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42화 (442/605)

442화. 순서

로벨의 칼에 부족한 것이 있다면 절제, 인내, 인정 따위였다. 힘과 기술은 차고 넘쳤다. 엉성하게 나이프를 내민 칼잡이를 그대로 후려쳤다. 말 그대로 엉성했기에 손목이 꺾여 아무런 방어가 되지 않았다. 어깨에서 옆구리까지 길게 베어졌다.

“으어허헉! 피! 피! 피가!”

로벨은 칼끝에 묻은 피를 벽에 뿌리고 달랬다.

“괜찮아. 안 죽어.”

그런데 피가 좀 많이 났다. 겨울용 솜옷이 흠뻑 젖고 바닥까지 붉게 물들었다. 로벨은 괜히 무안해서 한마디 덧붙였다.

“...아마도?”

의도한 것은 아닌데 조롱이 되었다. 남은 칼잡이의 눈빛이 변했다.

“시발! 기사고 나발이고 죽여! 죽이고 튀자고!”

아주 용감한 발언이었다. 저 북쪽의 잉그비아 왕국부터 저 남쪽의 자유도시연맹까지 유라피아 대륙의 절반을 탈탈 털어도 로벨을 죽이겠노라 선언하는 자는 흔치 않았다. 로벨은 칼날을 세우고 기쁘게 응했다.

“와.”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다. 막다른 골목이라 도망갈 수 없었다. 설령 길이 있어도 말을 가진 기사를 따돌릴 수 없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도 기분 따라 팔다리 하나쯤은 잘릴 테니 싸우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나 최선이 항상 좋은 결과는 아니었다.

로벨은 용감하게 뛰어올라 나이프를 휘두르는 칼잡이를 폼멜로 후려치고, 칼자루를 반 바퀴 돌려 영리하게 등자 밟은 발을 노리는 칼잡이를 내리찍었다. 동작이 얼마나 빠른지 코뼈가 부러지고 팔뚝이 찢어지는 것이 거의 동시였다.

“끄아아악-!”

“내 팔! 내 팔!”

순식간에 제압된 칼잡이들은 상처 부위를 잡고 바닥을 굴렀다. 자연히 오물 범벅이 되었다. 모닝스타가 똥물 튀기지 말라는 듯 퍽퍽- 걷어찼다.

“용서를 빌었으면 손가락 하나로 봐줬을 텐데, 칼을 휘둘러서 살려줄 수 없잖아.”

피를 흘린 탓일까, 칼잡이들 얼굴이 하얘졌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바로 잡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무표정으로 말하니 아무도 웃지 않았다. 로벨은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칼잡이를 무시한 채 제일 처음 피를 흘린 중년 사내에게 말을 몰았다.

“넌 누구야?”

“푸릉-!”

기분이 안 좋은 모닝스타가 빨리 말하라고 콧김을 뿜었다. 상처를 틀어막은 사내가 더듬더듬 말했다.

“토, 토, 토치 상단의 네, 네드 토치입니다.”

“토치 상단이요? 구릉성에서 양털 장사하는?”

어린 집사가 아는 척했다. 전국구로 거래하는 집사가 기억할 정도면 작은 상단은 아니었다. 로벨이 자신의 추리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자 어린 집사가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로드릭 상회 소속이잖아요. 어떻게 자기 상회 소속 상단도 기억 못 해요?”

“아... 그런 거야?”

로벨은 무안해서 눈치 보는 칼잡이들을 가리켰다.

“그럼 저쪽이 거짓말한 거네?”

어깻죽지가 베인 칼잡이와 팔뚝에 구멍 난 칼잡이는 출혈 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그나마 멀쩡한 코뼈 부러진 칼잡이가 해명했다.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요! 저희는 슬리버 상단에 고용된 용병입니다!”

로벨은 어린 집사를 보았다. 기억력 좋은 집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거기도 로드릭 상회 소속이에요.”

@

칼잡이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공왕 폐하가 운영하는 로드릭 상회’의 알력다툼이었다.

“상회(商會)는 말 그대로 상인들의 모임이에요. 정보를 공유하고, 거래를 알선하고, 시세를 조절하죠.”

“나, 나도 알아.”

로벨이 작은 목소리로 항의했다. 어린 집사는 믿지 않았다.

“전쟁이나 연회에 필요한 물자가 있으면 상회에 주문하죠. 그러면 상회는 상인들을 모아 입찰 받아요.”

“우리는 필요한 물건을 싸게 살 수 있고, 상인은 경쟁 없이 쉽게 납품할 수 있고?”

로벨이 진짜로 상회의 일을 알자 어린 집사가 칭찬했다.

