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화. 전면전
아침 해가 뜨고 뿔나팔이 두 번 울자 왕국 각지에서 모인 병사들이 주섬주섬 일어났다.
유난히 게으른 병사는 모포를 정리하는 것이 귀찮아 망토처럼 두르고 다녔고, 남달리 부지런한 병사는 잠자리를 정리하고 시간이 남아 수염을 다듬었다. 천성은 제각각 달라도 아침 식사는 빼먹지 않았다.
불침번이 밤새 지킨 화톳불을 화덕에 옮기고 염장고기와 비스킷, 먹다 남은 치즈 따위를 팔팔 끓였다. 가난한 농민병은 고기 한 덩이 더 받으려고 악다구니를 썼고, 주머니에 여유가 있는 용병은 종군상인에게 웃돈 주고 산 햄을 큼직이 베어 물었다.
누런 이를 보이며 껄껄 웃는 중년 병사와 고기파편이 튈까 그릇을 감싸는 소년 병사와 물 대신 맥주를 찾는 얼빠진 병사가 평소보다 푸근하고 활기찼다. 그래서 이번이 첫 전쟁인 신참 외에는 대충 짐작했다.
“오늘이구만.”
“오늘이지.”
뱃일을 오래 한 선원이 폭풍을 미리 감지하듯이, 전쟁을 오래한 병사는 피 냄새를 미리 맡았다.
“정말요?”
“정말이겠냐?”
잔소리하지 않는 소대장, 평소보다 넉넉한 배식량, 그리고 아침 식사가 끝나도록 보이지 않는 기사 나리들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오늘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지금 배불리 먹어둬. 마지막 식사가 될지도 모르니까.”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요. 저 이제 17살이라고요.”
신참 병사는 투덜거리면서도 꾸역꾸역 죽사발을 들이켰다. 성인이 된 지 고작 두 해 지났지만 눈치는 있었다. 웃고 떠드는 고참 병사들 얼굴에 그늘이 있었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죽음의 그늘이었다.
@
로벨도 양 뒷다릿살과 보리빵, 리암 수사표 맥주 20온스로 푸짐하게 아침 식사를 마쳤다. 이를 쑤시면서 트림을 하면 좀 더 기사답겠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부족했다.
어린 집사의 도움을 받아 풀 플레이트 아머를 갖춰 입고 로드릭 가문의 2대 보물, 흐룬팅과 아론다이트를 검대에 꽂았다.
“몇 시야?”
“지금 막 제2시가 지났어요.”
체감상 제3시 같은데, 지평선이 보이는 평야라 해가 일찍 뜬 모양이다. 이 근방에 사는 적군은 진작 전투준비를 마쳤을 것이다.
“펄프 대장과 발가락 슈미츠. 그리고 봉신들을 불러와.”
어린 집사는 군말하지 않고 로벨의 막사를 떠났다. 살짝 들쳐진 출입문 너머로 호른 경의 뒷모습이 보였다.
로벨은 오크통을 4개 붙여 만든 간이 테이블에 나무판자와 나무병졸을 올리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경, 밖에 있으면 들어오시오.”
당혹감인지 민망함인지 잠깐 조용했다. 그러나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조심스레 천막을 걷고 들어왔다.
“크흠! 흠! 좋은 아침입니다, 공왕 폐하.”
“좋은 아침이오, 호른 경.”
좋은 하루가 될지는 모르지만.
로벨은 뒷말을 삼키고 자리를 권했다. 기사들이 모이려면 시간이 좀 필요했다. 그래서 잠시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
“그동안 별 일 없었소?”
전신 갑옷 때문일까, 아니면 막사 분위기 때문일까, 호른 경은 반사적으로 전황보고를 시작했다.
“검은 숲을 지나는 적 연락병과 한 차례 전투가 있었습니다. 전사자는 없으나 북군 용병 하나가 다리를...”
“그거 말고. 경 말이오.”
로벨이 어색하게 말을 끊자 호른 경은 그제야 의도를 파악했다.
“저, 저는 아무 일 없습니다.”
대답이 잘못됐다. 대화가 이어지는 말을 해야 하는데 연애 비슷한 것을 해본 적 없는 두 사람이라 갈피를 잡지 못했다.
“본인도 아무 일 없었소. 아, 궁금할까 봐 말해준 거요. 궁금할까 봐”
“구, 궁금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로벨은 민망해서 쇠뇌를 어깨에 걸친 나무 병종을 만지작거렸다. 마녀 키르케가 한쪽 눈을 검게 칠해 놓은 애꾸눈 아바레스터였다.
