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6화. 불사신
계곡이 끝나는 검은 숲 서쪽 평야.
고지대에 위치해 수량이 부족하고 자갈과 돌이 많아 농사짓기에 좋지 않았다. 소와 양을 기르는 목장만 조금 있을 뿐, 대부분의 땅이 방치되어 있었다. 울창한 숲과 가파른 절벽과 깊은 골짜기에 둘러싸여 고대 왕국의 검투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착. 착. 착. 착...
철컥. 철컥. 철컥...
생산성 없는 땅이지만, 전장으로 최고였다. 수백 명의 병사가 열을 맞춰 걸어가고, 수십 마리의 말이 주인을 업고 자유로이 뛰어다녔다.
“검은 숲도 우습게 볼 수 없구만.”
콧대 높은 포클랜드 기사들은 물론이고, 제 잘난 맛에 사는 볼탄 반도 출신도 검은 숲은 은연중에 얕잡아 보았다. 농사짓기 좋은 땅도 아니고, 인어해와 거리가 멀어 상업도 부실했다. 가난한 기사와 가난한 나무꾼의 소굴이란 이미지였다.
“저만한 군사를 모을 수 있으니 말이야.”
시야가 탁 트인 평지에 1천여 명이 늘어서자 장관이었다. 눈에 띄는 깃발만 해도 30개였다. 다시 말해 기사가 최소 30명이었다. 과거 까마귀 성을 위협한 볼프 사트로 후작군보다 많았다. 허풍쟁이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제임스 공작 나리는 대체 뭘 한 거지? 아랫것들 관리 안 하나?”
“요쯤 되면 한통속이라 봐야지.”
로벨이 포클랜드 귀족들과 싸울 때도 방관했다. 우정이 변한 것이 분명했다.
로벨은 용병들의 의심과 불평을 흘리며 명령했다.
“크로스보우 중대 앞으로.”
화살이 닿을 거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10문의 대포가 있으니 미리 방어진을 짤 필요가 있었다.
울프 용병단이 자랑하는 크로스보우맨이 20야드쯤 걸어 나가 등에 맨 파비스를 설치했다. 한 명이 방패를 세우면 다른 한 명이 말뚝을 박는데, 어찌나 빠른지 목판이 저절로 자라난 것 같았다.
“싸움개, 겁쟁이, 우측으로 병력을 옮겨. 자작은 좌측을 맡아주시오.”
로벨을 옛 신만큼 굳게 믿는 울프 용병단은 의심 없이 지시를 따랐지만, 신앙심이 부족한 존 도너반 자작은 의문을 제기했다.
“중장병을 우익에 배치하면 중심이 약해집니다. 혹여 중앙돌파를 당하면 좌우익이 분리되어...”
로벨을 근접 경호하는 허풍쟁이, 과묵한 몬트 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화가 난 듯도 하고, 웃음을 참는 듯도 했다. 존 도너반 자작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샘 포클 앞에서 제왕학을 논하고 있었다.
“자작의 충언은 고맙소. 하지만 본인도 생각이 있소.”
“죄, 죄송합니다.”
우익에 기사와 기마병을, 좌익의 포병과 장창병을 배치해서 창과 방패로 삼고, 몸통을 중장병으로 지키는 것이 보편적인 야전 전술이었다. 하지만 로벨은 중장병과 포병을 우익에 배치하고, 경보병을 모두 좌익에 보냈다. 중앙에는 쇠뇌병과 한 줌 남짓한 장창병만 남았다.
‘아니. 하나 더 있군.’
로벨과 로벨을 경호하는 기마병 20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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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부대 배치를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검은 숲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그 공왕이 실수할 리도 없고...”
속임수인지, 함정인지, 아니면 단순히 혼란을 주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밤나무 고을의 다미앵 경이 이를 갈며 말했다.
“우리를 얕잡아 본 것 아니겠소?”
자격지심은 무서운 것이다. 수많은 이유 중 가장 그럴듯하게 들렸다. 검은 숲 기사들은 분개했다.
“모두 창을 준비하시오. 건방진 콧대를 눌러 줍시다.”
안 그래도 공격 우선순위가 낮은 우익인데, 중장병과 포병이 똘똘 뭉쳐 있으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풋맨과 스피어맨 뿐인 좌익을 빠르게 격파 후 본진을 포위, 섬멸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나무랄 것 없는 계획이었다. 처맞기 전까지 말이다.
“사격 준비.”
“사격 준비이-!”
크로스보우맨이 일제히 무기를 들었다. 조금씩 전진해오던 검은 숲 중앙군이 멈칫했다. 아직 사거리가 아니었다.
“발사.”
