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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441화 (441/605)

441화. 이해

겨울은 춥고 배고프며 외로웠다.

집 안에 키우는 고양이는 아침 햇살에 현혹되어 창문을 넘었다가 찬바람 한 번에 열렬히 대문을 긁어댔고, 얼마 전 털이 벗겨진 양들은 조금이라도 무리 속에 들어가려고 둥글게 둥글게 제자리를 돌았다.

펄프 대장은 늑대성 언덕의 마지막 계단을 밟고 삐거덕거리는 왼발을 억지로 끌어 올렸다. 근무조가 오가며 수시로 눈을 치워도 잠깐 돌아서면 수북이 쌓여있었다.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 새끼줄을 감은 눈신이 흠뻑 젖었다.

“이 짓도 못하겠구만.”

어느덧 쉰이 훌쩍 넘어 예순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농민이라도 장수한 나이였으니, 용병 기준으로는 고대인 수준이었다. 농담이 아니었다. 철부지 10대 용병은 펄프 대장이 고대왕국 시절 겔몬 족에 고용되어 싸웠다고 해도 믿을 것이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 일은 전부 역사 속 일로 여기는 것이 젊은이의 특징이었다.

“내가 어릴 때는 안 그랬다고 우기는 게 늙은이의 특징이오.”

“뭔 소리냐?”

“얼굴에 불만이 가득해서 한 말이외다.”

“...그걸 알면 당장 저 눈을 치워! 성에 오는 손님이 나자빠져서 다치면 어쩔 거냐! 하여간 요즘 것들은...!”

펄프 대장이 꼬장꼬장한 영감 흉내를 내자 성문지기들이 낄낄 웃었다.

“이 계절에 무슨 손님이오? 어린 집사도 농부들한테 가급적 성에 오지 말라고 하더구만.”

“나한테도 그리 말해주면 안 되나?”

“대장이 대장 노릇을 안 하면 누가 하오? 잔말 말고 가보시오.”

펄프 대장은 조금 좋아진 다리를 툭툭 치고 아성으로 향했다.

늑대성은 옛날처럼 가난하지 않지만, 가난한 근성이 남은 탓에 난방을 잘 하지 않았다. 메인 홀에 가져다 놓은 화로는 한 번도 불을 피우지 않아 장작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벽에 걸린 횃불과 촛불도 몇 개 되지 않았다. 성 안에서 일하는 사람이 다섯이 안 되니 아끼려면 얼마든지 아낄 수 있었다.

“누가 구두쇠 집사 아니랄까봐...”

혀를 차자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장작을 아끼지 않는 곳이 있었다. 늑대성의 주인이자 볼탄 반도의 왕인 로벨의 집무실이었다.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아야와 이야카 모두 그곳에 있을 것이다.

“공왕 폐하, 저 왔습니다.”

“펄프 대장? 들어와.”

짐작대로였다. 늑대성에 서식하는 두발짐승과 네발짐승이 벽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중 까만 포니테일 짐승이 말했다.

“이리 와서 몸 좀 녹여. 신발도 말리고.”

펄프 대장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 겸 감사를 전하고 신발을 벗었다. 코가 예민한 네발짐승들이 으르렁거렸지만 무시했다. 한두 해 본 사이가 아니라 이 정도로 깨물고 때리지 않았다.

탁- 타닥- 탁-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자비로운 왕과 자상한 마녀는 늙은 용병이 숨 고를 시간을 주었다. 장작 타는 소리가 고요히 흘렀다.

“검은 숲에서 용병을 모으고 있습니다.”

나른한 침묵이 깨졌다. 그런 목적으로 눈길을 헤치고 왔으니 탓할 수 없었다.

어린 집사가 장작더미를 뒤적이며 말했다.

“눈이 녹으려면 한참 남았는데, 부지런도 하네요.”

“일 없고 돈 없는 용병이 많은 시기요. 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무적무패 왕과 울프 용병단에 대적할 놈을 찾기 힘드니 미리 손을 써야지.”

“그래도 벌써부터 먹이고 재우면 페닝이 꽤 들 텐데요?”

전쟁을 몰라도 경제로 답을 내었다.

“생각보다 일찍 시작될 거야.”

“역시 그렇군요.”

전쟁의 먹구름이 가까이 다가왔다. 마녀가 아야의 꼬리를 꽉 쥐고 물었다.

“싸우기 싫지만... 우리도 준비해야지 않아요?”

“응?”

“용병하고 무기요.”

로벨은 펄프 대장을 보았고, 펄프 대장은 어린 집사를 보았다. 그렇게 시선이 한 바퀴 돌아 로벨이 설명했다.