로벨은 어색한 안부를 나눌 바에 공통된 관심사를 이야기하기로 했다.
“본인의 짐작이 맞다면 오늘 공격이 시작될 것이오.”
“본거지가 공격당했으니 참기 힘들겠지요. 고향에서 데려온 병사들의 사기 문제도 있을 테고.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문제는 공격 방향이오.”
로벨은 묘하게 친구들을 닮은 병졸을 쭉 늘어트렸다. 애꾸눈과 겁쟁이는 북쪽, 발가락과 싸움개는 동쪽이었다.
“우리 군은 2마일에 걸쳐 흩어져 있소. 북군과 남군 사이에는 십여 명의 풋맨 소대들뿐이오.”
“전술적으로 좋은 배치는 아니지요.”
“경이 적군 지휘관, 밤나무 고을의 다미앵 경이라면 어느 곳을 공격하겠소.”
왕이 기사에게 내리는 시험이었다. 호른 경은 동료 기사와 기사 종자가 없는 것에 안도하며 솔직히 대답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북군을 치워야 하고, 전쟁에서 이기려면 폐하를 잡아야 합니다.”
“옳은 말이오.”
“하면, 이곳으로 올 겁니다.”
정답이었다.
밤나무 고을의 다미앵 경이란 자가 천치가 아니라면 연합이 와해될 수 있는 북쪽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퇴로가 생기면 본거지를 지키려고 이탈하는 기사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로벨도 뼛속까지 기사라 잘 알았다.
“저만한 군사를 모으고 통솔하는 자면 실력 또한 있을 터, 필시 나를 노릴 것이오.”
그런 실력자를 몇 번이나 골탕 먹인 자신에 대해서는 별말 하지 않았다.
@
켈트 경 등을 모아 합의된 작전을 간략히 점검하고, 폭력에 관한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을 때 허풍쟁이가 찾아왔다.
“공왕 폐하! 적이 오고 있습니다.”
로벨은 즉시 어린 집사를 보았고, 어린 집사는 막사 밖에 설치한 해시계를 살피고 말했다.
“제3시가 지났어요.”
“정오에나 움직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빠르네.”
“잠이 안 올 만큼 열 받았나 보지요.”
사나운 웃음이 시냇물처럼 흘렀다.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옆구리에 끼고 일어났다. 왕이 움직이자 기사와 용병들도 차례로 무기를 챙겼다.
“각자 위치로 가서 전투 준비하시오.”
기사의 명예를 높일 수 있는 돌격대가 먼저 나가고, 소규모 예하 부대를 통솔하는 기사들이 다음에 나갔다. 로벨의 수행기사 호른 경과 호른 경의 기사 종자,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만 옆에 남았다.
“불사신이 올 거야. 그자를 따르는 용병들도.”
“오는 길에 신세를 많이 졌지요. 갚을 때가 되었습니다.”
펄프 대장이 거칠게 말했다. 이빨이 빠져도 맹수는 맹수였다. 로벨은 가장 오래된 늑대를 믿음직스럽게 보고 말했다.
“우리도 가자.”
@
검은 숲의 장정과 용병으로 구성된 약 1천 명의 군대가 다가왔다. 소속과 편제가 제각각 달라 질서 있지는 않았다. 작은 무리는 십 수 명이고, 큰 무리는 수백 명이었다.
“저들이 불사신 용병단이야.”
그것은 로벨의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큰 부대는 울프 용병단 남군 255명이고, 가장 작은 부대는 켈트 남작이 이끌고 온 바위성 사냥꾼 21명이었다.
“주력을 앞세웠군요.”
“오늘 결판 내겠다는 거지.”
로벨은 서쪽 평야에 쭉 늘어선 적을 살폈다. 가장 가까이 온 것은 불사신 코셰이 부대였다. 전원이 전쟁 전문 용병인 만큼 기사들을 제외하면 최강 전력이었다.
“맨앳암즈를 앞으로 보내.”
경험 많은 중무장 용병을 상대로 농민병을 보낼 수 없었다. 일방적으로 학살당할뿐더러 군 전체의 사기가 떨어진다.
“남군 제1, 제2소대! 앞으로!”
발가락 슈미츠가 곤봉을 휘두르며 명령했다. 지휘봉이라고 우기는데, 누가 봐도 사람 잡는 곤봉이었다.
“외팔이랑 싸움개가 있으면 좋을 텐데요.”
어린 집사가 불안한 눈초리로 말했다. 익숙한 북쪽 출신 용병에 비해 까만 피부가 섞인 남쪽 용병은 영 못 미더웠다. 펄프 대장이 피식- 웃고 말했다.
