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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458화 (458/605)

458화. 품격

로벨이 가로로 한 번, 세로로 두 번 주름 잡는 사이 싸움개 닥스가 헐레벌떡 뛰어와 보고했다.

“맨앳암즈 제1소대 전투준비 끝났습니다요!”

“...일단 대기해.”

전장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이 복받쳐 오르는 분노를 눌렀다. 냉철히 생각하니 해적들의 함정일 가능성이 높았다. 로벨은 적진을 살피기 위해 성탑의 원형 계단을 오르며 전황을 검토했다.

해적들은 며칠째 잠을 제대로 못 자 사기가 낮았다. 농가를 약탈하지 못해 식량도 부족할 것이다. 며칠 더 지나면 탈영병이 나올지도 모른다.

‘해적이고 무법자니까 반란을 일으킬지도 몰라. 마도의 수호자가 죽지는 않겠지만, 저 ‘조직’은 흔들릴 거야.’

팔켄 선장인지 팔콘 선장인지 생각하면 화가 나지만, 굳이 싸움을 서두를 필요 없었다. 시간은 로벨과 울프 용병단 편이었다. 눈이 뒤집혀서 제멋대로 뛰쳐나간 철부지 기사만 아니면 말이다.

“공왕 폐하! 솔트락 경이...!”

뒷말은 들을 필요 없었다. 성탑 꼭대기에서 잘 보였다. 솔트락 경과 솔트락 가문 하인들이 암문으로 빠져나와 말에 오르고 있었다. 애꾸눈이 황당해서 중얼거렸다.

“고작 셋이서? 미친놈들인가?”

아무리 부모형제의 원수라도 백 명이 넘는 해적에게 덤빌 만큼 무모하지 않았다. 로벨이 총공격할 줄 알고 선봉을 자처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총공격할 거라 생각했거나.’

그런 의도라면 통했다.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솔트락 가문의 마지막 사내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로벨의 명예 문제이자 봉신들의 신뢰 문제였다.

“호른 경!”

이름만 불렀는데 생각까지 읽었다. 호른 경은 용병들에게 바리게이트를 치우라 명령하고 전투마를 가진 기사 종자를 호명했다.

로벨의 마음을 아는 것은 기사만이 아니었다. 모닝스타가 앞발로 말뚝을 부수고 달려왔다. 그 덕분에 로벨이 지상에 내려왔을 때는 출격준비가 끝나 있었다.

로벨은 모닝스타 안장에 오르며 소나기처럼 말했다.

“해적의 함정이오! 호른 경! 맨앳암즈 10명을 이끌고 오른쪽으로 우회하시오! 싸움개는 나머지를 데리고 왼쪽으로 가! 큰 건물과 샛길을 피하고 항상 퇴로를 확보해! 너희 셋은 나를 따라와!”

로벨은 긴장이 뚝뚝 떨어지는 호른 가문의 기사 종자를 지목했다. 17살, 18살, 그리고 20살이었다. 검은 숲에서 전사한 기사 종자를 대신해 받은 신입들로 이번이 첫 전투였다. 로벨은 눈높이에 맞춰 충고했다.

“적을 벨 생각하지 마. 내 뒤만 쫓아와.”

“예, 예옛!”

성문이 빠끔히 열렸다. 로벨은 모닝스타 옆구리를 힘껏 때렸다. 성 아래 해적 주둔지가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처음부터 돌격을 강행했다.

“가자! 이랴앗!”

작전명은... 일단 솔트락 경을 구한 다음 생각하기로 했다.

@

로벨의 의심대로 팔켄 선장의 도발은 함정이었다.

생각 없이 돌격한 솔트락 경 패거리는 골목마다 설치된 장애물-밧줄과 그물에 발이 묶였다. 병법에서 흔히 말하듯 궁병은 높이, 기병은 거리로 위력을 발휘했다. 제자리에 멈춘 기병은 무서울 것이 없었다.

“히이얏호-!”

“기사다! 죽여랏!”

선상전투로 단련된 해적들이 개구리처럼 달려들었다. 2층에서 뛰어내려 수행원을 말 아래로 끌어내리고 고기잡이 그물을 던져 칼을 쓰지 못하게 막았다. 그 다음은 그냥 쪽수와 몸무게로 짓밟았다. 크고 예리한 장검도, 철판을 두른 단단한 갑옷도 소용없었다.

“비켜라! 비켜! 이 냄새 나는 것들이!”