“우리한테는 울프 용병단이 있잖아.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단일부대라 임시 고용한 프리랜서를 넣으면 도리어 안 좋아.”

“숫자가 모자라면요?”

“글쎄... 1천 명이 모자랄 것 같지 않지만, 머릿수를 채울 거면 용병을 모으는 것보다 봉신들을 소환하는 게 좋지 않을까?”

무장이 잘 된 기사와 기사 종자를 40일 무보수로 부릴 수 있으니 용병보다 나았다.

“그럼 그냥 있어도 돼요?”

“그냥 있지는 않아. 무기와 식량을 모아야 하니까. 특히 포탄하고 화약은 미리 주문하지 않으면 구할 수 없어.”

길드의 장인급 석수(石手)도 하루에 깎을 수 있는 포탄은 세 개가 안 되었다. 화약은 볼탄 반도에서 구할 수 없기에 에르나 왕국이나 아이란드 왕국을 오가는 상인을 찾아 의뢰해야 했다. 비축한 게 있으면 바로 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최소 스무날은 기다려야 했다. 그때, 창가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에르나 왕국 상인이라면 내가 알아봐 줄 수 있소.”

“와이-씨! 깜짝아!”

펄프 대장이 화들짝 놀라 신발을 떨쳤다. 벽난로 주변만 신경 써서 창가에 앉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

“호킨 페럿 경?”

두 차례에 걸친 몸값 협상이 결렬된 후 군식구가 된 에르나 왕국 챔피언이었다. 어린 집사도 아주 모질지는 않아-솔직히 말하면 부담되어서- 갑옷을 담보로 풀어줄까 했는데, 하필 겨울이라 곤란했다. 로벨이 기쁘게 물었다.

“화약을 취급하는 상인은 많지 않을 텐데, 잘 아는 사람이 있소?”

“전쟁은 당신네만 치르는 것이 아니오.”

아이언베어 요새 공방전 이후 에르나 왕국도 내전을 치렀다고 들었다. 남의 나라 일이라 깊이 관심 갖지 않았는데, 페럿 가문의 불화도 내전과 관계있을 것이다.

“여기서 경의 고향은 너무 멀지 않소?”

“에르나 왕국과 모나카 왕국을 오가는 바다 상인이오. 자유도시연맹 해안을 경유하니 공왕의 도시에서 구할 수 있을 거요.”

어린 집사가 박수치며 좋아했다. 그러면 외국에 나가서 사는 것보다 훨씬 싸게 구할 수 있었다.

“지금 항구에 있는 배가 뭐 있죠? 청새치 호? 가마우지 호?”

어린 집사가 병풍처럼 쌓인 서류를 급히 뒤적였다. 최근에 입항한 배가 하나 있으니 크레타 시티로 보내면 되었다. 호킨 페럿 경은 선심 쓰는 김에 팍팍 썼다. 심리적인 부채를 갚는 일이기도 했다.

“편지 한 통이면 되오.”

“무슨 편지요?”

“내게 진 빚이 있으니 편지 한 통이면 무기를 가득 싣고 찾아올 것이오.”

멋진 대사인데, 감탄이 아니라 불신이 쏘아졌다.

“몸값도 낼 수 있다 해놓고 아직까지 이러는데...”

“경의 명예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인관계가 좀... 크흠. 큼.”

한번 떨어진 신뢰를 회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호킨 페럿 경은 벽난로 못지않은 열을 뿜었다.

“그들은 진짜 친구요! 내 형제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분명 올 것이오! 아, 좀 믿으시오!”

포로 생활은 괴로운 법이다.

흔히 상상하는 것과 다르지만, 아무튼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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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탄과 화약은 호킨 페럿 경의 도움으로 깔끔히 해결... 될 수도 있지만, 전쟁은 대포 하나로 하는 게 아니었다. 개인무기, 갑옷, 생필품 따위는 병사들이 알아서 챙겨 와도 먹이는 것과 재우는 것은 고용주가 책임져야 했다.

“식량을 좀 더 구입해.”

“작년 가을에 저장한 게 남았는데요?”

“봄농사를 끝내고 검은 숲으로 진군할 생각 없어. 올가을까지 먹을 식량을 구해야 해.”

“으... 그렇게 오래 싸워요?”

“수레도 열 대쯤 늘리고, 리넨과 목재도 최대한 확보해.”

“검은 숲에 널린 것이 나무인데요?”

“장작으로 쓸 나무가 아니야. 사다리 만들어야지.”

로벨은 모닝스타의 고삐를 살짝살짝 당겼다. 간만에 바깥 공기를 쐰 말이 흥분한 탓이다.

