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화. 선장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사흘간 농장에 머물렀다.
비를 맞으며 행군해 체력이 떨어진 탓도 있고, 예민한 병장기가 말썽을 피운 탓도 있었다. 그래도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았다. 하루 거리의 소금바위 마을을 정탐하고 또 정탐했다.
“숫자는 170명에서 180명이고, 전부 해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해안? 영주성이 아니라?”
암문(暗門)으로 성 안에 침투한 용병이 신체 일부를 걸고 맹세했다. 영주의 성은 텅 비어 있었다.
“공왕 폐하가 온 걸 아는 게 아닐까요? 여차하면 튀려고...”
“그러면 굳이 영내에 머물 이유가 없잖아.”
“해적이지 않습니까. 수성할 줄 모르는 모양입니다.”
입장 바꿔서 생각하니 그럴듯했다. 공성전에 이골이 난 기사와 용병을 상대로 성에서 버티는 것은 무모했다. 재산목록 1호인 해적선을 잃을 위험도 있었다. 그럴 바에 차라리 도주로를 확보하는 것이 옳았다.
“영리한 건가?”
“진정 영리하면 폐하가 오기 전에 떠났겠지요.”
아부라 하기에 애매했다. ‘무적무패’ 신앙을 가진 울프 용병단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신앙의 대상은 퍽 난감했다.
“그렇게 조심성이 많으면 마을 밖으로 끄집어내기 힘들겠는데...”
애초에 2개 소대만 동원한 이유가 적을 방심시키기 위해서였다. 수백 명을 끌고 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갈 테니 말이다. 경험이 부족한 솔트락 경이 어설픈 제안을 꺼냈다.
“야습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전쟁 소설에서 심심하면 나오는 것이 야간기습이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칠흑 같은 밤이면 고향땅에서도 길을 잃고 헤매는데 낯선 땅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차! 하는 순간 뿔뿔이 흩어져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다. 싸움개가 싸움개답게 제안했다.
“그냥 우직하게 정면대결하시죠!”
중장병이 앞장서고 쇠뇌병이 엄호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허나, 그걸 몰라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었다.
“피해가 클 거야.”
울프 용병단의 피해도 피해지만, 소금바위 마을의 피해가 막대할 것이다. 솔트락 경이 못마땅하게 쳐다보자 싸움개가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으로 믿음직한 호른 경이 제안했다.
“영주성이 비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정보를 가져온 용병이 열정적으로 끄덕였다. 생식활동의 꼭 필요한 부위를 내건 탓이다.
“그러면 기사답게 상대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기사답다는 말은 복잡한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한 가지 뜻으로 통했다.
“아주 좋은 생각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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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보리 농장의 나흘째 아침이 밝았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풀롭 씨의 도움을 받아 아침식사를 든든하게 한 후 소금바위 마을로 출발했다. 옛 신의 천사가 기상나팔을 불어준 듯 화창한 날씨였다.
왕의 땅을 무단점령한 해적들은 다급히 수비태세를 취했다. 해안가의 집을 허물어 바리게이트 삼고, 기름과 화약을 곳곳에 배치했다. 그러나 마을이 불타는 일은 없었다. 해적 하나가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쟤네 어디 가는 거야?”
정말로 몰라서 물은 게 아니다. 수평선과 기러기로 단련된 두 눈이 있으니까. 로벨 일당은 소금바위 마을이 아니라 영주의 성으로 들어갔다. 싸움개가 얼빠진 해적들을 향해 못된 손짓을 했다.
“우리 폐하의 주특기가 빈집털이다! 어떠냐?”
“음... 주인이랑 같이 왔으니까 빈집탈환이라 하자.”
그러나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소금바위 성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성문은 한쪽이 망가져서 반만 닫히고, 성벽의 나무 계단은 불에 타 주저앉았다. 성탑을 통해 오를 수 있지만 무기를 나르거나 부상자를 빼낼 때 기민함이 떨어졌다. 헛간이나 마구간 같은 시설도 대부분 파괴되었고, 아성에는 그을림이 가득했다.
“옛 신이시여...”
1층 홀에는 시체가 가득했다. 최후까지 저항하다 연기에 질식한 기사와 기사 종자,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었다.
