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화. 피와 땀
기사의 직감일까, 아니면 마도에 몸을 담은 신비 탓일까, 로벨은 홀로 돌격하는 적에게 기묘한 위압감을 느꼈다.
‘혹시 저자가...?’
마녀 바바 야가가 경고한 불사신 코셰이였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쥔 손을 높이 들고 외쳤다.
“정지! 모두 정지!”
호른 경이나 랭스터 경 같은 완숙한 기사라면 옆 동료와 보조를 맞추어 속도를 줄였을 것이다. 그래야 안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 경험이 적고, 첫 돌격의 성과로 흥분한 기사 종자들은 고삐를 바짝 당겨 급정지하거나 명령을 못 듣고 계속 달려 나갔다.
안 그래도 급하게 시도한 2차 돌격이라 대열이 갖춰지지 않았는데, 기사 종자들이 제멋대로 튀어나가니 삽시간에 엉망이 되었다. 로벨 답지 않은 실수였다. 그 대가는 피로 돌아왔다.
“용병 나부랭이가...!”
첫 돌격에서 랜스 차칭을 실패한 기사 종자였다. 그 증거로 피 한 방울 안 묻은 멀쩡한 해비 랜스를 가지고 있었다.
“안 돼!”
철없는 공명심일까, 수치를 씻을 기회라 생각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부친에게 물려받은 헬름이 작아서 소리가 들리지 않은 걸까. 기사 종자는 채찍질을 가하며 불사신에게 창끝을 고정했다. 거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펑-!
로벨은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지탱했다. 모닝스타가 깜짝 놀라 앞발을 들었기 때문이다. 허나 모닝스타를 탓할 수 없었다.
“우악-!”
“저, 저게 뭡니까?”
용감하게 랜스 차칭한 기사 종자의 머리가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흩어졌다.
새빨간 핏물 사이로 뼛조각인지 뇌 조각인지 알 수 없는 흰 덩어리가 휘날리고, 핏줄이 달린 눈알이 빙글빙글 돌며 날아갔다. 못 볼 꼴 많이 보는 전장이지만 이만큼 해부학적인 광경은 드물었다.
“마, 마법인가?!”
과묵한 몬트를 포함한 용병들은 과정을 보지 못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꽉 쥐고 말했다.
“아니야. 메이스야.”
기사 종자의 랜스를 겨드랑이 아래로 흘리며 짤막한 강철 메이스를 휘둘렀다. 늑대의 왕과 비슷한 괴력에 마주 달리는 전투마 속도를 더하자 투구가 깨지고 머리가 폭발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로벨 일행을 향해 계속 달려오는 중이란 것이다.
“이, 이 괴물이...!”
“죽어랏!”
제때 멈추지 못한 기사 종자들이 차례로 불사신과 충돌했다.
청소년기에-두들겨 맞으며-교육받은 대로 창을 옆구리에 붙이고 안정적으로 내찔렀다. 로벨이 봐도 훌륭한 마상창이었다. 상대가 괴물이 아니라면 말이다.
불사신은 창대를 움켜잡고 옆으로 휘둘렀다. 막은 것도, 피한 것도 아니었다. 회초리 낚아채듯 창을 잡아서 역으로 휘두른 것이다. 제법 멋지게 공격한 기사 종자는 자기 창에 떠밀려 훨훨 날아갔다. 휘둘린 방향이 몸통 쪽이라 창을 놓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이어지는 기사 종자와 기마 용병도 비슷했다. 강철 메이스를 휘둘러 무기 채 박살내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벌레 잡듯 패대기치기도 했다.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범인(凡人)이 상대할 자가 아니었다.
“모닝스타! 가자!”
로벨은 부하들을 구하기 위해 혼자 돌격했다. 어느새 거리가 좁혀져 30야드가 안 되었다. 파나케아 투구의 힘으로 불사신을 관찰할 수 있었다. 본디 물소의 것으로 추정되는 큼직한 뿔과 입 주변이 훤히 드러난 바이킹 투구가 인상적이었다. 수염에 새치가 희끈희끈한 것이 젊은 나이는 아니었다.
‘나이가 의미 있나?’
전설에 따르면 족히 500년이 된 괴물이었다. 그 세월의 10분지 1만 전쟁을 치렀어도 50년이었다. 이능(異能)이 아니어도 무시 못 할 전사였다.
‘전력으로 때린다!’