“맞아요! 맞아! 그런데 경쟁이 없지는 않아요.”

로벨이 주문한 것은 천막을 짓는데 쓰는 대량의 모직물이었다. 구릉성의 양치기와 거래하는 토치 상단이 적정 가격에 낙찰 받았는데, 슬리버 상단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어떻게?”

“그야 뻔하죠. 웃돈 주고 양털을 전부 사들였을 거예요.”

자신을 네드 토치라 소개한 상인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상인은 애가 타죠. 납기일을 지키지 못하면 위약금을 물어야 해요. 금액도 금액이지만, 신뢰가 바닥치죠. 다음 입찰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하면 상회에서 제명될 수 있어요.”

로벨도 제때 물건을 가져오지 못하는 상인과 거래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슬리브 상단이 얻는 게 뭐야?”

“시장이요. 경쟁자를 제거하면 거래를 독점할 수 있잖아요.”

기사의 세계와 다른 치열함이 있었다. 하지만 명예롭지 못했다.

“그런데 죽일 필요가 있어?”

“저 상인이 재판이라도 걸었나 보죠. 아니면 용쓰는 재주가 있어 기어이 물건을 구해왔거나.”

분위기를 보아 후자였다. 출혈경쟁으로 손해를 본 슬리브 상단이 용병-이라 자칭하는 깡패-을 동원한 것이다. 상인으로서 최악의 수였다. 왕이나 영주가 개입하면 거래고 뭐고 말짱 도루묵이었다.

“이런 식으로 개입할 줄은 몰랐겠지만... 어떡할까요?”

전쟁도, 장사도 순서가 있었다.

“헨리 피터 상회장한테 가자.”

@

로드릭 시티 광장에 진풍경이 펼쳐졌다.

윤기 흐르는 백마에 칼을 두 자루나 찬 기사도 볼만하지만, 그보다 굴비처럼 줄줄이 엮여 끌려가는 칼잡이와 칼잡이를 혀와 몽둥이로 쉴새 없이 후려치는 중년 상인만 못했다.

“에구머니나! 피 좀 봐! 저러다 죽겠네!”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저 꼴로 끌려가는감?”

죽기 싫어서 지혈을 했는데 엉성했다. 지나간 자리에 핏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말보다 빠른 말이 먼저 로드릭 상회에 도착했다.

“공왕 폐하?!”

로벨은 기겁해서 뛰쳐나온 상회직원을 하나 골라 명령했다.

“병원에 가서 닥터 줄리안을 데려와.”

“다, 닥터요?”

“두 번 말해야 해?”

“아, 아닙니다!”

외과 의사라 해도 대단한 치료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보나마나 독한 술을 붓고 불로 지질 것이다.

“운이 좋으면 살 거야. 아니면 어쩔 수 없고.”

로벨은 끙끙 앓는 칼잡이들을 위로하고 로드릭 상회 건물로 들어갔다. 어린 집사는 도망가면 어쩌나 생각하다가 그만뒀다. 내일 아침 해 뜨는 것을 보려면 의사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로벨의 정체를 알았으니 도시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폭력사태에 당황한 것은 실내직원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범인이 상회의 주인이자 도시의 주인이었다. 제지하지도, 감히 따지지도 못했다. 심장이 약한 사람은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헨리 상회장은?”

“여기 있습니다! 여기입니다!”

2층에서 상회장이 허둥지둥 내려왔다. 로벨은 왜 저러나 의아해하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로벨은 평범하게 증인을 잡아왔지만, 상회장과 상회직원이 볼 때는 피를 묻힐 만큼 화난 왕이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로벨이 칼을 뽑아 상회장의 목을 칠까 조마조마하게 살피는 사람도 있었다. 로벨이 습관적으로 칼자루에 팔을 걸치자 일제히 움찔거렸다.

“할 이야기가 좀 있는데.”

도시의 자유민은 괘씸하게도 직업적인 편견이 있었다. 분명 이야기라고 했는데 겁을 잔뜩 먹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 살려주십시오!”

“응? 상회장이 뭘 잘못해?”

로벨은 두 상단의 일을 논의하기에 앞서 못된 오해부터 풀어야 했다. 어린 집사가 깔깔 웃으며 놀리는 통에 쉽지 않았다.

@

수레 하나로 장사를 시작해 20년 만에 상회 대표가 된 헨리 피터 상회장은 머쓱하게 웃었다.

“두 상단이 물밑에서 싸우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폐하의 도시에서 용병까지 동원할 줄은 몰랐습니다.”

“알면 진즉에 손 좀 쓰지 그랬어요.”