“발싸아-!
총 150발의 쿼럴이 비스듬히 날아올랐다. 직사 병기 특성상 하늘을 뒤덮는 소나기 같은 위용은 없지만, 정면에서 밀려오는 파도의 위압감이 있었다. 다만, 육지에 닿지 않는 파도였다. 쿼럴은 적 앞 30야드 지점에 우루두둑- 떨어졌다.
“저게 뭔 짓이냐?”
“이 반쪽짜리 돼지들아! 여기까지 오지도 않는다!
검은 숲 중앙군이 방패를 치우고 가슴을 펼치며 조롱했다. 한 명이 시작하자 너도나도 동참했다. 중앙군을 지휘하는 검은 숲 기사는 돌발행동을 제지할까 하다가 내버려두었다. 사기가 올라가니 잠시 기다려도 될 듯했다. 어차피 선공은 우익의 다미앵 경이 할 테니 말이다.
“계속 쏴.”
로벨은 애꾸눈에게 연속 사격을 명령하고 적의 우익을 살폈다. 파나케아 투구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시야가 넓어 속속히 보였다. 기사와 기사 종자 80여 명이 바이저를 내리고 라이트 랜스를 꼬나들었다. 거리가 점점 줄고 있었다. 200야드, 190야드, 180야드...
“공왕 폐하!”
존 도너반 자작이 애절하게 소리쳤다. 외팔이의 풋맨 소대나 농부로 구성된 까마귀 성 징집병은 중장기병을 대적하지 못한다. 검은 숲 기사들이 돌격하면 10분 내로 와해될 것이다. 하지만 로벨은 기다렸다.
“마지막이야. 한번만 더 쏴.”
애꾸눈의 하나뿐인 눈이 커졌다. 애꾸눈 외에도 전장을 읽는 눈이 있는 노련한 용병들은 변화를 알아챘다.
적의 우익과 본진의 거리가 점차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면...”
적의 좌익은 본래 공격부대가 아닌데다 대포에 눌려 꼼짝도 하지 않았고, 적의 중앙군은 견제사격에 발이 묶여 있었다. 본인들은 발이 묶인 줄도 모를 것이다. 전투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맙소사... 한 방에 끝낼 생각이군.”
“엉? 뭔 소리요?”
생각 없이 쇠뇌를 쏘아대던 용병이 물었다. 애꾸눈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그냥 로벨을 가리켰다.
“망치와 모루다.”
“케케묵은 전술 이야기요?”
“케케묵을 만큼 기사들이 즐겨 쓰는 전술이지. 우리 폐하도 그러하고.”
칼밥 좀 먹은 용병이지만 누가 어떻게 망치를 휘두를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애꾸눈은 말주변이 부족한 것에 처음으로 답답함을 느꼈다.
“공왕 폐하가 망치다.”
아직도 300야드 떨어진 검은 숲 중앙군을 한번 보고, 어느새 120야드까지 접근한 검은 숲 기사들을 보았다. 이제 곧 돌격거리였다.
“외팔이와 까마귀 성 수비대가 모루지.”
“크로스보우 중대! 물러나!”
로벨이 기마 용병과 기사 종자를 거느리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파비스 사이로 말발굽이 요란히 지나갔다.
우익으로 좌익을 격파하고, 본진을 앞뒤로 압박하는 ‘망치와 모루’ 전술. 케케묵을 만큼 오래되어 ‘좌익을 격파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는데, 목적과 방법을 혼동하지 않는다면 꼭 그럴 필요 없었다. 아군의 기병전력을 적의 배후로 보내기만 하면 성공이었다. 간단한 이치였다.
“저, 저걸 어떻게 때리려고?”
애꾸눈이 웃음을 참으며 애써 진지하게 답했다.
“짧게 잡고, 짧게 휘두르면 되지.”
로벨의 힘이면 짧게 휘둘러도 뼈가 부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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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요약하면 함정이었다.
허술한 좌익으로 검은 숲 기사들을 유인하고, 본진의 ‘짧은’ 기병으로 뒤를 치는 작전이었다.
글로 쓰고 말로 하면 쉽지만, 로벨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앞뒤로 포위되는 것은 아군도 마찬가지니 적의 본진을 멀리 떨어트려야 하고, 기사들이 돌격하는 타이밍을 적확히 짚어야 하며, 모루가 망가지기 전에 망치로 끝장내야 했다.
“Charge!”
로벨은 해비 랜스를 일자로 뻗고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충직한 기마 용병과 충실한 기사 종자는 뒤처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달려라! 달려라! 빌어먹을 말아!”
“내 영혼의 동반자여! 심장이 터져도 좋으니 멈추지 마라!”
