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55화 (455/605)

455화. 이름

늑대성에는 연자방아와 갑옷공방 외에도 몇 가지 거국적인 사업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수도원 건립이었다.

“곤란해.”

“곤란하죠.”

로벨과 리암 수사가 야심차게 준비했지만 다른 사업에 비해 순탄치 못했다. 교회의 허락이나 건설자금 확보 같은 사소한 문제는 금방 해결했으나...

“그냥 늑대 수도원 어때요?”

“어, 음, 늑대의 통상적인 이미지를 생각하면 수도원하고 붙여쓰기가...”

“리암 수도원이라고 할까?”

“으헤헤헤... 그것도 좀...”

“...좋은 거야, 싫은 거야?”

칼과 주판으로 명성을 떨치는 인재가 모였지만, 인문학적 소양은 7살 코흘리개 집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도 수도원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성자 중에 이름을 하나 따오는 게 어때?”

“성유물이 있어야 그럴듯하죠.”

“기사님도 나중에 성자 비슷한 거 되지 않을까요? 아무거나 하나 내놔보세요.”

“...무슨 뜻이야?”

이름은 없어도 주춧돌은 생겼다. 장소는 로드릭 시티 동쪽 목초지 언덕이었다. 늑대성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곳이라 옛 신을 찬미하기 좋았다. 물론, 땅값이 싸고 조용한 이유가 더 컸다.

로드릭 시티, 노스폴드 시티, 페르젠 시티 세 곳에서 석수와 목수가 총동원되었다. 리암 수사는 수도원 이미지에 어울리게 검소하고 소박하게 지을 것을 요구했지만, 무적무패 왕에게 잘 보이고 싶은 후원자들은 무조건 크고 화려하게를 외쳤다. 그 결과 외형은 소박한 돌담인데 내부는 값비싼 대리석과 황동으로 채워졌다.

“옛 신이시여. 이건 너무... 너무...”

리암 수사는 성호를 긋고 한탄했지만 로벨과 어린 집사는 흡족해했다.

“어린아이들을 돌보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어차피 우리 돈도 아닌데요. 나중에 팔아치울 때 좋겠어요.”

어린 집사의 행복한 웃음에서 알 수 있듯 비용은 거의 들지 않았다. 옛 신의 교단에서 공왕의 신앙심을 찬양하며 각종 성물을 보냈고, 페르젠 백작을 비롯한 여러 영주와 부르주아가 성의껏 자금을 바쳤으며, 순례자와 기사단원이 찾아와 일손을 거들었다.

로벨은 안장뿔에 몸을 기대고 느긋하게 건설현장을 바라보았다. 기도실과 기숙사는 지붕 빼고 완공되었고, 서재실, 필사실, 접객실, 창고 등이 차례로 올라가고 있었다. 검은 바위 수도원이나 붉은 장미 수도원 같은 유서 깊은 곳에 비하면 규모가 작지만, ‘수도원’이라 불릴 만한 것은 모두 갖췄다.

“역시 이름이 있어야 하는데...”

로벨의 최대 고민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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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절정에 이르자 살아있는 것과 아닌 것이 모두 녹아내렸다.

새벽이슬은 아침 해가 뜨기 무섭게 증발하고, 초목은 파랗게 타들어가다 제 무게를 못 이겨 기울어지고, 털이 많은 짐승들은 혓바닥으로 수증기를 피어 올렸다.

“세상에는 피할 수 없는 것이 세 개 있어요.”

어린 집사는 대야에 발을 담그고 풀어 헤친 몸뚱이에 쉴새 없이 부채질했다.

“세금과 죽음과 저 빌어먹을 태양이죠.”

로벨은 오래전 작고한 늙은 집사를 떠올렸다. 레이디의 품위와 집사의 교양을 중시하던 깐깐한 집사가 지금의 집사를 보면 뭐라고 할까.

‘이게 다 외팔이 때문이야.’

로벨은 착한 집사에게 못된 말을 가르친 울프 용병단을 탓했다. 옛 로드릭 마을 주민의 증언은 다르겠지만, 그것이 추억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조금만 지나면 장마야.”

우기라고 하지만, 인어해의 영향이 강한 남쪽 지방에 비하면 그리 많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벼는 물론이고, 수수(高粱)도 키울 수 없었다. 그래도 더위는 잠시 물릴 수 있었다.

“비구름이 지나면 가을이고, 수확이 끝나면 겨울이고, 눈이 내리다 그치면 다시 봄이고...”

