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화. 손해
제임스 가문의 소식은 보리가 자라는 것보다 느렸다. 농담이 아니었다. 보리싹이 성큼성큼 자라 무릎까지 올라왔지만, 흑단성은 ‘기다려 달라’는 전갈만 보냈다. 까마귀 성의 반응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공왕 폐하를, 그리고 우리 볼탄 반도를 모욕하는 것이오!”
켈트 경이 테이블이 내려치며 화를 냈다. 존 도너반 자작은 남의 집 가재도구를 소중히 다루라고 경고하려다가 참았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았다. 켈트 경뿐만 아니라 여러 기사가 표정이 안 좋았다. 호른 경이 먼 길을 달려온 전령-바이란 경의 첫째 아들에게 물었다.
“군사행동은?”
“포로가 된 가문의 식솔이 모이긴 했지만, 특별한 군사행위는 없었습니다.”
“그럼 싸우자는 것은 아닌데...”
어린 집사가 어린 집사다운 발상으로 말했다.
“시간을 끌면 포기하고 돌아갈 거라 생각하는 게 아닐까요?”
기사답지 못하지만, 나쁜 판단은 아니었다. 봉신들이 모인 지 40일이 지났다. 아니, 의무종군기간이 아니어도 들꽃과 봄작물은 향수병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1천 명의 용병이 먹어치우는 군량도 상당했다.
“진군하는 게 어떻습니까.”
“제임스 공작과 싸우자고?”
“그것은 아니지만, 계속 버티면 순순히 돌아갈 거란 믿음을 깨줘야지 않겠습니까?”
무력시위의 강도를 올릴 필요가 있었다. 로벨은 잠깐 고민한 후 말했다.
“울프 용병단을 가시나무 성으로 보내고, 2개 소대로 떡갈나무 성 2마일 지점을 순찰해.”
펄프 대장은 지혜롭고 노련했다. 로벨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1층 홀을 나갔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로벨은 다시 명령했다.
“경들도 짐을 싸시오.”
기사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떡갈나무 성을 공격하는 겁니까?”
로벨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반응했다.
“집에 갈 준비하란 뜻이오.”
“집이요?”
“여름이 코앞인데 계속 머물 수 없잖소.”
머리가 좋은 순서로 표정이 밝아졌다. 로벨은 일부러 악동처럼 말했다.
“물론, 병사들한테는 비밀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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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군을 일일단위로 감시하던 검은 숲 영주들이 화들짝 놀랐다. 선발대가 북쪽으로 진군하고, 본대가 부산스럽게 이동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제임스 가문과 일전을 치를 생각인가?”
“무적무패 왕의 인내심이 바닥났군!”
늑대무리가 숲 속에 들어왔다. 작은 짐승들은 선택해야 했다. 늑대에게 자비를 구할 것인가, 단단한 흑단나무에 몸을 숨길 것인가. 대부분은 지혜로운 까마귀를 흉내 냈다.
“공왕 폐하 만세! 저희 하벨 가문은 공왕 폐하와 볼탄 반도 기사들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무적무패 왕 만세! 안개폭포 마을의 다비드 가문에서 우정과 존경으로 선물을 보냅니다!”
지금껏 조용한 것을 생각하면 참 얄미운 반응이었다. 어린 집사는 산처럼 쌓여가는 뇌물에 헤벌쭉 웃었다. 이 정도면 울프 용병단의 전쟁 비용을 메꾸고 남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흑단성의 반응이야.”
으름장을 놓긴 했지만 시간이 얼마 없었다. 휘하 기사들에게 말했듯 닷새 뒤에 철수할 것이다.
“몸값을 안 내면 그것도 좋다고 했지만...”
그래도 몸값을 받는 쪽이 보기 좋았다. 포로를 데려가 봐야 식량만 축날뿐더러 원한이 쌓였다. 정치적으로도 검은 숲의 항복을 받은 모양이 되어 면이 섰다.
간절히 바란 탓일까, 철군 준비가 거의 끝난 나흘째 아침, 흑단성의 전령이 도착했다.
“볼탄 반도의 왕을 뵙습니다. 저는 제임스 가문에 4대째 충성하는 기사 윌리텀입니다.”
로벨은 기억 저편을 뒤적이며 말했다.
“검은 숲 해방전쟁 때 함께하지 않았소? 오랜만이오.”
