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54화 (454/605)

454화. 연애

정신없는 나날이 지났다.

국가 간의 싸움은 부부싸움과 달리 싸울 때보다 싸우고 난 뒤에 할 일이 많았다.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 싸우지 말자’가 아니라 ‘잘 싸웠다! 다음 싸움을 준비하자!’로 결론짓기 때문이다. 전공에 따라 포상하고, 식량과 물자를 보충하고, 새로운 용병을 고용했다.

사실 그런 일 대부분은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이 알아서 했다. 로벨은 실무자가 처리하면 최종 확인만 하면 되었다. 괜히 뒷짐 쥐고 기웃거려봐야 정신 사나우니 딴 데 가라는 핀잔을 듣거나 바짝 얼어붙은 신참 용병 탓에 머쓱하게 도망 나올 뿐이다. 하지만 로벨이 해야 할 일도 있었다.

“지금 가시오?”

로벨이 아성 문 지주에 기대서 물었다. 늑대성의 이방인은 바쁘다는 핑계로 만남을 피한 주인을 보았다.

“여름이니까.”

우여곡절이 많아 오래 머물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할 수 있는 말은 거의 없었다.

호킨 페럿 경은 말안장에 무기와 짐을 단단히 고정한 후 칼집에서 칼만 뽑았다.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해도 되겠소?”

펄프 대장의 주름이 깊이 파였다. 애꾸눈은 성문과 성벽 위 보초에게 신호를 보냈다. 쇠뇌의 시위가 소리 없이 당겨졌다. 그러나 챔피언은 챔피언을 이해했다.

“얼마든지.”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뽑아 늘어트렸다. 정말 뜬금없는 결투였다. 어린 집사가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하여간 기사들이란...’

하지만 피가 튀고 비명이 점철되는 험악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호킨 페럿 경은 기합을 지르며 칼을 수직으로 휘둘렀고, 로벨은 그에 맞서듯 보폭을 넓히며 아론다이트를 차올렸다. 두 사람의 거리는 여전히 5야드였다. 검풍에 먼지가 휘날렸다.

“역시...”

호킨 페럿 경은 혀를 차고 칼을 회수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칼집에 밀어 넣고 얼빠진 용병들에게 병장기를 치우라 손짓했다.

호킨 페럿 경은 전투마에 올라 시큰둥하게 말했다.

“맥주 맛이 그리울 것이오.”

“언제든지 마시러 오시오.”

“벗으로?”

“이미 벗이오.”

그랜드 챔피언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여운은 길지 않았다.

“이랴! 이랴앗!”

작별인사는 없었다. 호킨 페럿 경은 늑대성의 성문을 지나 도시 밖으로, 볼탄 반도 밖으로 떠났다. 에르나 왕국은 뱃길로도 수십 일이 걸리는 머나먼 곳이었다. 어쩌면 죽는 날까지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쉬움은 없었다.

어린 집사는 기사의 세계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직관적인 것에 관심을 보였다.

“누가 이겼어요?”

“뭘?”

“방금 겨룬 거요.”

로벨은 매끈한 턱을 한번 만지고 팔짱 끼었다. 늑대 언덕 아래로 점점 멀어지는 호킨 페럿 경의 꽁무니를 보았다.

“그런 거 아니야.”

“설마, 졌어요?”

로벨은 한숨 쉬었다. 누가 더 강한지 겨룬 것이 아니었다.

“그냥 끊어낸 거야.”

“뭘요?”

로벨은 쉬이 표현하지 못했다. 미련, 악연, 후회, 아쉬움 등등이 뭉쳐진 무엇이었다. 그걸 굳이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과거.”

“예?”

로벨은 아련한 감동을 위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여담으로, 먼 훗날 공개된 페럿 가문의 기록에는 ‘마지막 대결에서도 이기지 못했다. 억울하다. 분하다.’ 뭐 이런 내용이 있는데, 꿈보다 해몽이 중요하니 신경 쓰지 말도록 하자. 그리고 호킨 페럿 경 외에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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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추수가 시작되었다.

예년보다 늦었지만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시장이 활성화되고 몇 년간 풍년이 계속된 탓에 식량 사정이 나쁘지 않았다. 곡물상인만 곡물값이 폭락할까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이렇듯 연자방아(硏子-)의 최고 장점은 비가 안 와 강물이 말라도 쓸 수 있다는 것이며, 밭갈기가 끝나 놀고먹는 가축을 유용하게 부릴 수 있다는 겁니다.”

