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56화 (456/605)

456화. 원한

로벨은 크로스보우맨 제1소대와 맨앳암즈 제1소대를 소집했다. 숫자에서 알 수 있듯 울프 용병단 최정예 부대였다. 이 최고의 용병들은 갑작스러운 소집에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아, 왜 또 우리야!”

“안 가! 못 가! 원정 멈춰!”

그동안 고생했으니 장마와 무더위가 아니어도 불만이 나올 때가 되었다. 물론, 받아주지는 않았다. 로벨은 왕의 위엄이나 기사의 폭력으로 불만을 잠재우지 않았다.

“해적이 마을을 점령했어.”

“해적을 잡을 거면 해군을 보내야지요!”

“이안 선장을 보냅시다!”

로벨은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그럼 보물은 선원들 몫이네?”

페닝 이꼴 만병통치약 가설을 포기하지 않았다. 바로 진정제 효과가 나타났다.

“...보물이요?”

“해적하면 보물이잖아? 기억 안 나?”

‘제1소대’ 용병은 4년 이상 복무한 고참 용병이었다. 다시 말해 발레아 제도 해전에 참가한 용병과 그때 일을 귀에 딱지가 앉게 들은 용병이었다. 로벨은 몸을 돌리고 ‘크게’ 말했다.

“억지로 끌고 갈 수 없으니까. 어린 집사, 예정대로 백상아리 호에 연락해서...”

“에이! 에헤이! 삐쩍 골은 뱃놈들이 무슨 힘을 쓴다고 그럽니까요?”

“해적은 제 증증고조할아버지의 원수입니다! 제게 복수할 기회를 주십시오!”

어린 집사 가라사대 반짝이는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전쟁수당과 더불어 해적의 전리품을 약속받자 사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로벨은 병장기를 휘두르며 전의를 불태우는 4년차 수하들을 보고 뿌듯해 했다.

“역시 최고의 용병단이야.”

페닝을 잘 버는 용병이 최고의 용병이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반면, 어린 집사는 계절 하나를 넘기지 못하고 또다시 출정하는 로벨과 울프 용병단에 한숨을 쉬었다. 웃고 넘길 일이 아니었다. 왕실 예산의 절반을 전비(戰備)로 쓰고 있었다. 로벨이 움찔해서 변명했다.

“그만큼 벌어오잖아.”

“공왕 폐하의 가문이 망하지 않은 이유죠.”

수 백, 수 천 명이 아니라 47명의 소규모 원정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폐하가 직접 가실 필요 있나요?”

“내가 아니면 누가 가?”

“저기 많잖아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찾아온 호른 경 패거리와 솔트락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가 된 차남 도미닉 솔트락 경 패거리가 40명이 아닌 이유였다.

“내가 안 가면 용병 숫자를 두 배로 늘려야 해.”

“어서 준비하세요! 어서요!”

로벨은 필드 아머를 점검하고 소드 벨트를 찼다. 새 갑옷을 못 입어 조금 아쉬웠다.

“이번에 다녀오면 완성되었겠지?”

“수도원이요?”

“응? 으응. 맞아.”

로벨은 대충 얼버무리고 아성 밖으로 나갔다. 호른 경이 흉갑에 주먹을 붙이고 간략히 예를 표시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항상 고맙고 매번 반가운 호른 경이었다. 로벨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로 호의를 받았다.

“이번에도 잘 부탁하오.”

그래도 명색이 전쟁이라 훈훈하지만은 않았다. 도미닉 솔트락 경이 말라비틀어진 고목 같은 얼굴로 다가왔다.

“공왕 폐하 만세.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솔트락 경은 얼마 전 기사로 서임 받은 20살 청년이었다. 고된 종자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가족을 잃었으니 심정이 안 좋은 것은 당연했다. 해적은 물론이고 진작 군대를 보내주지 않은 로벨도 원망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오.”

로벨은 말없이 원망을 받아들였다. 왕으로서, 그리고 기사로서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출발 준비가 끝났습니다.”

애꾸눈 볼포스가 다가와 나직이 말했다. 울프 용병단 40명과 수레 2대가 무겁게 치장한 채 성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어린 집사, 펄프 대장, 늑대성을 부탁해.”