로벨은 코를 막고 시체 더미를 한 바퀴 돌았다. 열기와 습기로 부패해서 악취가 대단했다. 시궁쥐와 구더기가 썩은 살을 파헤쳐 살아생전의 용기와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메인 홀을 한 바퀴 돌아 창가에 이르렀을 때 호른 경이 조사를 마치고 찾아왔다.
“기습입니다. 성문이 닫히기 전에 밀고 들어와 불을 질렀습니다. 외성의 병사들은 저항조차 못하고 당했습니다.”
로벨은 손가락 두 마디 남짓한 창틈에 그을음을 만졌다.
“이들은 싸웠소.”
호른 경은 헬름을 벗어 옆구리에 끼었다.
“아성의 문이 손상된 것을 보아 영주 일가족은 격렬히 저항한 모양입니다. 해적들은 창칼로 당해낼 수 없자 창문과 문틈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 듯합니다.”
그 이상은 설명할 필요 없었다.
“솔트락 경에게 수습을 맡기시오.”
손을 보태지는 않았다. 죽은 자를 위로하는 것보다 급한 일이 있었다.
“싸움개, 성문을 보수해. 수리하기 힘들면 자재를 모아서 그냥 막아.”
싸움개 소대는 힘쓰는 일에 자신이 있어 바로 움직였다.
“애꾸눈은 성탑을 비우고 사수를 배치해. 보조 인력이 없으니 쿼럴을 최대한 많이 가져가.”
애꾸눈은 목례 후 크로스보우 소대를 모았다. 로벨의 일일이 명령하자 한 사람도 게으름 피우지 못했다. 성탑 꼭대기까지 일렬로 서서 무기와 식량을 옮기고, 불에 탄 창고에서 쓸 만한 자재를 건져 투닥투닥 두드렸다. 폐허가 된 성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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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들은 성(城)의 위력을 우습게 알았다.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버티는 수비시설로 오해하기 쉬우나, 성은 그 자체로 막강한 전술병기였다.
“지금 같은 상황이면 더욱 그렇지.”
해적은 높은 성벽을 넘어 공격할 수 없지만, 울프 용병단은 낮이든 밤이든 몰래 빠져나가 쿼럴을 선물했다.
“고대왕국 시절부터 샘 포클 시대까지 수많은 장군이 성을 두고 그냥 지나치지 못한 이유지. 언제든지 뛰쳐나와 공격할 수 있으니까.”
성 안에서는 이쪽을 훤히 내다보는데, 성 밖에서는 저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부담도 있다.
이런 문제를 덜어내려면 성 전체를 포위하고 맹렬히 공격해야 하는데, 해적의 병력과 무기로는 불가능했다. 며칠 지나자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작은 소란에도 화들짝 놀라는 신경쇠약에 걸렸다.
“경이 해적이면 어찌하겠소?”
로벨의 물음에 호른 경은 미소 지었다.
“공성무기가 없으니 싸울 수 없고, 기습당할까 두려우니 멀리 갈 수도 없지요. 제가 해적이면 배를 타고 철수할 것입니다.”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적선은 수백 야드 떨어진 정박지에 있었다. 보트가 아무리 커도 170명의 인원과 물자를 한 번에 옮길 수 없으니 낌새가 보이면 로벨이 나가 짓밟을 것이다.
“이만한 일로 도망칠 거면 지금껏 버티지도 않았을 거요.”
“그러면...”
“저들을 조종하는 게 마도의 수호자라면 본인을 만나기 위해 회담을 요청할 것이오.”
로벨의 예상은 절반만 맞았다. 해적무리가 찾아와 회담을 요청했다. 칼을 갈고 갑옷을 닦으며 어떤 괴물이 찾아오나 고대했는데, 괴물은커녕 뱃사람이라 해도 믿기지 않을 중년 신사가 나타났다.
“본인이 팔켄 선장이오.”
심지어 동방인도 아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커다란 샤프론을 감고 비단으로 지은 우플랑드와 염소가죽으로 만든 브레를 입었다. 진짜 신사 계급인 풀롭보다 더 신사 같은 볼탄 반도인이었다.
“난 로벨 로드릭이야.”
로벨은 잡동사니로 틀어막은 성문 틈새로 해적두목을 보았다. 혼란스러웠다.
“진짜 이름이 뭐야?”
해적 두목은 어리둥절하다가 환하게 웃었다. 오른쪽 발을 뒤로 빼고 상체를 비스듬히 숙이며 다시 인사했다.
