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화. 바람
로벨 일행은 아침 일찍 일어나 뉴-뉴 로드릭 마을로 출발했다.
외팔이와 허풍쟁이 얼굴에는 가기 싫은 기색이 역력했는데, 겁쟁이 소리 들을까봐 차마 말을 꺼내지 않았다. 로벨은 무거운 새벽 공기를 바꾸려고 입을 열었다.
“어린 집사랑 리암 수사가 알려주긴 했는데, 실제로 가는 것은 처음이야.”
외팔이가 위대한 공왕 나리를 슬쩍 보고 콧대를 세웠다.
“저는 수사님을 모시고 몇 번 다녀왔습니다요. 어험. 별 볼 일 없는 마을이지요.”
잘난 척과 아는 척은 항상 재미있는 법이다. 상대가 거기 주인이 아니면 말이다.
“내 마을인데... 별 볼 일 없어서 미안...”
“엑? 그, 그런 뜻이 아니굽쇼. 가난하니까, 아니, 지저분하니까, 아니, 못 살기는 하는데 나쁜 것은...”
허풍쟁이가 닥치라고 옆구리를 후려쳤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호버크(Hauberk)를 입어서 타격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긴장은 풀 수 있었다. 사계절 중 가장 게으른 겨울 해가 슬금슬금 머리를 내민 탓도 있었다. 아무리 끔찍한 괴물이라도 한낮에는 활동하지 않는 것이 룰이었다. 그러나 상호 합의되지 않은 룰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저기 마을이 보입니다요! 금방이구만요!”
“음... 진짜 가난하긴 하네.”
뉴 로드릭 마을도 부자 마을은 아니지만, 이제 막 자리 잡은 뉴-뉴 로드릭 마을은 심하게 빈곤했다. 일 년 내내 땅을 골라 콩하고 귀리를 조금 수확했을 뿐이다. 그 일조차도 일손이 모자라 공용창고나 우물 같은 시설은 만들지 못했다.
엉성한 화덕에서 설익은 빵을 굽고, 살얼음이 낀 숲 속 개울에서 매일같이 마실 물을 길어왔다. 가을 추수 전에 장만하는 겨울 장작을 이제야 구하는데, 눈이 내려 여의치 않으면 찬바람이 그나마 덜 드는 흙집에 옹기종기 모여 체온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힘들지만, 뉴-뉴 로드릭 마을의 진짜 고충은 따로 있었다.
“거기 할멈! 공왕 폐하께서 오셨어! 촌장을 불러와! 빨리!”
허풍쟁이가 마을광장-이라기 보단 그냥 집과 집 사이의 작은 공터-에 앉은 노인에게 소리쳤다. 옆 동네 무명 기사가 방문해도 직접 나와 접대해야 하는 촌장이 공왕 폐하 방문에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외팔이가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어, 어랍쇼? 이 마을에 저런 노파가 있었나?”
저 남쪽 폭풍성에서 수백 마일을 걸어 피난 온 사람들이었다. 나이 든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아주 소수였다. 리암 수사를 도와 호구조사 할 때 저런 노인은 보지 못했다.
“얼굴이 어째 낯이 익긴 한데...”
로벨도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외팔이보단 훨씬 나았다.
“난 누군지 알아.”
“공왕 나리의 친구입니까요?”
“친구 아니야.”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흐룬팅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거짓 항복한 기사가 칼 들고 달려들 때도 가만있던 무적무패가 칼자루를 쥐었다. 눈치 빠른 허풍쟁이는 평범한 노인이 아님을 깨달았다.
‘외팔이 말대로 어디서 본 얼굴인데...’
기억을 계속해서 과거로 보냈다. 1년 전, 2년 전, 3년 전... 그리고 4년째 앞에서 찾았다. 짧지 않은 인생에서도 손꼽을 만한 사건이라 어렵지 않았다.
“히이잇! 마, 마녀잖아!”
늑대성의 고집불통 말괄량이 마녀와 비교할 수 없는 ‘전설적인’ 마녀였다. 이것도 비유법이 아니었다. 진짜 전설로 전해지는 새 다리와 절구통의 마녀 바바 야가였다.
“듀라한이 나타난 게...”
