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43화 (443/605)

443화. 동방

늑대성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소금광산 등 요충지를 방어할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하고 882명이 성 아래 집결했다.

봉신은 따로 소집하지 않았으나 호른 경, 켈트 경, 바이란 경, 도너반 경 등 가까운 곳의 영주들이 자발적으로 병사를 이끌고 합류했다. 숫자는 30명에서 50명이었다.

“으... 저 많은 인원이 먹고 쌀 양을 생각하면...”

하루에 빵을 하나만 먹어도 1천 2백 개고, 이틀에 한번만 배설해도 평균 6백 덩어리였다. 상상하면 어질어질했다.

“에잇! 더럽게 왜 그런 상상을 해요?”

어린 집사가 손가락을 꼽으며 진지하게 계산하자 마녀 키르케가 등짝을 때렸다. 그 모습을 본 펄프 대장, 애꾸눈 볼포스, 발가락 슈미츠가 차례로 중얼거렸다.

“좋을 때다.”

“좋을 때요.”

“좋긴 뭐가 좋소? 전쟁하러 가는데?”

발가락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남군 지휘관’이란 직함과 달리 성 밖 북군 진형을 노려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겁쟁이 데비와 하녀 로자니아였다.

겁쟁이는 실룩이는 광대뼈를 누르며 애써 근엄하게 말했다.

“공왕 폐하가 나오면 바로 출발입니다. 얼른 돌아가세요.”

“하지만... 다들 멀리 가시는데...”

“걱정 마요. 걱정 마. 우리는 무적이니까. 금방 이기고 옵니다.”

겁쟁이는 배웅 나온 로자니아를 돌려보내고 그제야 실없이 웃었다.

“이번에 돌아오면 로자니아 씨한테 청혼할 거야.”

주위의 용병이 일제히 경악했다.

“그, 그런 불길한 대사를...”

“차라리 지금 해! 지금 차이고 가라고!”

“...차이는 게 기정사실이냐?”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겁쟁이 데비는 지난 몇 년간 모은 페닝과 이번에 받게 될 전쟁수당을 계산하며 ‘으흐흐...’ 웃었다. 시내의 작은 빌라 정도는 살 수 있었다. 고전 클리셰에 빗대어 큰일이라 떠들지만, 진짜 큰일이라 생각하는 용병은 없었다. 늑대성의 늑대들은 우두머리가 그러하듯 무적무패였다.

“정숙! 정숙하라! 공왕 폐하께서 나오신다!”

웃고 떠들던 용병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턱을 바짝 당겼다.

네 자릿수 군대가 정립하자 공기가 세 배쯤 무거워졌다. 출병식을 구경하러 온 시민과 먼 곳에서 끌려온 징집병은 군기에 놀라 눈치를 살폈다. 해와 바람마저 숨죽인 시간, 볼탄 반도의 왕 로벨 로드릭이 등장했다.

@

로벨은 오랜만에 갖춰 입은 필드 아머를 슬쩍슬쩍 살폈다. 깨지거나 구멍 난 곳은 없지만, 곳곳에 흠집이 가득했다.

‘수리 좀 할 걸 그랬나?’

평상복처럼 입고 다닌 통에 수리 맡길 시간이 부족했다. 이참에 풋 컴뱃 아머를 세트로 맞춰서 상황 따라 착용하거나 필요한 파츠만 교대로 사용할까 생각했다.

“공왕 폐하?”

어디까지 생각이었다. 지금은 늑대성 언덕 아래 사열한 1천 2백 명의 군사와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모인 3천 명의 로드릭 시민을 신경 써야 했다.

“출진준비가 끝났습니다.”

펄프 대장이 나직이 속삭였다. 로벨은 도시 성벽까지 늘어선 인파를 쭉 보고 크게 소리쳤다.

“오늘 우리는 볼탄 반도의 좋은 벗이자 소중한 이웃인 까마귀 성을 구하러 간다!”

성문 주위와 언덕 바로 아래는 그럭저럭 말을 알아들을 수 있지만, 그 이상 떨어진 곳은 로벨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햇살에 번쩍번쩍 빛나는 갑옷을 입은 사람이 나와서 무어라 외치니 공왕 폐하인가보다 했다. 로벨도 그런 사정을 알기에 길게 말하지 않았다.

모닝스타를 몰아 언덕길을 내려갔다. 두 팔 간격으로 늘어선 맨앳암즈 소대가 차례로 몸을 돌려 로벨을 따라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밀려오는 산사태 같았다.