솔트락 경은 자루가 짧은 마상용 플레일이 휘두르며 해적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나 오래 버티지 못했다. 영리하고 용감한 해적이 말 엉덩이에 칼침을 놓았다. 전투마는 망아지 시절에 교육받은 것을 까먹고 앞발을 높이 들었다. 고삐를 놓고 무기를 휘두르던 솔트락 경은 균형을 잃고 굴러 떨어졌다.

“커허억-!”

낙마의 충격이 가시기 전에 비열한 얼굴들이 하늘을 가렸다. 욕심이 가득한 눈과 지저분한 수염, 햇볕과 소금물에 그을린 까만 피부가 영 호감이 가지 않았다. 하는 짓은 더욱 그러했다.

“밟아!”

헬름과 플레이트 위로 발길질이 쏟아졌다. 저항은 불가능했다. 영악한 놈들이 바이저를 올리려고 했기에 얼굴과 겨드랑이를 감싸는 것도 벅찼다. 숨이 막히고 고통이 스며들었다.

‘왕은... 무적무패 왕은 뭐하는 것이냐...’

흐려지는 의식에 떠오른 것은 가족도, 친구도 아닌 로벨이었다. 그 기도가 그동안 서먹했던 옛 신에게 닿았다.

“솔트락 경! 솔트락 경!”

로벨이 호른 가문의 기사 종자를 이끌고 나타났다. 해적들의 지저분한 발 사이로 보이는 백마 탄 기사가 미칠 듯이 아름다웠다.

‘나의... 왕이다...’

@

로벨은 말 그대로 짓밟히는 솔트락 경 패거리를 구하기 위해 거리로 뛰어들었다. 팔켄 선장의 부하들은 두 번째 물고기를 낚으러 흩어졌다. 그런데 입질이 달랐다.

솔트락 경이 인어해에서 흔히 잡히는 정어리라면, 로벨 로드릭은 외해 가장 깊은 곳에 사는 대왕고래였다. 그물이나 낚싯줄로 잡을 수 없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휘둘러 기수 높이에 걸린 밧줄을 자르고, 왼손으로 흐룬팅을 뽑아 덮쳐오는 그물을 갈기갈기 찢었다. 창을 찌르면 쳐내고, 갈고리를 내밀면 부쉈다. 그 무엇도 로벨과 모닝스타를 막을 수 없었다.

“저게 가능해? 저거 뭐야!”

“그물! 그물을 더 가져와!”

해적들은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지만, 요정의 검과 신수(神樹) 파나케아 투구의 힘이었다. 물론, 무구를 다루는 주인의 솜씨 또한 훌륭했다.

‘이것이 무적무패의 왕...’

‘그랜드 챔피언의 능력인가!’

로벨을 뒤따르는 새내기 종자들은 감탄을 넘어 감동했다. 자작나무 숲의 기사로 명성 높은 마스터가 무적무패 왕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을 붉히고 흥분하는지 알 것 같았다. 기사라면, 칼을 쥔 사내라면 반할 수밖에 없는 용맹이었다.

“솔트락 경! 괜찮소? 죽었으면 말하시오!”

로벨은 함정과 복병을 단숨에 돌파해 솔트락 경이 쓰러진 골목 입구에 도착했다. 몰매를 놓던 해적들은 아침해에 놀란 소악마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로벨은 쫓지 않았다. 모닝스타에서 뛰어내려 솔트락 경을 살폈다.

“공왕... 공왕 폐하...”

“오? 살아 있소?”

갑옷을 만든 장인에게 감사편지를 써야 할 것이다. 부실한 갑옷을 입은 수행원 셋은 모두 전사했다.

“폐하! 성으로 돌아갑니까?”

가장 어린 기사 종자가 물었다. 첫 전투라 크게 흥분한 다른 종자보다 나았다.

“아니. 이대로 중앙을 돌파하자.”

계획한 것과 다르지만, 전투는 시작되었다. 적 대장을 잡거나 병력과 물자에 피해를 입혀야 했다.

로벨은 솔트락 경의 목덜미와 사타구니를 잡고 번쩍 들어 온몸으로 거부하는 모닝스타 안장 앞에 실었다.

중무장한 기사 둘이면 무게만 400파운드에 이르는데, 신수(神獸)의 피가 흐르는 모닝스타는 콧김만 뿜을 뿐 끄떡없었다. 낯선 기사를 거부하는 것은 취향 문제지 체력 문제가 아니었다.

‘밧줄로 묶을까?’