로벨은 왕좌 팔걸이에 턱을 괴고 하품을 삼켰다. 에르나 왕립 대학을 졸업 후 세계 각지를 두루 견문했다는 자칭 동방학자가 괴상한 설계도를 늘어놓고 장황하게 신기술을 설명했다. 전문용어와 동방언어가 많아 절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소나 말로 물레방아를 돌린다는 거잖아?”

“예! 그렇습니다! 역시 영민하신 무적무패 왕이시군요!”

“에헴. 헴.”

‘강하다’, ‘용감하다’, ‘잘 싸운다’는 칭찬은 하도 들어서 감흥이 없지만, ‘영리하다’는 칭찬은 자주 듣지 못해 기분이 좋았다. 어린 집사가 정신 차리란 듯 등받이를 툭툭 쳤다.

“비가 안 오면 농사를 못 짓는데? 그럼 방앗간을 쓸 일도 없잖아?”

“아니, 아니, 공왕 폐하, 아닙니다요.”

로벨은 ‘아니’가 몇 번 나오나 세어볼까 하다가 포기했다. 들숨날숨을 세는 것과 비슷했다.

“농사를 짓는 수량과 물레방아를 돌리는 수량이 같지는 않잖습니까? 그리고 강물이 얼어붙을까 조마조마할 필요도 없고, 묵은 쌀, 아니, 아니, 밀과 보리도 아무 때나 쓸 수 있습니다요.”

“음... 듣고 보니 나쁘지 않은데?”

동방학자는 설계도 중 하나를 들고 작동원리를 열심히 설명했다. 동방물을 너무 많이 먹은 게 분명했다. 유라피아 대륙 기사가 그런 것에 관심 가질 리 없었다.

“그래서 얼마가 필요하다고?”

잡소리 치우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동방학자는 ‘헤헤헤...’ 웃으며 손바닥을 비볐다.

“이곳 물가를 몰라 구체적인 비용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우선 2천 페닝 정도면...”

“2천? 2천이라구요?”

어린 집사가 버럭! 소리쳤다. 동방학자는 움찔해서 눈알을 굴렸다. 기둥 사이에 늘어선 흉악한 용병이 당장 달려들 것 같았다.

“1천 5백 페닝! 1천 5백 페닝이면 됩니다!”

“기둥 몇 개랑 바위 몇 개면 되는데 뭐가 그렇게 많이 들어요?”

“아니! 아니요! 아닙니다요! 이게 보기보다 까다로워서 숙련된 석공이 필요하고, 또...”

로벨은 참지 못하고 귓구멍을 후볐다. 덕분에 잉크 묻은 지식인의 싸움이 멈췄다.

“1천 페닝 줄게. 그걸로 시작해.”

“그, 그걸로는...”

“페닝이 모자라면 여기 집사나 페리 행정관을 찾아가. 그 동물방아가 제대로 작동하면 넉넉히 포상할 테니까 미리 뒷주머니 차지 마.”

동방학자는 무어라 변명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외팔이가 눈알을 부라리니 찍소리 못하고 돌아섰다. 어린 집사가 즐겁게 외쳤다.

“다음!”

로벨의 위명이 널리 퍼졌는지, 아니면 씀씀이가 좋다고 소문이 났는지, 세계 각지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조금 전과 같은 과학자도 있고, 기이한 물건을 가져온 상인도 있고, 시골에서 상경한 풋내기 기사와 미심쩍은 마법사도 있었다.

“공왕 폐하한테서 한 몫 잡으려는 사람들이죠.”

절반은 사기꾼에 허풍꾼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쓸 만한 기술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로벨이 좋아할만한 사람도 찾아왔다.

“갑옷 제작자라고?”

“아이란드 왕국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모-슐헤르 공방에서 10년간 도제 생활을 하고, 알베니아 왕국에서 3년, 모나카 왕국에서 3년간 기술을 배우고, 자유도시연맹에서 조그맣게 장사하다가 이안 선장님의 소개를...”

로벨은 그만하라고 손짓하고 며칠째 만지작거린 뱀브레이스를 보여주었다.

“이걸 수리할 수 있어?”

갑옷 제작자는 그럴듯한 외눈안경을 꺼내 쓰고 꾸겨진 갑옷을 앞뒤로 살폈다.

“이거 아주 험하게 쓰셨군요. 바깥쪽의 둥그런 둔기에 맞아 찌그러진 듯한데, 안에서 밖으로 튀어나온 흔적은... 흐음... 크기와 깊이가... 손가락으로 누른 건가요?”

