛 신의 가르침이 아니어도 굶주린 사람을 보면 빵을 나눠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야.”

“제가 먹을 빵도 없는뎁쇼?”

“그러면 사정이 다르지만, 우린 굶지 않았잖아?”

“이 경우는 나눠줄 빵이 없는 거지요.”

호른 경이 문제를 다시 짚었다. 로드릭 시티에서 식량을 가져오거나 왕의 이름으로 주변에서 조금씩 징발하는 방법이 있는데,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었다. 징발당한 지역의 불만도 문제였다. 붕대를 칭칭 감은 솔트락 경이 죄진 얼굴로 왕과 왕의 부하들을 보았다.

왕의 고민이자 새 영주의 골칫거리는 의외의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황금 보리 농장의 풀롭 씨가 묵은 보리를 세 수레나 가져왔다. 그 소식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솔트락 경은 붕대 감다가 뛰쳐나갔다.

“풀롭 경!”

농장주인 풀롭이 웃으며 답했다.

“저는 경이 아닙니다.”

솔트락 경에게 기사 임명권은 없었다. 왕과 교회의 허락 없이 기사를 임명하는 것은 월권이었다. 얼굴이 붉어졌다. 뒤늦게 나온 로벨과 호른 경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보릿자루로 때렸어?”

“...예?”

로벨 딴에는 농담한 건데 왕의 무게로 진지해졌다. 호른 경이 대충 얼버무리고 상황 설명을 요구했다. 농장주인은 웃으며 말했다.

“솔트락 마을은 황금 보리 농장의 가장 큰 거래처입니다.”

자급자족으로 부를 쌓는 기사들에게 불편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그 거래처를 잃고 싶지 않아 찾아왔습니다.”

“구체적으로?”

“내년 봄까지 식량을 지원하겠습니다. 지금은 잉여작물이 이것뿐이지만, 가을추수가 끝나면 봄까지 먹을 충분한 양이 나올 겁니다.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농장주인은 솔트락 마을의 몇 가지 이권과 무적무패 왕이 보증하는 차용증을 요구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리 과한 수준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간신히 손해만 면하는 조건이었다. 로벨은 차용증에 적힌 0의 숫자를 세 번 확인한 후 중얼거렸다.

“부르주아는 하나같이 욕심 많은 돼지인 줄 알았는데...”

부르주아도 기사를 ‘무식하고 폭력적인 싸움꾼’으로 여기니 억울할 필요 없었다. 농장주인은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세상을 어찌 혼자 살겠습니까. 왕과 기사가 아니면 재산을 지키지 못하니 어려울 때 도와야지요.”

로벨을 기쁘게 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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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재건하고 주민을 위로하는 일은 솔트락 경에게 맡기고,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늑대성으로 회군을 시작했다.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동구 밖까지 나와 환송하니 분위기가 훈훈했다. 싸움개가 갓난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우리만큼 사랑받는 용병단도 없을 거야.”

“그건 글쎄다...”

볼탄 반도 바깥 주민 의견도 들어봐야 알 것이다.

한편, 남보다 서너 배 바쁘게 살아가는 로벨은 다음 일을 고민했다. 이번 일에 비하면 평화로운 고민이었다.

“수도원 이름을 정했소.”

호른 경이 깜짝 놀라 물었다.

“로드릭 수도원이 아니었습니까?”

로벨은 리암 수사의 마음을 깨달았다. 기분이 좋은데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건 좀 그렇잖소?”

“하긴, 왕의 이름을 붙이면 교회가 좋아하지 않겠군요. 아무래도 세속적인 영향이 강해지니...”

그런 이유가 아니지만, 그냥 그런 걸로 했다. 호른 경은 로벨의 풀어진 표정을 보고 웃음을 삼켰다.

“그래서 무슨 이름입니까?”

로벨은 솔트락 마을 주민이 겨우내 먹게 될 귀한 곡물을 거론했다.

“황금 보리. 황금 보리 수도원이오.”

맥주로 명성 높은 리암 수사와 잘 어울렸다. 그리고 ‘황금’이 들어갔으니 어린 집사도 좋아할 것이다. 로벨이 입꼬리를 실룩이며 말했다.

“정말 좋은 이름이지 않소? 본인은... 본인은 혹시 천재가 아닐까?”

애꾸눈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호른 경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제가 만나본 사람 중 최고의 천재입니다.”

애꾸눈의 표정이 더욱 이상해졌다. 신분의 벽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제약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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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시계 바늘처럼 한 칸 움직였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로드릭 시티에 도착했을 때는 무더위와 장마가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왔다.

“곧 있으면 밀을 수확하겠군요.”

로벨은 손가락을 꼽으며 날짜를 계산했다.

“아직 이른데?”

“벌써 가을이잖습니까. 시간은 금방 갑니다.”

펄프 대장이 우수에 찬 눈으로 추경지를 보았다. 나이 많은 사람의 특권 같은 거라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그 사이... 별일 없었지?”

어린 집사를 만나기 전에 미리 물었다. 노회한 펄프 대장은 그 이유를 짐작했다. 전리품이 없을뿐더러 보증까지 서고 돌아왔으니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애꾸눈과 싸움개 패거리가 아기새처럼 입 벌리고 전쟁수당을 요구하면 더욱더 그럴 것이다.

“호른 나으리 성에 며칠 피해있는 게 어떻습니까?”

호른 경이 귀를 쫑긋 세우고 관심 보였다. 로벨이 방문하면 사흘 밤낮으로 축제를 열고 환영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행복은 오지 않았다.

“추수 전에 할 일이 많아. 호른 경도 쉬어야지.”

호른 경이 풀죽었다. 그러나 둔하디둔한 로벨과 용병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계절이 변하면서 로드릭 시티도 변하였다. 자칭 동방학자가 연자방아를 완성했다. 농마와 로시난테를 몇 마리 동원해 시험 삼아 보리를 빻았는데 기존 물레방아보다 작업속도가 빨랐다.

하루 종일 흘러도 지치지 않는 개울물과 달리 한두 시간 돌리면 쉬어야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대단한 장치였다. 늙은 방앗간 관리인 빼고 모두가 좋아했다.

“내일 오후에 성으로 오라고 해.”

약속대로 포상금을 주고 성 밖에 하나 더 설치할 것이다. 펄프 대장이 이죽거렸다.

“페닝 나갈 곳이 많군요.”

어린 집사의 잔소리가 떠올라 한숨 쉬었다. 하지만 기쁜 소식도 있었다.

“공왕 폐하! 공왕 폐하!”

수염이 꼬불꼬불해진 갑옷 제작자가 모닝스타 앞을 막았다. 호른 경이 ‘무엄하다!’ 소리치며 말채찍을 높이 들었다. 그러나 ‘엄함’을 모르는 왕 때문에 내리찍지 못했다.

“공왕 폐하 갑옷을 완성했습니다!”

로벨의 입꼬리가 하늘로 올라갔다. 팔켄 선장이 도망갈 때도, 황금 보리 농장에서 식량을 가져왔을 때도 저리 웃지 않았다.

‘공왕 폐하께서는... 정말...’

호른 경이 침음을 삼키며 괴로워했다.

‘...정말 아름다우시다.’

그도 딱히 정상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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