로벨은 짐짝이 된 솔트락 경을 걱정했다. 격하게 움직이면 다시 떨어질 것 같았다. 목덜미와 허벅지에 밧줄을 걸어 모닝스타 몸통에 묶으면 빠르게 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했다. 기세에 눌려 도망간 해적들이 무리 지어 다시 접근했다.

로벨은 모닝스타 고삐를 해안쪽으로 당기고 존경의 눈빛을 쏘아대는 기사 종자에게 말했다.

“호른 경과 싸움개가 좌우에서 공격하면 길이 열릴 거야. 그 틈에 해적두목을 잡으면 돼.”

“그, 그게 말처럼 쉬운 것 같지 않습니다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해적만 30여 명이었다. 해안에는 더 많을 것이다.

“난 할 수 있어. 따라와.”

‘우리가 못한다고요!’하고 항명하지 않은 것은 로벨이 대뜸 달려나갔기 때문이다. 기사 종자들은 서로를 한 번 보고 별수 없이 뒤쫓았다. 왕을 두고 도망가면 호른 경이 지옥 끝까지 쫓아와 죽일 것이다.

그리고 무적무패의 신화를 생각하면 뭔가 해낼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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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신위가 다시 발휘되었다.

말이 달리기 좋지 않은 좁은 길에 살의를 가진 무법자가 세 자릿수 있음에도 거침없이 돌파했다. 사람이 막으면 죽이고, 장애물이 막으면 부쉈다.

사실 그랜드 챔피언이라도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호른 경과 싸움개가 외곽에서 공격해 해적무리가 분산되었다. 함정도 사람이 있어야 작동하니 세 방향에서 공격한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창끝이군.”

팔켄 선장은 보트를 뒤집어 만든 막사 안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재미있게 생겼다는 이유로 부선장을 시킨 ‘꼬마’가 헤헤 웃으며 잔을 채웠다.

“창끝이라니요?”

팔켄 선장은 해적답게 기분이 좋을 때 친절하고 기분이 나쁠 때 사나웠다. 다행히 지금은 기분이 좋았다.

“수비는 전신 갑옷으로 하지만, 공격은 창끝 한 점으로 한다는 말이다.”

“오오! 아주 멋진 말이군요!”

“저 깡통들이 추종하는 샘 포클 왕이 한 말이지.”

팔켄 선장은 술잔을 깨끗이 비우고 일어났다.

“북쪽과 남쪽의 용병놈들은 신경 쓸 거 없다.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수작이지. 창끝은 오직 하나다.”

“싸, 싸우실 건가요? 무적무패 왕인데요?”

싸움을 못하는 ‘꼬마’가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팔켄 선장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천 년 묵은 고대의 왕과 죽여도 죽지 않는 불사신이 당했는데? 내가 무슨 수로? 저건 괴물 중의 괴물이야! 괴물의 왕이라고!”

해적선 ‘더치맨’의 선원이 볼 때는 팔켄 선장도 끔찍한 괴물이었다. 그런 괴물이 괴물이라 부르니 실로 무시무시했다. 팔켄 선장은 숨을 고르고 조그맣게 말했다.

“애들아.”

“예, 선장님!”

“말씀하십시오!”

소금바위 마을에는 200명 가까운 무법자가 있지만, 플라잉 더치맨의 선원은 이곳에 있는 35명이 전부였다. 가장 용감하고, 가장 잔인하고, 가장 충성스러운 유령선의 해적이었다. 팔켄 선장은 생전에 만든 금니를 보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튀자.”

해군이나 무장상선이 나타나면 도망가는 것이 해적이었다. 기사가 중시하는 명예는 물론이고, 코흘리개 수준의 우정도 없었다.

지금껏 따라준 패거리들의 눈치가 보여서 도망 못 갔는데, 저리 정신없이 바쁘니 안심하고 작별해도 될 것 같았다.

“뭣들 하냐! 선장님 말씀 안 들리냐!”

“창끝이 다가오잖아! 싸게싸게 짐 싸서 튀자고!”

첫 만남 때도 생각했지만, 정말 품격이 떨어지는 마도의 수호자였다. 늑대의 왕이나 뱀파이어 군주가 알면 이마를 짚고 아는 척하지 마라 말할 것이다.

팔켄 선장은 보트 난간에 한 발 올리고 피비린내 나는 마을을 향해 멋지게 인사했다.

“그럼 또 봅시다, 위대한 마도의 왕.”

“어? 벌써 저기 왔는데요? 지금 볼 수 있을지도...”

“취소! 취소하오! 가능한 만나지 맙시다! 야! 뭣하냐! 빨리 노 저어라!”

어쩌면 요정왕조차 모른 척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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