로벨이 훌륭한 안목이라고 칭찬하려 할 때 갑옷 제작자가 ‘푸헤헤-!’ 웃었다.

“농담입니다요! 농담이요! 손가락으로 어떻게 강철을 꾸깁니까요? 갑옷 주인이 못생긴 새끼 오우거라면 모를까요! 우하핫!”

“......”

외팔이가 도끼자루를 만지며 ‘쫓아낼까요?’ 물었다. 로벨이 고개를 가로젓자 도끼를 빼들었다. ‘그럼 죽일까요?’ 로벨은 그냥 무시했다.

“고칠 수 있어?”

로벨이 진지하게 묻자 갑옷 제작자도 진지하게 답했다.

“고치려고 하면 고칠 수 있습니다만, 장인으로서 추천하지 않습니다. 칼도 그렇고 솥도 그렇지만 완성 후에 망치를 대면 철이 약해집니다. 나중에는 휘어지지 않고 깨져버리죠. 차라리 녹여서 다시 만드는 편이 좋습니다.”

어린 집사는 갑옷이 깨진다는 말에 딱딱하게 굳었다. 페닝이 아무리 귀해도 로벨보다 귀하지 않았다. 로벨이 저질 갑옷을 입고 싸우다 다치기라도 하면...

“새로 만들죠!”

“녹여서?”

“아뇨! 그냥 새로 만들어요! 저거 이제 보니까 불량품이네요! 갑옷 주제에 깨져요? 그게 무슨 갑옷이야!”

어린 집사가 흥분한 이유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로벨은 어린 집사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재빨리 계약했다.

“대장장이 길드에 말해줄 테니 원하는 곳을 이용하도록 해. 갑옷 제작에 필요한 비용과 그에 따른 대장간의 손해는 늑대성이 책임질 거야.”

“저, 그럼 폐하의 치수를...”

“내 갑옷을 빌려줄 테니까 그와 같은 사이즈로 만들어.”

“갑옷 디자인은 어떻게...”

“네 재량껏 해. 제작 전에 도안을 가져오는 거 잊지 말고.”

갑옷 제작자는 왜 저리 서두르나 의아해하면서도 선수금과 ‘왕의 장인’이란 문서를 받고 기쁘게 물러났다.

의심 많은 용병은 ‘저러고 도망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세상사에 익숙한 용병은 ‘죽고 싶으면 그러겠지’하고 웃었다. 볼탄 반도의 땅과 바다가 모두 무적무패 왕의 것인데, 왕의 보물을 훔치고 살아남기란 첨탑에서 뛰어내리고 살아나는 것보다 요원했다.

“오늘 만날 사람은 다 만난 거지?”

어린 집사는 알현 명단을 뒤적인 후 끄덕였다.

“소금바위 영주 아들이랑 마시장 조합장이랑 듀튼 상단장이랑... 몇 명 더 있는데, 급한 용건은 아니라니까 내일 만나면 될 거예요. 저녁식사 준비할까요?”

“응. 펄프 대장이랑 같이 먹으니까 넉넉히 준비해. 아, 외팔이 몫도.”

펄프 대장만 거론해서 시무룩하던 외팔이가 뒤늦게 호명되자 활짝 웃었다. 어린 집사는 메인 홀의 뒷정리를 거들며 말했다.

“기왕 부를 거면 다 부르죠. 애꾸눈이랑 허풍쟁이랑 겁쟁이 데비랑...”

“걔네는 요즘 바빠.”

“전쟁도 끝났는데 뭐가 바빠요?”

로벨은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다 그냥 직설적으로 뱉었다.

“연애하느라 바빠.”

어린 집사는 무의식적으로 외팔이를 보았다. 결코 의도한 것은 아닌데, 외로운 거인의 심장을 아프게 했다.

“나, 나도 여자 만날 수 있소! 지, 진짜야! 그렇게 보지마쇼!”

로벨이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두드렸다. 이럴 때는 기사 공포증이 도움 되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폐하 너도 혼자잖아!’라고 외쳤을 것이다.

“오늘은 짝이 없는 사람끼리 먹자. 어린 집사는 키르케랑 따로 먹어도 좋아.”

“누, 누가 짝이에요? 누가?”

“그렇게 빼지 마. 나중에 외팔이처럼 될 수 있어.”

외팔이가 가슴을 쾅쾅 두드렸지만 아무도 관심주지 않았다. 일 년 중 가장 뜨거운 여름이었다. 사소한 것에 신경 쓸 필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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