어린 집사가 중얼거렸다. 로벨은 친애하는 벗이 더위에 실성했나 의심했다. 어린 집사는 부채질을 멈추고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말했다.

“사계절 수도원 어때요?”

“별로야.”

“칫.”

이름 짓기에 난항이 계속되는 가운데 새 이웃이 희소식을 가져왔다. 어린 집사가 가장 좋아하는 소식이었다.

“금! 노란 금! 깨물어도 안 아픈 진짜 노란 금!”

뱀의 계곡 슐츠 광산에서 금괴를 보냈다. 정확한 가치는 감정해야 알겠지만, 크기와 무게를 보아 제임스 가문이 바친 금덩어리하고 비슷했다.

“이거 하나가 1만 페닝이면... 히히힛! 히힛!”

늑대성의 자산을 생각하면 1만 페닝은 그렇게 많은 액수가 아니었다. 로벨이 토너먼트를 찾아다닐 때도 우승 한 번이면 1만 페닝 가까이 벌었다. 우승이 쉬운 일인가는 둘째 치고, 그리 희귀한 금덩어리가 아니었다.

“뭘 모르는 소리! 지속 가능한 수입과 단타로 들어오는 수입이 같지 않죠! 부자들이 괜히 금광금광~ 노래 부르는 게 아니에요!”

늑대성에는 ‘지속 어쩌고 수입’이 금광 말고도 많았다. 북부대로와 소금광산, 그리고 버팅거 시티 식품공장에서 상반기 수익을 보내왔다. 이걸로 지난 가을과 올 봄에 소모한 전쟁비용을 모두 충당했다. 어린 집사는 며칠 전까지 헥헥- 거리던 것을 잊고 성 안팎을 뛰어다녔다. 로벨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페닝은 만병통치약이 아닐까?”

시청각적으로 헥헥- 거리는 아야와 이야카가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았다. 로벨은 은화 하나를 슬그머니 내밀었다가 외면 받고 정정했다.

“아니네.”

그리고 장마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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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의 비는 장사 망한 상인이나 시집 못 간 노처녀로 비유되었다. 한 방울 두 방울 간헐적으로 내리다가 어느 순간 장대처럼 쏟아 붓고 다시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졌다. 다시 말해 종잡을 수 없었다.

“이제 좀 살 거 같네요.”

마녀 키르케는 덧창 너머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아 고양이처럼 날름거렸다. 그러자 아야와 이야카가 무거운 몸을 문가로 옮겨 따라 했다. 날름. 날름날름.

축복받은 여름비였다. 가을 작물을 배불리 먹일 뿐만 아니라 용광로처럼 펄펄 끓는 땅과 하늘을 잠시 식혀주었다. 반쯤 녹은 채로 다니던 늑대성 짐승들과 짜증과 분노를 표출하던 용병들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서 로벨도 한 시름 덜었다.

‘나 혼자 멀쩡해서 미안했는데...’

로벨은 계절을 타지 않았다. 원래도 심하게 타지는 않았는데, 마도의 수호자가 된 이후 아예 더위나 추위에 무감각해졌다. 최근에는 쇳덩이를 두르고 뙤약볕을 활보해도 끄떡없었다.

“장마가 끝나면 가을이 오겠죠?”

“며칠 더 덥겠지만, 아마도?”

“그 전에 수도원을 지을 수 있을까요?”

비가 와도 공사는 계속되었다. 지하에 물이 차면 곤란하기에 방수포를 두르고 지붕 작업을 한층 서둘렀다. 리암 수사는 거룩한 곳에 불미스러운 사고가 생길까 한시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쪽 말로는 스무날이면 마무리가 된다고 해. 길을 놓고 텃밭을 가꾸는 것은 내년까지 계속해야겠지만.”

최소 2, 3년은 잡고 해야 하는 공사가 반년 만에 끝을 보였다. 유례없는 속도였다. 어린 집사가 문지방이 된 아야와 이야카를 발로 차며 홀에 들어왔다.

“도시의 장인이 두 자릿수로 모였는데, 그 정도는 해야죠.”

로벨은 마른 수건을 젖은 집사에게 던져주었다. 젖은 집사는 머리와 얼굴을 닦다가 와락! 꾸겨졌다.

“으윽! 기름 냄새! 이거 갑옷 닦은 거죠?”

“아니야. 칼 닦은 거야.”

“그런 거 남한테 주지 마요!”