“울프 용병단 북군부터 출발해.”

로벨이 나직이 명령하자 애꾸눈 볼포스가 고삐를 당겨 먼저 내려갔다. 달리면서 소리쳤다.

“북군 제1소대! 출발!”

1천 2백 명의 진영 중 한 곳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이어서 2소대, 3소대 순으로 도시를 빠져나갔다. 깃발을 따라 우르르 몰려다니는 광경만 보다가 질서정연한 ‘군대’를 보니 신기하고 놀라웠다.

북군을 따라 보급마차가 출발하고, 이어서 발가락이 지휘하는 남군이 출발했다. 기사 종자, 하인, 말구종 등을 이끌고 참전한 바이란 경이 수염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우린 안 와도 될 뻔했소.”

호른 경, 켈트 경, 도너반 경도 공감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저들은 용병이오. 금화에 충성하는 것들이니 믿지 마시오.”

“켈트 경의 말이 옳소. 공왕 폐하를 보필하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요.”

시민들이 덜 여문 꽃송이를 뿌리며 병사들을 축복했다. 옛 신의 이름을 떠올리며 성호를 긋기도 했다.

“우리의 왕을 지켜주소서...”

“나의 벗과 이웃을 가호하소서...”

@

펄프 대장은 오랜만에 입은 사슬 갑옷이 영 불편한지 목을 주무르고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값은 좀 비싸도 가죽 갑옷이 좋소. 녹도 안 슬고, 조금 찢어져도 괜찮으니까.”

어린 집사가 꽉 쬐는 가죽 내피를 상하좌우로 당기며 반박했다.

“그 값이 문제죠. 하드 레더(Hard Leather) 한 벌 만들려면 돼지를 몇 마리 잡아야 하는지 알아요? 어디 돼지뿐인가? 기름칠하고, 말리고, 기름칠하고, 말리고... 그 시간과 노력이면 사슬 갑옷을 열 벌도 찍어내요.”

“무두질 냄새도 지독하고요.”

마녀 키르케가 코를 짚고 한 마디 보탰다. 신참 용병이 의아해서 물었다.

“가죽 갑옷이 더 싸지 않아?”

“가죽도 가죽 나름이니까.”

제대로 된 가죽 갑옷은 공방에서 찍어내는 하프 아머보다 비쌌다. 가볍고 오래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난한 용병이나 징집된 사냥꾼이 입은 가죽 갑옷은 생가죽을 바느질한 싸구려 갑옷이었다. 기름 먹인 가죽처럼 단단하지도 않고 냄새도 많이 났다.

어린 집사는 충분히 늘어난 가죽 내피를 바이킹 헬멧 안쪽에 덧댔다. 솔직히 헬멧 따위 무겁고 갑갑해서 쓰기 싫은데 로벨이 무섭게 다그쳐서 어쩔 수 없이 가지고 나왔다.

“저도 가죽 보닛을 쓰고 있다고요.”

마녀 키르케가 자기 머리를 가리켰다. 로벨의 투구애찬은 예외가 없어서 처음에는 금속 투구를 썼었다. 그런데 무게 때문에 여기저기 박치기하자 가죽을 여러 장 덧댄 보닛으로 바꿔주었다.

“나도 그렇게 할 걸...”

어린 집사의 불평에 펄프 대장이 엄하게 말했다.

“투구 안 써서 훅- 간 놈들 많이 봤소. 잘 쓰고 다니시오.”

“저도 알아요.”

어린 집사는 툴툴거리면서 머리에 투구를 얹었다. 선견지명이라 할까, 운이 좋았다고 할까. 로벨이 강조한 투구가 어린 집사의 목숨을 구했다. 탱-!

“악!”

어린 집사의 머리가 왼쪽으로 휙- 돌아갔다. 눈앞이 까매지고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관자놀이를 세게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정신이 나간 어린 집사를 대신해 펄프 대장이 소리쳤다.

“기습! 기습이다!”

“뭐? 검은 숲도 아닌데?!”

가도 옆 아름드리나무와 바위에서 쇠뇌로 무장한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무 명? 서른 명? 숫자를 파악하기도 전에 쿼럴이 날아들었다. 핑- 핑핑- 퍽-!

“으헉-!”

“컥!”

가죽 가격을 이야기하던 신참 용병들이 가슴과 허벅지를 붙잡고 쓰러졌다. 펄프 대장은 당나귀에서 내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를 끌어당겼다.