지휘관의 역량이 100% 발휘하는 곳이 있다면 바로 기병대였다. 로벨이 이끄는 용병과 종자는 진짜 기사 못지않게 용맹했다. 정확한 타이밍과 명확한 타격 지점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 어어?”
기사와 전투마의 공통점은 시야가 극도로 좁다는 것이다. 헬멧을 쓴 기사나 눈가리개를 한 말이나 오직 앞만 보았다. 창에 찔리고 말발굽에 짓밟힐 가난한 징집병만 보았다. 그래서 로벨의 해비 랜스가 왼쪽 겨드랑이를 뚫고 반대쪽으로 빠져나올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기사가 균형을 잃자 전투마도 쓸려갔다. 기마가 옆으로 자빠지며 뒤따라오는 기사를 잡아챘다. 쿠다탕-! 쿵-! 포탄이 떨어진 것처럼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공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로벨을 간신히 쫓아온 로벨의 랜스가 차례로 랜스를 꽂았다. 사람을 꿰뚫기도 하고, 말을 쓰러트리기도 하고, 부끄럽게 허공을 가르기도 했다. 그래도 충격은 충분했다. 검은 숲 우익의 허리가 뚝 잘려나갔다.
몇 필 안 남은 선두는 용맹하게 외팔이 소대를 덮쳤지만 몇 피트 뚫지 못했다. 갈고리와 그물에 낙마하고 망치와 곡괭이에 묵사발이 되었다.
“어째서?!”
눈구멍에 쇠토막이 박히는 순간까지 뒤따라오는 아군 기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후미에서 운 좋게 참사를 피한 다미앵 경은 급히 속도를 줄였다. 갑자기 나타난 로벨 무리에 당황했지만, 목숨이 걸린 만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퇴각하시오! 본진으로 퇴각하시오!”
로벨은 사람 몸무게가 더해진 해비 랜스를 버리고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로드릭 가문의 로벨 로드릭!”
알기 쉬운 결투 신청이었다. 여기서 도망치면 평생 겁쟁이란 꼬리표가 붙을 것이다. 다미앵 경은 망설였다.
“나, 나는...”
그때, 세 걸음 남짓 떨어진 곳에 검은 숲 기사가 과묵한 몬트의 플레일에 맞아 낙마했다. 이런 난전 중에 말에서 떨어지는 것은 발판 없는 교수대에 걸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앗! 소리를 내자마자 날뛰는 말에 짓밟혀 냄비 속 오트밀 꼴이 되었다.
“제길, 제길, 제길! 두고 봅시다!”
다미앵 경은 거품만 남은 용기를 걷고 말머리를 돌렸다. 로벨은 기사가 저리 도망갈 줄 몰랐다.
“어? 어? 지금 봐도 되는데?”
“...진짜 나중에 보자는 뜻이겠습니까?”
과묵한 몬트가 피 묻은 플레일을 축 늘어트리고 말했다. 조금 민망해졌다.
“기사들을 잡아야 해! 그래야 전쟁을 끝낼 수 있어!”
로벨의 랜스는 3명이 죽었고, 검은 숲 기사는 12명이 죽거나 부상 입었다. 기사와 기사 같은 기사 종자가 구분이 안 되어 확신할 수 없지만, 반수 이상이 살아 있었다. 저들이 무사히 돌아가면 남은 병력을 흡수해 계속 싸울 것이다.
“대열을 정비해! 추격한다!”
로벨은 제자리를 한 바퀴 돌며 부하들을 모았다. 얼추 인원이 모이자 아론다이트를 휘둘렀다.
“Charge!”
첫 돌격에 비하면 숫자도 적고 속도도 느리지만, 갑옷과 갈기에 흐르는 핏물 탓에 훨씬 공포스러웠다. 다미앵 경 이하 검은 숲 기사들은 뒤를 돌아보고 하얗게 질렸다.
“제발! 제발 좀 빨리 가자!”
“우리 용병들은 뭐 하는 것이야!”
그 외침을 들은 것일까, 수백 야드 떨어진 검은 숲 본진에서 기마 한 필이 달려왔다.
“다미앵 경! 저기 보시오!”
다미앵 경의 표정이 꾸겨졌다. 아무리 상황이 급하다지만 고작 한 필로 무적무패 왕과 부하들을 막을 수 없었다. 시간벌기도 안 될 것이다.
뿔 달린 괴상한 갑옷이 보일 때까지 그리 생각했다.
“저자는...”
찌푸린 얼굴이 살짝 펴졌다.
“그래! 아직 저자가 있었지!”
동방에서 온 괴물이자 전설로 통하는 용병, 불사신 코셰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