로벨의 검술과 마술(馬術)은 포비아 왕국, 아니, 유라피아 대륙 제일이었다. 모닝스타가 땅을 박차는 힘을 허리, 어깨, 손목으로 전달하여 칼끝에 온전히 담았다. 속도, 각도, 타이밍까지 완벽한 공격이었다. 불사신 코셰이는 설익은 기사 종자를 상대할 때와 달리 강철 메이스를 수직으로 세워 방어했다.
콰아앙-!
냉병기에서 나왔다고 믿기지 않는 굉음이었다. 위력 또한 대단했다. 강철 메이스가 두 동강 나고, 불사신의 오른팔이 싹둑 잘렸다.
로벨은 칼자루에서 전해지는 절삭의 감촉에 만족하며 고삐를 당겼다. 그러나 곧 사색이 되어 허리를 숙였다.
머리 위로 크고 무거운 쇳덩이가 스쳐지나갔다. 전후좌우 사방을 볼 수 있는 파나케아 투구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불사신 코셰이!”
로벨은 말머리를 돌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불사신이 휘두른 무기를 보는 순간 맥이 빠졌다.
불사신은 자신의 잘린 오른팔을 둔기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미, 미친 거야?”
컨틀릿과 뱀브레이스로 감싼 근육질 팔은 제법 무게감이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팔을 무기 삼아 휘두르는 정신병자는 없었다.
“그대가 로벨 로드릭인가?”
불사신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로벨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체병기에 집중하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불사신은 원활한 대화의 필요성을 느꼈는지, 아니면 절단된 신체가 새삼 불편했는지 오른팔을 제자리로 가져갔다. 그러니까, 잘린 어깨에 도로 붙였다.
“어... 뭐...”
할 말을 잊게 만드는 재주였다. 불사신은 제자리를 찾은 팔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손가락을 쥐었다 펴보고 다시 물었다.
“솜씨를 보아 맞는 것 같은데, 기왕이면 직접 듣고 싶군.”
“아, 안 아파?”
아직 놀라는 중이라 엉뚱한 소리를 했다. 불사신은 어이가 없어서 미소 지었다.
“이제 익숙해져서 괜찮다.”
그 미소를 보자 정신이 돌아왔다. 로벨은 뼈를 자른 촉감이 생생한 아론다이트를 몸쪽으로 당겼다.
“죽지 않는 코셰이, 맞지?”
불사신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물었다.
“고대의 왕을 물리치고 이 땅의 새로운 왕이 된 로벨 로드릭이 맞는가?”
과묵한 몬트 등은 볼탄 반도의 왕좌를 생각했다. 그러나 이곳은 검은 숲이었다. 불사신이 말한 땅은 현실의 땅이 아니었다.
“네가 생각하는 왕이 아니야.”
“이 상황을 보면 아닌 게 아닌 듯하군.”
이것도 중의적이었다. 영성이 가득해 패배를 모르니 마도의 왕이라 할 만했다.
“절구통의 마녀에게 들었겠지만, 우리는 왕을 바라지 않는다.”
로벨이 조금 침착했으면 복수명사란 것에 집중했을 것이다. 로벨을 인정하지 않는 마도의 수호자는 불사신 코셰이 하나가 아니었다.
불사신은 부러진 강철 메이스 대신 철구가 달린 플레일을 꺼냈다. 평범한 칼은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다.
“그대의 영성을 꺾어 왕이 되지 못하게 하겠다.”
‘나도 괴물들의 왕이 되고 싶지 않아. 뱀파이어 군주한테 가서 따지라고...’
로벨은 불만을 내뱉으면서 응수했다. 괴물 취급받는 게 싫다고 져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붕- 부웅- 부우웅-
철구가 회전하자 벌떼 날아드는 소리가 났다. 맞으면 뼈 부러지는 거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로벨은 점차 흥분하는 모닝스타를 다독이다 벼락같이 옆구리를 찼다.
뒷골목 건달이나 검술학회 마스터나 선제공격을 최고로 여겼다. 특히 플레일처럼 준비 동작이 큰 무기를 상대할 때는 먼저 뛰어드는 것이 정답이었다. 불사신은 급히 철구를 날렸지만 간격을 뺏겼다.
로벨은 쇠사슬이 다 펴지기 전에 칼끝으로 쳐냈다. 평범한 칼이면 철구의 무게를 못 이겨 부러졌겠지만, 호수의 요정이 선물한 아론다이트는 지독히 튼튼해서 몸뚱이를 한 번 떨고 말았다.