“...그건 아마도 제 부친일 겁니다.”
“그, 그렇소? 부친을 많이 닮았군.”
“...저는 양자로 입적했습니다. 제 부친은 갈색머리였지요.”
전령은 자신의 금발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로벨이 무안해서 천장의 나뭇결을 관찰하고, 호른 경 이하 볼탄 반도 기사들이 대충 넘어가라고 으르렁거리자 윌리텀 경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팔뚝만한 편지봉투를 꺼냈다.
“제임스 공작님의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로벨을 경호하는 허풍쟁이가 대신 받아 전달했다. 제임스 공작의 대리인이 아니라 전령이기에 예의에 어긋난 것은 아니었다.
로벨이 긴 편지내용에 시름하자 윌리텀 경이 간략히 요약해주었다.
“공왕 폐하께서 요구하신 33만 8천 페닝은 지불이 불가능합니다.”
얼핏 들으면 엄청난 액수지만, 포로가 된 가문이 한둘이 아니니 땅과 권리를 담보로 잡고 도시의 유력자에게 조력을 구하면 마련 못할 금액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정도는 뜯어내야 검은 숲의 2차 준동을 막을 수 있었다.
“안 내는 게 아니라?”
따라서 로벨 이하 볼탄 반도 기사들이 불쾌한 것은 당연했다. 윌리텀 경은 재빨리 편지 뒷부분을 거론했다.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겨울이 막 지나 영지의 수입이 없고, 가문마다 빚이 많아 담보를 제시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선 12만 8천 페닝을 지불하고, 매년 3만 페닝씩 7년에 걸쳐 상환했으면 합니다.”
숫자와 경제용어가 나오자 기사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로벨은 곁눈질로 어린 집사를 보았다. 어린 집사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끄덕였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포로의 거취는?”
“그저 명예롭게 대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제임스 공작은 로벨 로드릭을 잘 알았다. 기사의 명예를 들먹이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로벨은 공작의 의도를 알면서도 넘어가 주었다.
“밤나무 고을의 다미앵 경을 제외한 기사와 기사 종자 17명을 전원 석방하겠소.”
“공왕 폐하의 자비로움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다미앵 경은 이곳 까마귀 성 마을에 연금될 것이오.”
이것까지 예상하진 못한 듯 눈이 커졌다. 머나먼 늑대성이 아니라 까마귀 성, 그것도 성 밖 마을의 연금이면 고향과 연락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뜻이었다. 즉, 명예 외에 구속된 것이 없는 이름뿐인 포로였다.
“정말... 정말 자비로우십니다.”
제임스 가문의 윌리텀 경은 진심으로 경의를 표시했다. 호킨 페럿 경의 전례로 장기적인 포로가 피곤해서 그런 거지만, 검은 숲 기사들에게는 놀라운 자신감과 드높은 명예로 보았다.
‘우리가 대적할 상대가 아니다.’
재정문제가 아니어도 검은 숲이 로벨에게 싸움을 걸 일은 한동안 없을 듯했다.
검은 숲 협정은 하루 만에 체결되었다. 윌리텀 경은 성 밖에 대기 중인 기사 종자를 불러 12만 8천 페닝을 한꺼번에 지불했다. 주먹만한 금덩어리가 10개고, 엄지손톱만한 금화가 2,800개였다. 물욕이 없는 로벨조차 순간 감탄했으니, 재물의 화신 어린 집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게 다... 다... 다...”
로벨은 어린 집사의 침을 닦아주고 존 도너반 자작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공왕 폐하?”
“외성을 수리하고 줄다리를 다시 놓으시오.”
“그래도... 이것은 너무 많습니다.”
“까마귀 성은 공국의 최전방이오. 용병을 늘리고 무기를 갖추시오. 그래도 금화가 남으면 뱀의 계곡에 정착한 슐츠 경과 아자르 경을 지원해주시오.”
존 도너반 자작은 머리를 숙이고 두 손으로 상자를 받았다. 로벨이 가볍게 건네서 생각 없이 잡았다가 휘청거렸다. 수행기사가 제때 거들지 않았으면 망신당할 뻔했다. 로벨은 금덩어리에서 눈을 못 떼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경들의 노고는 늑대성에 돌아가는 즉시 치하할 것이오.”
“예? 예, 예. 감사합니다.”
“그럼 출발합시다.”