“진명(眞名)을 숨길 만큼 오래된 영혼이 아니니, 이 보잘것없는 몸을 부를 때는 팔켄으로 충분하오. 혹여 이름을 부르기 민망하면 캡틴 팔켄이라 불러도 좋소.”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뱃사람이 아니라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 선장이나 청옥성의 기사가 이곳에 있었으면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혹시 별명 같은 거 없어? 바다의 왕이나 파도의 중년 남자나...”
“별명을 짓기에 늙은 나이지만, 일부 바다 사나이들은 경의를 담아 북해의 유령, 주사위의 악마, 방황하는 더치맨(Flying Dutchman)의 팔켄베르크 선장이라 부르곤 하오.”
첨언하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유령선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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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상대의 정체를 알고 더욱 혼란에 빠졌다. ‘유령선의 선원이면 유령이 아닌가?’ 울프 용병단이 해치운 해적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었다. 팔켄 선장은 머리 위의 살인도구를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늑대로 변하는 악마가 용병처럼 떠돌아다니고, 흡혈하는 악마가 대낮에 사람 흉내 내는 것을 보시오. 유령선 또한 과장된 소문이오.”
“그럼 죽은 게 아니야?”
“아, 물론 본인은 죽었소. 아흐레 밤낮으로 휘몰아치는 거센 폭풍우 속에서 옛 신을 저주하고 주사위를 저주하고 바다를 저주하다 그만 빠져 죽고 말았지. 그리고 뜨거운 피 대신 차가운 소금물이 흐르는 팔켄베르크 선장으로 다시 태어났소.”
“그러니까 괴물이란 거잖아.”
로벨은 광대 같은 장황한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리게이트 탓에 오래 대화하기도 좋지 않았다.
“이 마을에 왜 나타난 거야? 솔트락 가문 사람은 왜 죽였지? 나 때문이라 하면 화낼 거니까 마음의 준비하고 말해.”
“그야 물론 마도의 왕 때문...”
로벨이 오른손을 들었다. 뒤에 선 호른 경이 깃발을 흔들었고, 성벽 위의 애꾸눈이 사납게 명령했다.
“쏴라!”
해적을 상대로 명예를 논할 필요 없었다. 스무 발의 철제 쿼럴이 쏟아졌다. 퍽-! 퍼퍽! 퍽-! 살가죽 터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로벨은 칼자루에 손을 얹고 바리게이트의 가장 큰 구멍으로 팔켄 선장을 보았다.
“으으... 진짜 쏠 줄이야...”
역시 마도의 수호자였다. 불사신 코셰이만큼은 아니어도 쉬이 죽지 않았다. 구울처럼 땅을 짚고 다시 일어났다.
“사, 살아있다!”
“저건 또 무슨 괴물이야?!”
성벽 위 크로스보우맨 중대가 웅성거렸다. 애꾸눈이 동요하지 않게 손을 썼다. 정확히는 주먹과 발로 때렸다. ‘자리를 지켜! 괴물 처음 봐? 재장전이나 해!’ 로벨은 잠깐 사이 엉망이 된 팔켄 선장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내 손에 죽은 수호자가 몇 명인지 알아?”
“...그거 협박이오?”
“응. 협박이야.”
“정말 무섭군.”
전혀 무섭지 않은 말투였다. 로벨이 다시 오른손을 들자 화급히 말했다.
“사실 이유는 없소. 이깟 일로 공사다망한 마도의 왕이 올 줄도 몰랐지. 가만 생각하니 억울하군. 왕이란 작자가 왜 이리 한가하오?”
“나 때문이 아니면, 왜 사람들을 죽였지?”
“해적이 해적질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소? 늙고 병든 영주의 마을이 있으니 그냥 털었소.”
더 상대할 필요 없었다. 회담은 끝났다. 로벨은 직접 소리 내어 명령했다.
“쏴!”
애꾸눈을 필두로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팔켄 선장은 껄껄 웃으며 도망쳤다. 엉덩이와 종아리에 몇 발 맞았는데 그리 아파 보이지 않았다. 호른 경이 어이없어서 물었다.
“저건 또 뭐하는 괴물입니까?”
지금까지 만난 마도의 수호자 중 가장 품격이 떨어지는 자였다. 그러나 가진 능력은 악마의 것이 분명했다.
“용서하지 않겠어. 전원 전투준비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