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48화 (448/605)

448화. 본거지

첫 회전은 기묘하게 끝났다.

열정적인 연대기 작가는 볼탄 반도의 승리로 기록했지만, 조심성 많은 전쟁사학자는 무승부로 평가했다.

전장에서 물러난 것은 검은 숲이지만,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았다. 기사 10명과 기사 종자 7명이 전사했을 뿐이다. 로벨의 랜스 역시 9명이 죽거나 다쳤으니 승리치고 미묘했다.

“그중 6명이 불사신한테 당했어...”

로벨이 우울하게 말했다. ‘머리’를 쳐서 최소한의 피해로 전쟁을 끝내려는 계획이 실패했다. 적에게는 1천 명의 병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래도 전황은 로벨에게 유리했다. 호른 경과 어린 집사가 이끄는 울프 용병단 남군과 켈트 경 등을 비롯한 봉신들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이제 양측의 전력을 비교하면 1천 대 1천 3백으로 볼탄 반도가 유리했다. 까마귀 성을 등지고 있으니 적진이란 부담도 없었다. 북부대로를 통해 싸고 원활하게 물자를 보급 받을 수도 있었다. 여기서 ‘싸다’는 종군상인에게 지불한 페닝을 세금으로 회수한다는 의미였다.

‘검은 숲의 영주들이 전쟁에 찬동한 이유 중 하나지.’

존 도너반 자작은 속으로 한숨 쉬었다. 볼탄 반도는, 정확히 짚어 로벨 로드릭 왕은 너무 커졌다. 이제 30대 중반이니 얼마나 더 커질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얼굴을 보면 앳된 20살이었다. 4, 50년은 더 살 것 같았다.

‘샘 포클이 왕국을 통일한 게 42살이었지?’

어쩌면 살아생전 제2의 정복왕을 볼지도 모르겠다. 로드릭 가문의 유능한 신하들을 보면 신빙성이 있었다.

“그런 괴물하고 일대일로 싸웠다고요? 내가 미쳐! 그러다가 푹찍! 댕강! 당하면 어쩌려고요? 폐하는 왕이에요! 팔팔한 10대도 아니고요! 제발 몸 좀 사려요!”

“푹찍이라니... 표현이 참...”

호른 경이 한심하게 쳐다본 후 동의했다.

“작은 집사의 말이 맞습니다. 그렇게 위험한 자라면 다 함께 상대하는 것이 옳습니다.”

“경들의 명예는 어쩌고?”

“그자는 기사도,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오우거와 트롤을 여럿이서 사냥한다고 불명예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로벨은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우물쭈물했다.

로벨 패거리는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면서도 향후 전략과 전술을 토론했다. 존 도너반 자작도 몇 마디 거들었지만, 주된 내용은 로벨과 로벨의 정인으로 알려진 마녀 키르케가 내었다.

“공세로 나가는 것은 옳아. 저쪽은 통일되지 않은 군대야. 기사가 여럿 죽어서 더욱 그럴 거야.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나중에 힘들어져.”

“저쪽에 붙은 수호자들은 어쩌고요? 그리고 싸움에서 이겨도 전쟁에서 이긴 게 아니잖아요. 기사님이랑 용병 아저씨들이 뿔뿔이 흩어지면 검은 숲 주민들이 힘들어져요.”

“이곳 주민까지 신경 써 줄 필요...”

“어린 집사님은 조용하세요. 어른들이 대화하잖아요.”

“예. 아줌마.”

호른 경이 아이디어를 보태고, 펄프 대장이 가능성을 검토하고, 외팔이가 하품하고, 애꾸눈이 쉬운 말로 설명하고, 허풍쟁이가 이해한 척하자 마침내 결론이 나왔다.

“내일 아침 동이 트면 이동하시오.”

“예. 폐하.”

긴 회의를 마무리하기에 뭔가 짧고 허전했다. 로벨은 멀뚱멀뚱 쳐다보는 기사와 친구들에게 몇 마디 덧붙였다.

“이 싸움으로 두 번 다시 검은 숲이 준동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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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예상한 대로 로벨 로드릭 군이 먼저 움직였다. 병사가 많고, 물자가 풍부하며, 사기까지 높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것은 공격방향이었다.

로벨 로드릭 군은 ‘검은 숲’이 있는 평야 북쪽으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수작이지?”