어린 집사가 입술을 삐죽이고 말했다. 귀찮은 일에 끼어들었다는 태도였다. 헨리 상회장은 미소로 답했다.

“이미 썼습니다. 거래처를 잃은 토치 상단이 어디서 양털을 구했겠습니까?”

“아, 상회장이 뒤를 봐줬어요?”

“시장의 질서를 바로잡고, 팔 곳이 없어진 슬리브 상단의 양털을 싸게 매입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지요.”

20년 경력의 상인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하지만 아픈 곳도 있었다.

“그러다 토치 씨가 죽을 뻔했지만요.”

“그 일은 할 말이 없군요. 슬리브 상단이 이렇게 야만적으로 나올 줄 몰랐습니다. 숨통을 열어주지 않은 제 잘못입니다.”

이제 증인이 있으니 처벌도 쉬웠다. 교회법으로 살인교사 및 미수고, 길드의 법으로 공정거래 위반이었다. 주모자는 교수형에 처하고, 상단은 재산몰수 후 상회에서 제명될 것이다. 로드릭 상회와 줄이 닿은 다른 상회도 받아주지 않을 테니 슬리브 일가의 몰락은 기정사실이었다.

“잠깐만! 여기서 짚고 가야 하는 게 있는데요?”

어린 집사는 뼛속까지 상인이고 행정관이었다. 정의구현에 만족하는 기사와 달랐다.

“이 일을 마무리한 것은 공왕 폐하잖아요? 게다가 슬리브 상단의 무도한 용병은 공왕 폐하를 시해하려고 했어요.”

“그 정도로 안 죽는... 윽!”

눈치 없는 폐하가 끼어들자 옆구리를 쳐서 닥치게 했다. 헨리 상회장이 불안한 듯 눈알을 굴렸다. 덫에 걸린 사냥감을 곰에게 뺏기는 사냥꾼 모습이었다.

“그 말씀은...?”

어린 집사는 흡족한 곰처럼 웃었다.

“슬리브 상단의 재산은 늑대성이 몰수하겠어요.”

“허나, 길드의 규칙상...”

“그러면 공왕 폐하가 겪은 위기는 누가 보상하나요? 상회장님이 보상할 건가요?”

로벨의 분노(?)에 살려달라고 빌었던 터라 할 말이 없었다. 헨리 상회장은 쩔쩔매면서 협상을 시도하고 자비를 구했지만 소용없었다. 상대는 ‘무려’ 어린 집사였다.

“아참, 곤경에 처했던 네드 토치 씨에게 약소한 보답이면 된다고 전해주세요. 아주아주 약소한 보답이요.”

헨리 상회장은 가해자에 이어서 피해자까지 탈탈 털어가는 악랄함에 입을 쩍- 벌렸다. 로드릭 시티의 진짜 악당은 따로 있었다. 그것도 둘이나 있었다.

“역시 우리 집사야. 맞는 말만 해.”

“제가 좀 그렇죠? 히힛!”

@

봄이 찾아오는 속도만큼 전쟁물자가 쌓여갔다.

늑대성 지하 창고에는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비스킷과 염장고기가 가득하고, 새싹이 돋기 시작한 목초지에는 콩과 보리로 살찌운 말이 몸을 풀기 위해 뛰어다녔다. 성탑 위의 대포를 기름과 불로 깨끗이 정비하고, 양모와 장대를 엮어 육각천막을 조립하고, 이 빠진 칼과 구멍 난 갑옷을 수리했다.

“그거 말고도 많아요. 리넨을 오려서 붕대를 만들고, 판자를 모아서 사다리를 만들고, 기름과 화약을 무게별로 나눠 담고, 활이랑 화살에 쓸 재료를 모으고, 양초랑 냄비랑 가죽끈이랑 송진이랑...”

“부족한 것은 종군상인한테 주문하면 돼.”

어린 집사가 전쟁을 싫어하는 것은 윤리나 도덕이 아니라 예산 때문이었다. 막대한 자원이 필요했다.

“준비가 끝나도 문제에요.”

“왜?”

“누가 먼저 움직일까요?”

전쟁의 시작은 눈치 싸움이었다. 먼저 도발하는 쪽이 불리했다.

“저쪽이 먼저 움직일 거야.”

“어째서요?”

“저쪽에는 어린 집사가 없잖아.”

그리고 눈치 싸움은 예산 싸움이기도 했다. 용병을 대거 고용한 검은 숲은 재정에 여유가 없었다.

양지바른 곳에 물웅덩이가 생기는 이른 봄, 검은 숲의 연합군대가 까마귀 성 앞에 집결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