“백병전 능력만 보면 저들이 우수하오.”
“그래요?”
“일단 편제가 다르잖소.”
북군의 중심은 쇠뇌병이고, 포병과 공병이 다수 포함되었다. 공성전을 할 때 믿음직스러웠다. 반면, 인어해 남쪽 출신으로 구성된 남군은 전원이 중장병과 경보병이었다. 전체 숫자는 북군의 절반밖에 안 되지만, ‘보병’에 한하면 세 배나 많았다.
“말이 안 통하는 놈들이 많아서 복잡한 훈련은 하지 않았소.”
“엑? 그럼 뭐에요?”
“딱 하나만 훈련했소.”
로벨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최고의 전쟁 전문가가 보장한 기술이었다.
“방진(方陣)이야.”
울프 용병단 남군 255명이 한 덩어리로 뭉쳤다. 고대 왕국 시절에 흔히 사용한 대형 방패-호플론(Hoplon)과 스큐둠(Scutum:로마군 방패)을 앞세워 앞을 막고, 가벼운 라운드 실드와 바클러로 측면을 보호했다. 요즘에는 보기 힘든 전술이었다.
“켈트 경은?”
땅에 있어서 시야가 좁은 펄프 대장, 어린 집사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호른 경이 상체를 쭉 펴서 우익을 살폈다.
“준비가 끝난 것 같습니다.”
“좋아.”
천 명 단위의 전쟁에서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없었다. 기사들을 믿고, 병사들을 믿어야 했다.
양측의 주력인 용병단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화살이 먼저 쏟아지고, 이어서 쿼럴이 산발적으로 날아왔다. 몸통을 가리는 대형 방패지만 빈틈이 있어 여럿이 쓰러졌다. 그러나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거리가 30야드로 접어들자 더 이상 화살이 날아오지 않았다. 공수가 바뀌었다. 열대우림에서 단련된 창술이 빛을 발했다. 방패가 일제히 치워지고 필룸(Pilum)과 자벨린(Javelin)이 날아갔다.
창날이 길고 창대가 무거운 필룸은 방패를 무력화하기 좋고, 균형이 잘 잡힌 자벨린은 정밀 타격하기 좋았다. 필룸에 찔려 방패를 떨군 용병들은 자벨린에 차례로 꼬치가 되었다.
“뒈져라! 뒈져라, 야만인아!”
“누가 누구보고 야만인이래?”
불사신 용병단이 전우의 시체를 밟으며 달려들었다. 울프 용병단은 방패를 끌어올리고 각양각색의 칼로 다가오는 적을 쑤셨다. 메마른 초원에 핏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시체가 하나, 둘 쌓이자 시체를 타고 칼과 도끼를 휘둘렀다.
“저 친구들도 대단하군요.”
포비아 왕국 전쟁에 동쪽과 남쪽에서 온 용병들이 싸우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애국주의나 민족주의가 아니라 금화가 지배하는 전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념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콰광-!
울프 용병단의 방패벽이 흔들렸다. 동시에 로벨의 굵은 눈썹도 흔들렸다.
“어? 뭐야?”
“대포라도 쏜 건가?”
갈색 피부의 용병 하나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헹가래를 하는 것 같은데, 우정이나 신뢰는 보이지 않았다. 8~9피트 높이로 날아오른 용병은 차가운 맨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생사를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날아오르기 전에 이미 죽었으니까.
“불사신이 왔어.”
“그 코셰이란 괴물요?”
전투가 무르익기를 기다린 모양이다. 수백 년 묵은 마도의 수호자다웠다. 로벨이 흐룬팅의 폼멜을 어루만지자 어린 집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만류했다.
“가시면 안 돼요.”
“응.”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어린 집사가 깜짝 놀라 다시 물었다.
“정말 안 가요?”
“응.”
로벨은 억지 미소로 어린 집사와 호른 경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재빨리 모닝스타의 옆구리를 때렸다. 애초에 믿지 않은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거짓말이잖아!”
어쩔 수 없었다. 로벨이 안 가면 애꿎은 용병들이 희생된다. 괴물은 괴물이 상대해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불사신을 죽이면 전쟁이 끝나.’
뿔나팔이 길고 가늘게 울었다.
호른 경과 과묵한 몬트 패거리가 뒤따라오고, 켈트 경 이하 볼탄 반도 기사들이 적의 측면으로 돌격했다. 검은 숲 연합군에서도 기사들이 마주 나왔으며 몇몇 부대가 크게 우회했다.
마침내 전면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