“수레 아래에 숨으시오! 당장!”

쿼럴이 순차적으로 날아들었다. 반격할 틈을 주지 않았다. 사격 솜씨를 보나 전술을 보나 보통 놈들이 아니었다.

“기사 나리는? 기사 나리는 어디 계시냐!”

세살 버릇 여든 간다고 상황이 급하니 옛날 호칭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지적할 사람이 없었다.

“전열을 살피러 가셨소!”

하긴, 기사가 있으면 저리 훤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약삭빠른 용병들은 수레와 짐, 혹은 죽은 짐승 뒤에 숨어 참사를 피했다. 서너 차례 사격이 이어졌지만 처음처럼 맥없이 당하지 않았다.

“후퇴! 후퇴!”

적은 기습의 효과가 떨어지자 재빨리 도망갔다. 성난 울프 용병단이 일제히 일어났다.

“이 개자식들! 가죽을 벗겨서 생으로 튀겨주마!”

“애미 애비 없는 잡것들아! 거기 서라!”

펄프 대장이 흥분한 용병들을 급히 말렸다.

“멈춰! 멈추라고! 쫓지 마! 함정이다!”

함정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일단 함정이라 소리쳤다. 흥분한 부하들을 진정시켜야 했다.

“보통 놈들이 아니다! 쫓으면 위험해!”

“그럼 그냥 보내우? 윌리랑 톰이 당했는데?”

“진정 좀 해! 기사 나리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로벨을 거론하자 흥분이 가라앉았다. 무적무패 왕이 저 찢어 죽일 잡놈들을 처치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깊은 사람은 마냥 기다리지 않았다.

“말이요! 말이랑 당나귀를 보세요!”

마녀 키르케가 기절한 어린 집사를 안고 소리쳤다. 펄프 대장은 즉시 수레 끄는 짐승들을 살폈다. 급소에 맞아 죽은 놈이 절반이고, 숨은 붙었으나 움직이기 곤란한 놈이 나머지 절반이었다.

“제기랄! 가축을 노렸군!”

“그럼 우리만 공격받은 게 아니에요. 북군 후미의 마차를 지켜야 해요.”

마녀의 조언은 항상 옳았다.

“잭! 데미! 그리고 너, 너 이름이 뭐냐? 아무튼 그쪽에 셋까지! 애꾸눈한테 가라! 적이 보급부대를 노린다고 전해!”

지금 가도 지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어린 집사는 어떻소?”

“가벼운 뇌진탕이에요. 괜찮을 거예요.”

괜찮다는 말과 달리 울상이었다. 펄프 대장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난 공왕 폐하를 뵈러 가겠소. 혹시 모르니 계속 숨어 계시오.”

@

기습 당한 것치고 피해는 크지 않았다. 가슴에 피격당한 신참 용병만 전사하고, 팔다리에 부상 입은 세 명은 생명에 지장이 없어 후방으로 보내졌다.

“사람은 그렇지만... 짐말이 아홉 마리나 죽었습니다. 당나귀도 세 마리가 상했지요.”

사기를 생각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병사 열 명보다 말 한 마리가 귀중했다. 전술적인 피해는 작아도 전략적인 피해가 막대했다. 호른 경이 상황을 요약했다.

“발이 묶였군요.”

다시 말해 까마귀 성이 위기에 빠졌다. 펄프 대장이 머리를 긁적이고 말했다.

“보통 잡놈들이 아니었습니다. 쇠뇌 다루는 솜씨며, 치고 빠지는 솜씨며, 오랫동안 전장을 구른 놈들이 분명합니다.”

“검은 숲에 그런 용병들이 있었나?”

“검은 숲 출신인지 아닌지는...”

로벨은 죽다 살아난 어린 집사를 떠올리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동쪽에서 온 용병이야.”

“동쪽이요?”

볼탄 반도 동쪽, 흔히 ‘동방’이라 부르는 곳은 낙후된 땅이었다. 오래전에 원정을 떠나 정착한 기사들과 발음이 어려운 이민족 마을만 있을 뿐이다.

‘불사신 코셰이.’

단편적인 정보와 단순한 직감이지만 로벨은 확신했다. 동방에서 온 마도의 수호자가 전쟁에 개입했다.

“이 전쟁은 쉽지 않을 거야.”

왕의 말에 기사와 용병 얼굴이 어두워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