로벨은 떨리는 칼날을 누르고 불사신의 텅 빈 가슴을 스치듯이 베었다. 사슬갑옷이 우둑둑- 갈라지고 핏물이 터져 나왔다.
“오오! 해냈다!”
“우리 폐하 만세다!”
로벨의 부하들이 기뻐서 소리쳤다. 그러나 잊으면 안 되었다. 상대는 잘린 팔을 도로 붙이는 불사신이었다. 내장이 흘러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처를 무시하고 플레일을 끌어당겼다. 로벨은 모닝스타를 멈추지 않고 거리를 벌렸다. 철구가 아슬아슬하게 말꼬리를 스쳐 지나갔다.
“드루이드 투구인가?”
불사신 입술에 짜증이 어렸다. 사각이 없는 상대라 까다로웠다. 로벨은 멀찍이 떨어져 말머리를 돌렸다.
“파나케아 투구 아니야?”
“철 투구와 바이킹 투구의 차이가 무엇이지?”
로벨은 소소한 깨달음을 얻고 재차 돌격했다. 불사신의 상처는 진작 회복되어 있었다. 찢겨져서 축 처진 갑옷과 옷섶이 아니면 베인 적도 없는 것 같았다.
‘트롤도 울고 갈 회복력이야.’
꼴을 보아 목을 쳐도 죽을 것 같지 않았다. ‘사지를 모두 자르고 불로 태우면 죽을까? 그래도 부활할까?’ 늑대의 왕이나 죽지 않는 왕과 다른 의미로 까다로웠다.
“익!”
게다가 머리도 좋았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작전이 통하지 않자 뼈를 주고 살을 취하는 작전으로 나왔다. 칼날에 몸을 들이밀며 플레일 자루를 휘둘렀다. 오직 ‘불사신’만이 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깡-!
로벨은 공격을 포기하고 자루를 막았다. 모닝스타는 주인이 낙마할까봐 급히 속도를 줄였고, 자연스럽게 접근전이 되었다.
“실력을 보여라!”
불사신은 가시 박힌 철구를 직접 쥐고 짱돌처럼 휘둘렀다. 로벨은 하박의 뱀브레이스로 방어하고 칼자루의 폼멜로 반격했다.
주인만 바쁜 것이 아니었다. 말들도 치열하게 자리싸움을 벌였다. 여덟 개의 다리가 어지럽게 뒤섞여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곳을 밟으려 싸웠다. 여의치 않으며 머리로 박고 이빨로 깨물었다.
“와... 우리 폐하와 대등하다니... 무슨 괴물이지?”
사람 머리를 오줌보처럼 터트리고 잘린 팔을 아무렇지 않게 붙이는 것보다 ‘로벨과 대등한 싸움’이 놀라웠다.
과묵한 몬트는 동료 용병의 말에 어폐를 찾았지만 지적하지 않았다. 그걸 지적하면 우리의 왕도 괴물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승패가 보이기 시작했다. 로벨의 갑옷에는 작은 흠집 몇 개뿐인데, 불사신의 몸은 수차례 부러지고 잘려나갔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승부가 나도 열두 번은 났을 것이다. 이름대로 ‘죽지 않는’ 코셰이라 버티었다.
“과연, 고대의 왕들을 굴복시킬 만하다.”
불사신은 깨진 투구 뒤에서 눈알을 굴렸다. 검은 숲 연합군이 후퇴하고 있었다. 다미앵 경과 기사들이 무사히 도망친 모양이다.
“저들이 없으면 목을 베어도 소용이 없지.”
“...이기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 마. 오해하잖아.”
한쪽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몰골이라 오해의 소지는 없었다. 불사신은 깨지기 직전의 플레일을 집어던졌다. 로벨은 기합을 지르며 아론다이트를 휘둘렀다. 쇠사슬을 끊어 철구와 자루를 분리했다.
“승부는 다음에 가리도록 하지.”
불사신은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접전에서 빠져나갔다. 모닝스타가 우렁차게 울부짖으며 쫓으려 했지만 로벨이 고삐를 당겨 제지했다
“그만. 그만하자.”
싸움이 끝났다. 멀리서 지켜보던 과묵한 몬트 패거리가 다가왔다. 왕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로벨과 로벨 로드릭 군의 승리였다. 하지만 로벨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파나케아 투구를 벗자 머리 두건에 흡수되지 않은 땀이 후두둑- 떨어졌다. 초봄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피를 그리 흘리면서, 땀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어.’
어쩌면, 정말 어쩌면, 불사신 코셰이가 이기는 중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