요단 강을 반쯤 건넜다 돌아온 다미앵 경 이하 검은 숲 기사들은 볼탄 반도 왕이 하는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로벨이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빵을 먹었다고 해도 무슨 의도일까 고민할 정도였다.

불사신 용병단을 비롯한 베테랑 용병들은 ‘딱 봐도 퇴로를 차단하는 게 아니냐’ 말하며 가장 약한 측면을 공격하자 주장했지만, 자존심에 의심병에 더해진 기사들은 새겨듣지 않았다.

결과만 보면 용병들이 옳았다. 로벨은 북군의 쇠뇌와 대포로 전장 한쪽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기사들의 유보가 틀린 것도 아니었다. 1천 대 1천 3백이면 그리 큰 병력차가 아니었다. 그 병력을 길게 늘어트리니 종심이 얇아졌다. 중장기병이 돌파하기 딱 좋았다.

“우리를 얕잡아보고...”

다미앵 경이 화를 내다가 말았다. 첫 회전 때도 그리 말하고 돌격하여 패배했다.

“분명히 노림수가 있을 것이오. 그 공왕이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일 리 없소.”

기사를 흔히 말똥에 비유하지만, 같은 수법에 또 당할 만큼 진짜 바보들은 아니었다. 정통적인 가치관과 몸소 체험한 경험 사이에서 고민할지언정 무턱대고 돌격하는 일은 자제했다.

그것이 로벨의 의도한 작전임을 알면 화를 낼지 두려워할지 궁금했다.

“정말 공왕 폐하의 말씀대로군.”

“적이 되어서 할 말은 아니지만, 저 겁쟁이들은 뭘 망설이는 거지?”

만약을 위해 대기한 켈트 경 이하 볼탄 반도 기사들은 검은 숲 연합군이 미동도 하지 않자 당황했다. 로벨에게 당하는 꼴을 보지 못한 탓에 ‘검은 숲 출신이 그렇지 뭐’ 어쩌고 지역 차별적인 조롱을 날렸다.

“공왕 폐하께서는?”

존 도너반 자작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군 진영에 검은 숲 출신이 있음을 자각한 기사들은 한 번 더 당황했다. 그러나 철판을 까는 게 직업이라 짐짓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

“오전 중에 도착하셨을 것이오.”

“연락은 없소?”

“사람을 보냈으면 지금쯤 올 때가...”

“공왕 폐하의 전령이다! 비켜라! 비켜!”

로벨도 악마는 못 되었다. 로벨을 따라간 기마 용병 하나가 지친 말을 타고 돌아왔다. 기사들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내일이면 난리가 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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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무공(武功)을 폄하하는 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가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빈집털이’였다.

“폄하라니? 오히려 칭찬이지.”

적의 약점을 공략하는 것은 당연하다 못해 현명한 전술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빈집의 위치와 거리를 알려줘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경도 신경 쓰지 마시오.”

“시, 신경 쓴 적 없습니다.”

로벨은 100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밤나무 고을로 향하고 있었다. 검은 숲 입장에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병사들이었다.

눈구멍이 옹이구멍이라도 세 자릿수 군사가 사라지면 의심할 것이다. 따라서 볼탄 반도에서 데려온 병사가 아니었다. 로벨에게는 원정군 외에도 현지의 군대가 있었다.

“역시 브릭 자작이에요! 이만한 군대를 준비해놓다니 말이에요!”

“까마귀 성이 함락되면 당연히 본인 차례일 테니...”

“그 까마귀 성을 도와줬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 말이죠?”

어린 집사가 웃으면서 가시나무 성의 브릭 자작을 쪼았다. 머를 브릭 자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욕 비슷한 것을 삼켰다. 까마귀 성이 함락될 위기에도 침묵한 죄가 있었다. 물론, 변명의 여지는 있었다. 로벨이 가장 오래된 봉신을 비호했다.

“자신의 영지를 비우고 이웃 영지를 돕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이곳은 사방이 적이잖아.”

머를 브릭 자작은 왕이 ‘이방인 영주’의 고충을 알아주자 감격했다. 로벨이 직접 찾아오지 않았으면 이번에도 병사를 동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벨은 사냥꾼과 나무꾼으로 구성된 가시나무 숲 병사들을 쭉 둘러보았다. 울프 용병단에 비하면 덩치도 작고 무장도 빈약하지만, 일반적인 농민병에 비하면 아주 훌륭했다. 활을 다룰 줄 아는 병사가 있는 것만도 기대 이상이었다.