“예... 예? 어디를 말입니까?”
10만 페닝짜리 금괴의 여운이 오래가는 모양이다. 로벨은 칼집을 두드려서 이목을 집중시킨 후 또박또박 말했다.
“집으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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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군은 까마귀 성 주민의 환송을 받으며 철수를 시작했다.
울프 용병단은 볼탄 반도 최정예 용병단답게 신속히 본대로 귀환했는데, 그조차 고향과 가족 생각이 간절한 농민병보다 몇 시간 느렸다.
제임스 공작의 평판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일부 영리한 기사들은 포로 협상이 체결되자마자 철수하는 모습에서 무적무패 왕의 진의를 읽었지만, 대부분의 단순한 기사들은 제임스 공작이 협상을 잘해 확전을 막았다고 생각했다. 그 평가가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알고도 속아준 게 기분 나쁘지 않아요?”
“응?”
어린 집사가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임스 공작이 꾸민 전쟁이잖아요. 게다가 패배한 주제에 협상에 성공한 유능한 군주 흉내 내고요.”
“12만 페닝을 냈잖아. 그 정도면 체면을 살려줘도 괜찮아.”
자존심을 건진 것과 별도로 속은 꽤 쓰릴 것이다.
“매년 3만 페닝이 추가로 들어오고.”
“그건 아마 안 줄 거예요.”
“왜? 가문의 이름으로 약속했는데?”
어린 집사는 ‘가문’과 ‘명예’에 잘 속는 기사를 나무랐다.
“처음 몇 년은 꾸준히 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안 낼 가능성이 커요. 아까우니까요. 제 짐작으로 한 3년? 길어야 4년? 10만 페닝은 못 받는다고 생각하세요.”
로벨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그럼 왜 승낙한 거야?”
“12만 페닝도 작은 금액이 아니니까요. 어차피 까마귀 성에 쓰일 페닝이기도 하고.”
로벨은 혀를 한 번 찼다. 하지만 어린 집사의 구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폐하 말대로 못 받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로벨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건 포로를 포기해서 신뢰가 깎이는 것을 가정한 거야. 포로를 구한 이상 싫어할 검은 숲 기사는 없어.”
“볼탄 반도 기사들이 싫어하잖아요.”
“응?”
“제임스 공작을 명예도 모르는 야만인 취급하겠죠. 그거면 됐어요.”
로벨은 이해하지 못했다. 볼탄 반도 기사가 검은 숲 공작을 미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청옥성을 탐내거나, 금광에 눈독 들일 때 모두 소집할 수 있으니까요.”
로벨은 어린 집사 뒤에 딱 붙은 마녀 키르케를 보았다. 왠지 저쪽 견해인 듯했다.
“만약 약속대로 몸값을 다 갚으면?”
“그럼 손해 본 거 없으니까 더 좋죠. 히히힛!”
이쪽이 어린 집사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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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성으로 가는 길은 한결같았다.
북부대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강철성 첫 번째 관문에서 방향을 바꿔 늑대도로로 갈아타면 되었다.
평탄한 길에 온화한 봄 날씨가 더해지자 행군이 아니라 산책 같았다. 외팔이와 허풍쟁이는 번갈아 하품하며 화음을 넣었고, 펄프 대장은 당나귀 위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굴러 떨어질 뻔했다. 그렇게 하루가 더 지났다.
“어? 늑대 소리다.”
수레에 이불을 깔고 마음 편히 자던 마녀 키르케가 일어났다. 마부석의 흉내쟁이가 피식 웃었다.
“대낮에 무슨 늑대요?”
“쉿! 조용히 들어봐요.”
마녀는 두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그 모습이 묘하게 힘이 있어 여전히 조는 펄프 대장 외에 모두가 따라 했다.
컹- 컹-
저 멀리서 정말 짐승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늑대치고 이상했다.
“개소리잖아?”
“...늑대거든요?”
개 같은 늑대라면 이곳에 모인 모두에게 익숙했다. 어린 집사가 벌떡 일어났다.
“아야랑 이야카다!”
로벨의 가족이자 울프 용병단의 마스코트가 가도 저편에서 달려왔다. 그리고 그 의미는 명확했다. 호른 경이 사랑하는 왕을 돌아보며 말했다.
“늑대성에 도착했군요.”
로벨은 점점 커지는 늑대 소리에 미소 지었다.
“우리의 집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