로벨은 자신의 애검이 얼마나 깨끗한지, 정향유 냄새가 얼마나 매혹적인지 설명했지만, 씨알도 통하지 않았다.

이러한 일상대화는 외부인의 개입으로 끝이 났다.

“어이구! 어이구! 공왕 폐하! 폐하!”

로벨은 창틈으로 하늘을 한번 보았다.

“빗소리가 이상해. 아이구, 아이구, 하는 거 같아.”

“저도요! 꼭 허풍쟁이 아저씨 같은데요?”

마녀 키르케가 깔깔 웃었다. 어린 집사는 주변에 정상인이 없다고 한탄했다.

“허풍쟁이 맞아요!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어린 집사는 냄새나는 수건을 아야 콧등에 올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빗줄기가 다시 거세지고 있었다.

“아아악! 집사 양반! 공왕 폐하는 어디 계시우?!”

“우리 폐하야 항상 계시는 곳에 계시죠. 그런데 댓바람부터 무슨 일이에요? 짐네 엄마랑 싸웠어요?”

이름만 불러도 얼굴이 붉어지는 시절은 지났지만, 갑자기 거론하면 당황하고 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우! 공왕 폐하한테 갑시다!”

“그러니까 무슨 일인지 알아야...”

허풍쟁이는 비에 젖은 얼굴을 세수하듯 쓸어내리고 답답함을 외쳤다.

“반란이오! 반란이 일어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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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으로 예민해지기 쉬운 사건을 접한 늑대성 소감은 얼추 비슷했다.

“미친 거 아니에요?”

로드릭 왕가의 치세가 3년째에 접어들었다. 그 전에 공작으로 4년간 통치했으면 햇수로 총 7년이었다.

“지금까지 배운 것이 없나?”

로벨이 볼탄 반도 주인으로 군림하는 동안 두 자릿수의 전쟁을 치렀다. 동부평야의 반란을 진압하고, 잉그비아 왕국, 네일 공국, 자유도시연맹, 포클랜드, 검은 숲까지 모두 굴복시켰으며, 에르나 왕국조차 혼쭐이 나서 쫓겨났다. 실로 무적이고, 그야말로 무패였다.

“평범한 반란이 아닙니다요. 소금바위 가문의 기사 나리들이 전부 죽고, 영지민도 쫓겨나서 이곳으로...”

“잠깐, 어디라고?”

“예예? 소금바위 영지 말씀입니까?”

솔트락 가문. 볼탄 반도 동해안의 작은 기사 가문이었다. 로드릭 가문과 접점이 없어 생소한 가문인데, 최근에 알현을 신청하였다.

“장남이 찾아왔었지?”

“차남이요. 해적이 출몰하니 도와달라고 했어요.”

“아, 맞아. 백상아리 호가 돌아오면 보내주기로 했었지.”

발레아 제도의 대규모 해적은 소탕되었지만, 어선이나 어촌 부두를 터는 작은 해적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대부분 동방에서 온 야만인이라 동쪽 해안의 골치였다.

“정황상 해적소행이라 봐야겠네요.”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었군요. 무적무패 왕의 기사를 해친 것도 모자라 영지까지 차지하고 눌러앉다니...”

로벨은 비를 맞으며 정보를 모아온 허풍쟁이를 따스하게 대했다.

“규모가 어느 정도야?”

“도망 나온 영지민이 한 말이라 정확하지 않지만, 100명은 족히 넘는다고 합니다.”

로벨은 영지민이 확인하지 못한 예비 병력과 새롭게 가세했을 무법자를 합쳐서 200명으로 잡았다. 그리고 동시에 토벌 가능한 아군 병력도 추산했다.

“2개 소대면 충분하겠네.”

포비아 왕국 편제로 40명 남짓이었다. 적의 1/5밖에 안 되었다.

“그래도 기사를 죽인 놈들인데요?”

“영주가 늙고 아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어난 일이야. 정상적인 승리가 아니야.”

어린 집사가 우려의 말을 더하려 하자 손짓으로 막았다.

“대군을 보내면 배를 타고 도망갈 거야. 소수정예로 끌어내서 격멸하는 게 좋아. 진짜 반란은 아니지만, 내 땅에서 나에게 반항한 일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본보기 삼을 거야.”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다년간의 경험으로 두 가지를 짐작했다. 로벨이 직접 2개 소대를 이끌고 갈 거란 것과 해적인지 반란군인지 이제 큰일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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