그런 로벨의 마음을 읽었는지 머를 브릭 자작이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적의 수장은 밤나무 고을의 다미앵 경입니다.”

“밤나무 고을?”

“여우강 상류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인구는 8백 명에서 9백 명 정도고, 밤과 도토리가 많이 나와 돼지를 주로 칩니다.”

“이야, 잘 아네요?”

“검은 숲에 정착한지 몇 년이 되었는데, 이 정도는 당연하지.”

“그렇게 잘 알면 까마귀 성이 중요한 것도 알 텐데, 왜 안 도왔을까요?”

어린 집사가 기사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만약 기사였으면 종자와 수행원이 모두 탈모가 됐을 것이다.

로벨은 어린 집사의 머리를 꾹 눌러서 그만하게 하고 머를 브릭 자작에게 명령했다.

“내 용병을 몇 명 빌려주겠소. 밤나무 고을로 가서 물자를 징발하시오.”

로벨을 따라온 고참 용병들이 씨익- 웃었다. 말이 좋아 징발이지 사실상 약탈이었다. 그러나 머를 브릭 자작은 근심했다.

“저 혼자 말입니까?”

“젊은 남자는 대부분 징집되었을 테니 자작의 병사들로 충분할 것이오.”

“그게 아니오라...”

“살인은 자제하고, 필요하면 본인의 이름으로 차용증을 주시오.”

머를 브릭 자작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검은 숲의 평판을 걱정한 모양이다. 로벨과 볼탄 반도의 기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면 끝이지만, 이곳에 남아야 하는 자작은 장기적으로 대인관계에 신경 써야 했다.

“밤나무 고을의 징발이 끝나면, 자작의 재량으로 몇 군데 더 방문하시오.”

“그, 그럼 폐하께서는...?”

자기 앞가림하느라 중요한 것을 듣지 못했다. 로벨은 상큼할 만큼 가볍게 말했다.

“경험해보지 못한 선물을 준비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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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숲 기사들이 혼란에 빠졌다. 적진에서 흘러들어온 소문 때문이다.

‘로벨 로드릭이 검은 숲 연합군의 본거지를 공격한다!’

밤나무 고을, 물푸레나무 마을, 여우머리 마을 등등이 습격당했다고 하는데, 피해 규모를 알 수 없었다. 검은 숲으로 통하는 길을 울프 용병단이 막았기 때문이다.

“내 아들이 사람을 보냈소. 저 악독한 늑대들 때문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지만, 옛 신이 보우하사 무사히 도착하였소.”

초조한 기사들은 결론만 말하라고 닦달했다.

“소문은 사실이오. 밤나무 고을과 여우머리 마을이 공격을 받았소. 유감이오.”

“물푸레나무 마을은? 그곳은 어떻소?”

“내 농장도 여우강 상류에 있소! 그곳은 무사하오?”

가까운 곳에 본거지를 둔 기사들이 일제히 물었다. 유능한 아들을 둔 기사는 곤경에 처했다. 집안사람이 전한 소식이라 집안의 일이 대부분이었다. 이웃 영지 사정은 자세하지도 않고, 별 관심도 없었다.

“모두 조용하시오.”

검은 숲 기사들은 누가 짖나 돌아보다가 밤나무 고을의 다미앵 경인 것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 가장 확실하게 피해를 본 기사였다.

다미앵 경이 상처 입은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며 말했다.

“우리가 의심하고 경계하는 사이, 저 비겁하고 비열한 왕이 우리의 가족을 건드렸소.”

각자 병사를 끌고 모인 만큼 직위는 대등하지만, 암묵적으로 인정한 지휘관은 있었다. 검은 숲 연합을 호소하고, 전쟁을 주도한 다미앵 경이었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소. 일전을 치를 때가 되었소.”

“그, 그렇소! 지금 적진에는 공왕이 없으니 지금이 기회요!”

이미 피해를 입은 기사보다 곧 피해를 입을 지도 모르는 기사들이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내일 아침. 제3시에 출진하겠소. 나 다미앵 가문의 보나르 다미앵이 불사신 용병단을 이끌고 선두에 서겠소.

볼탄 반도 대 검은 숲 전쟁이 바야흐로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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