펄프 대장이 황송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용병 대장이면 응당 고용주를 따라가야 하지만 나이가 나이라 민첩하게 움직이기 힘들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아무리 늦어도 가을 추수 전에 올 거야.”

로벨은 펄프 대장을 안심시키고 모닝스타에 올랐다. 어린 집사는 표적을 바꿔 호른 경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로벨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호른 경뿐이니, 그의 역할이 아주 중요했다.

“출발.”

“출발하라신다-!”

성문을 지나 깃발이 높이 올라갔다. 기사와 기사 종자가 앞장서고 용병과 수레가 뒤를 따랐다. 목적지는 해적과 보물과 원한이 감도는 동해 소금바위 마을이었다.

@

전쟁 소설이나 영웅 소설에서는 한 장 넘어가면 전장에 도착해 주둔지를 설치하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지금은 일 년 중 가장 많은 비가 내리는 우기였다.

깔끔히 포장된 늑대도로를 지날 때는 옷과 신발이 조금 젖을 뿐이지만, 게으른 영주가 관리하는 비포장 가도를 지날 때는 금방 흙투성이가 되었다. 정교한 기계 장치를 다루는 아바레스터들은 밥벌이 도구가 망가질까 온몸으로 비를 막으며 행군했다.

“우리도 뭐 다르지 않수.”

싸움개가 축 젖은 방수포를 치우고 투덜거렸다. 자유민 출신으로 소위 ‘있는’ 맨앳암즈라 장비가 고급이었다. 병장기는 죄다 날붙이고 갑옷은 사슬과 비늘이라 비를 오래 맞으면 녹이 슬었다.

사춘기보다 전쟁을 먼저 치른 로벨이기에 고참 용병이 조언하지 않아도 문제를 알고 있었다.

“솔트락 경, 해적이 있는 마을에 들어가기 전 재정비할 수 있는 곳이 있소?”

솔트락 경은 바이저 위에 고인 빗물을 털어내고 남동쪽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3마일쯤 가면 보리 농장이 있습니다. 집이 크고 헛간이 많으니 비 그칠 때까지 머물기 좋습니다.”

“좋소. 그곳으로 갑시다. 혹시 모르니 사람을 보내시오.”

솔트락 경은 즉시 수행원을 호출했다. 체격이 좋은 중년 하인이었다. 호른 경은 곁눈질하다가 자기 쪽 사람을 추가했다.

“해적 무리가 가까우니 혼자는 위험하오. 내 사람이 도와줄 것이오.”

그것은 핑계였다. 호른 경은 솔트락 경을 믿지 않았다. 의심스러운 행동을 해서가 아니다. 로벨을 위해 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의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쉴 수 있어! 기운을 내!”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로벨은 용병단을 격려하며 앞장서서 남동쪽으로 향했다. 3마일은 가까운 듯 먼 거리였다.

@

솔트락 경 말대로 보리 농장이 있었다.

들짐승이 들어오지 못하게 빙 두른 울타리 너머로 노랗게 익은 가을보리가 넘실거리고, 고랑 사이사이에 빗물이 흐르자 행복한 개구리와 처량한 오리가 소리 높여 울었다.

거짓말처럼 비가 그친 농장 입구에는 먼저 온 수행원과 허리 굽은 노인이 있었다.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농장 주인이 분명했다.

“공왕 폐하 만세. 저는 황금 보리 농장의 주인 풀롭입니다.”

빗물에 품위가 씻겨나갔지만, 그래도 필드 아머와 모닝스타의 늠름함은 건재했다.

“몸을 말리고 식사를 하고 싶은데, 가능할까?”

로벨은 금화를 꺼내보였다. 어린 집사가 없으니 마음껏 쓸 수 있었다. 어차피 농장 주인에게 선택권이 없어도 말이다.

“크나큰 영광입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이 정도 크기의 농장 주인이면 나름 교육받은 젠트리였다. 가난한 농부나 일자무식 농노하고 달랐다. 그 증거로 왕과 왕의 기사는 식사 자리에 초대하고, 천박한 용병들은 수퇘지 한 마리 주고 구워 먹듯 삶아 먹든 알아서 하라고 방치했다. 사실 용병 입장에서도 이쪽이 좋았다.