“헨리 상회장이 상인들을 모으고 있어요. 오랜만에 대목이라고 신나서 몰려든 모양이에요.”

전쟁은 역사가 깊은 사업이었다. 시골 영주들의 전쟁조차 도시의 물가를 변화시키는데, 왕의 전쟁이면 말할 것도 없었다. 영주의 주머니에서 금화가 쏟아져 나오니 너도나도 줍기 바빴다. 용병은 앞다퉈서 몸값을 올리고, 상인은 피비린내 나는 입찰 경쟁을 벌였다.

“피비린내?”

거리 한곳에서 진짜 피 냄새가 났다. 모닝스타가 코를 벌렁이며 방향을 가리켰다. 눈이 녹으면서 진흙과 가축의 배변이 뒤섞인 질퍽질퍽한 골목이었다.

“윽... 그냥 지나가죠.”

어린 집사가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거리에 오물을 버리지 못하게 단속하고 있지만, 이런 골목까지 다 막지는 않았다. 조금만 들어가면 사람의 대소변과 시궁쥐가 한 무더기 있을 것이다.

“피 냄새가 짙어.”

“몰래 돼지를 잡나 보죠. 세금 내기 싫어서 종종 저래요.”

“짐승이 아니야. 사람이야.”

어린 집사는 어떻게 아냐고 따지려다 말았다. 로벨은 살인 분야에서 볼탄 반도 최고 권위자였다. 로벨이 사람이라고 하면 사람이었다.

“가 보자.”

그런데 사람이라고 딱히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도시에 숨어든 빈민들이 칼부림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그런 범죄를 일일이 잡을 수도 없고, 잡아도 며칠이면 원상복귀 되었다. 누구 말마따나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기 때문이다.

“모르고 지나치면 모를까, 알고 그냥 갈 수 없어.”

모닝스타도 좁고 냄새나는 골목이 싫은지 주인을 힐끔 보았다. ‘정말 가?’ 로벨은 고삐를 옆으로 당겨 빨리 가라 재촉했다.

푹. 푹. 푸석- 푹.

녹다 만 눈덩이가 말발굽에 바스러졌다. 어린 집사는 값비싼 사슴가죽 신발에 오물이 묻지 않게 껑충껑충 뛰었다. 제 발로 걷지 않는 로벨 빼고 모두 불쾌했다. 그래도 다행히 피가 흐르는 곳은 멀지 않았다.

“사, 살려주게... 계약은 파기할 테니까... 제발 살려줘...”

“하! 진작 그랬으면 좋잖아? 왜 이리 번거롭게 만들어?”

빌라와 창고가 딱 붙은 막다른 곳에 네 사람이 있었다. 정확히는 피 흘리는 한 사람과 피 짜내는 세 사람이었다. 식탁에서 쓰기 부담스러운 크기의 나이프를 들고 살려달라는 중년 사내를 위협했다. 로벨은 자비로운 왕답게 바람을 들어주었다.

“칼 치워.”

칼잡이들이 흠칫해서 돌아보았다. 눈 때문인지 흥분 때문인지 다가오는 소리를 들지 못했다.

“넌 또 뭔데... 이십니까요, 나으리?”

옷을 보나 말을 보나 의심의 여지없는 ‘나으리’였다. 뒷골목 칼잡이들은 후천적 본능에 따라 굽신거렸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더 있나 날카롭게 살폈다.

“칼 치우라고 했어.”

로벨은 아론다이트 폼멜에 손을 걸치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칼잡이 하나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기, 나으리? 오해하실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는데, 이것은 상회의 일입니다.”

가진 게 많은 상인과 척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고귀한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상회? 어느 상회?”

구체적으로 자그마한 농장을 가진 기사 말이다. 같은 기사라도 로벨하고는 상관없었다.

칼잡이는 상대가 보통 신분이 아님을 알고 협박 수위를 올렸다.

“이거 말씀드리면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긴장감을 주려는 듯 잠깐 뜸을 들였다.

“공왕 폐하가 운영하는 로드릭 상회입니다.”

칼잡이 인생 최악의 실수였다. 어린 집사가 이마를 짚고 하얀 입김을 뿜었다.

“그럼 그냥 지나갈 수 없잖아.”

로벨은 송곳니를 살짝 보이고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칼잡이들은 크고 무거운 진짜 무기에 당황해 뒷걸음쳤다.

“어, 어어? 왜 그러십니까? 지금 감히 공왕 폐하의 사람을 협박하시는...”

“난 너 같은 사람 둔 적 없어.”

그 말을 이해했을지 알 수 없었다. 모닝스타가 앞발을 높이 들고, 땅에 물든 눈보다 하얀 칼날이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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