“공왕 폐하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갓 잡은 새끼돼지에 귀한 후추를 왕창 뿌리고 설탕 묻힌 하얀 밀빵을 곁들여 내놨는데 안 맞을 리 없었다.

“늑대성에서 먹는 것보다 훌륭해.”

거짓과 과장이 1온스도 없는 칭찬이건만, 농장 주인은 재미있는 농담이란 듯 ‘으허허!’ 웃었다.

그렇게 즐거운 식사가 반쯤 진행되었을 때, 농장 주인이 호스트용 나이프를 놓고 분위기를 잡았다.

“소금바위 마을의 해적을 소탕하러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로벨은 살코기를 쭉 찢으며 솔트락 경을 가리켰다.

“여기 있는 기사가 소금바위 가문의 새 주인이야.”

“오오! 영주 가문의 무사하신 나으리가 계셨군요! 다행입니다!”

농장 주인이 기뻐하자 솔트락 경은 돼지고기를 꽉 쥐어 터트렸다.

“해적놈들이 다행이지! 내가 영지에 있었으면 그리 쉽게 당했을까!”

젊은 기사의 패기는 왕도 말릴 수 없었다. 로벨과 호른 경은 대충 호응해주었다. 하지만 농장 주인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요. 아닙니다. 그곳에 안 계셔서 천만다행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혹시 날 모욕하는 건가?”

신세 지면서도 툭하면 화내는 것 역시 젊은 기사의 특징이었다. 농장 주인은 앙상한 두 손을 휘저었다.

“그럴리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보고 들은 것이 있어 그렇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농장 주인은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을 면밀히 살폈다. 신앙심이 깊어 보이는 사람은 없지만, 혹여 이단심문관과 친분이 있는 자가 있으면 곤란했다.

“그것들은 보통 해적이 아닙니다.”

“무적무패 왕의 땅을 겁 없이 차지했으니 확실히 보통은 아니지.”

호른 경이 웃음기 없이 웃었다. 하지만 농장 주인은 진지했다.

“그, 그렇습니다. 그래요. 그것들은 악마입니다. 심해에서 올라온 진짜 바다의 악마요.”

로벨은 작게 기침했다. 돼지 뼈가 목에 걸린 것 같았다.

“요즘 자주 보네.”

“예, 예?”

“그 악마 말이야.”

북쪽, 남쪽, 동쪽에서 찾아오더니, 이제 바다에서까지 찾아왔다.

@

호른 경이 뒤통수로 말했다.

“머리 없는 기사, 듀라한일까요?”

로벨과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늦은 시간 굳이 객실로 찾아와 밀담을 시도했다.

로벨은 빗물이 덜 빠져 꿉꿉한 아밍 더블릿을 벗어 벽난로에 걸고 우플랑드를 뒤집어썼다.

가슴가리개까지 젖은 탓에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봉긋하게 솟은 상체와 새하얀 하체가 낯설었다. 못 볼꼴을 많이 보인 사이지만, 제정신으로 맨살을 자랑할 수 없었다.

“죽음의 전령이 해적과 어울릴 것 같지 않소. 그리고 머리 없다고 놀리면 화낸다고 하니 조심하시오.”

로벨은 담요를 둘러 몸을 가린 후 돌아봐도 좋다고 말했다.

“그럼 불사신의 뒤를 잇는 새로운 악마겠군요.”

호른 경이 새빨간 얼굴로 말했다. 농장 주인이 호의로 지핀 벽난로 때문이 아니었다. 로벨의 얼굴도 덩달아 빨개졌다.

‘키르케와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로벨은 늑대들과 뒹굴고 있을 마녀를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을 다시 했다.

‘키르케가 있었으면 지금 상황을 많이 놀렸겠지?’

로벨은 잡생각을 지우고 당면한 문제에 집중했다. 농장 주인의 말을 전부 믿을 수 없지만, 아닌 땐 굴뚝에 연기 나는 법은 없으니 조심하기로 했다.

“마도의 수호자가 있으면 차라리 잘 됐소.”

“어째서 말입니까?”

“그만 좀 오라고 혼내줄 수 있잖소.”

로벨은 두 다리를 모으고 머리를 숙였다. 그래서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었다. 호른 경은 여러 의미로 집중할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