로벨 일행은 과거 바바 야가의 마법을 상대한 적 있었다. 그때는 바바 야가 본인이 싸울 생각이 없었던 데다가 아야와 이야카가 있어서 아무 피해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저런 괴물이면 재앙이라 할 만했다.
바바 야가가 나무 그루터기에서 일어났다. 외팔이와 허풍쟁이는 반사적으로 무기를 빼들었다. 그러나 한때 신으로 추앙받은 대마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위대한 왕이시여, 오랜만에 뵙나이다.”
“썩 좋은 만남은 아니었지.”
바바 야가가 이 빠진 소리로 웃었다. 마녀의 웃음 하면 괴기하게 느껴지지만, 생각보다 거북하지 않았다.
“오늘도 좋은 만남이 아니군요.”
흐룬팅이 한 마디쯤 뽑혔다. 외팔이는 손도끼를 던질 뻔했다. 별거 아닌 말인데 마녀가 하니까 저주 같았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야?”
바바 야가는 웃음을 지우고 나직이 속삭였다.
“죽지 않는 자가 오고 있습니다.”
로벨은 비슷한 호칭을 떠올리고 다소 거칠게 말했다.
“죽은 자의 왕 다음은 죽지 않는 왕이야?”
“왕과 같은 위엄을 가졌으나 왕은 아닙니다. 폭풍의 거인, 복수하는 용인, 발가벗은 노인, 죽지 않는 코셰이(Koschei the Deathless)라 불리지요.”
동방문화에 밝은 자라면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불사신 코셰이는 바바 야가만큼이나 유명한 괴물이었다.
“죽음을 알리는 듀라한과 죽지 않는 코셰이라...”
기묘한 조합이었다. 로벨은 지근거리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고 중얼거렸다.
“이 땅에 사는 괴물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왜 자꾸 멀리서 찾아오는 거야?”
로벨의 불평에 바바 야가가 주름진 얼굴을 곱게 폈다.
“이곳에 왕이 계시기 때문이죠.”
반대로 로벨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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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폭풍성 피난민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새롭고 새로운 로드릭 마을’이란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다.
“폭풍성에서 왔으니까 폭풍의 마을 어때?”
로벨이 그럴듯하지 않느냐는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마을주민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그건 좀...”
“진짜 폭풍이 오면 큰일 아닙니까요.”
“그럼 순화해서 바람의 마을 어때? 계절을 붙여서 봄바람, 여름바람, 가을바람 마을이라 해도 좋겠다.”
“그것도 좀...”
“이곳 장점이 바람이 많이 불지 않는 겁니다요.”
로벨이 저래 봬도 왕인데, 왕 앞에서 겁나 까탈스러웠다.
로벨은 포기하지 않고 몇 가지 이름을 더 거론했다. 그러나 반응이 영 좋지 않았다. 고용주를 사랑하는 외팔이와 허풍쟁이 눈빛이 점점 사나워지자 젊은 촌장은 다급해졌다.
“공왕 폐하, 저희의 보잘것없는 불만을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것이 근심거리입니다.”
머리가 없는 기사와 괴팍한 마귀할멈이 마을 주위에 어슬렁거리면 싱숭생숭할 만했다. 로벨 일행이 오기 전에는 다들 집에 틀어박혀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지금도 상당수가 불안한 얼굴로 마을 밖을 힐끔거렸다. 로벨은 어린 집사가 요구한대로 마을 주민을 안심시켰다.
“그 괴물들은 안 나타날 거야.”
“참말입니까요?”
“그럼 내가 거짓말한다는 거야?”
로벨이 눈썹을 올리자 감히 의심한 청년이 입을 틀어막고 굽신거렸다. 괴물보다 무서운 게 자존심 상한 기사였다. 로벨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다시 말했다.
“어깨 위가 허전한 기사와 이빨 빠진 늙은 마녀는 해를 끼치지 않아.”
마도의 수호자는 마도의 수호자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뱀파이어 군주의 말을 빌리면 동화 속에 괴물이 둘 이상 나오지 않는 것과 같았다.
“그들은 경고하기 위해 찾아온 거니까.”
“무엇을 말입니까요?”
로벨의 혼잣말을 들은 허풍쟁이가 물었다. 마도의 수호자 등장과 죽음의 경고를 합치면 답은 쉬웠다.
“로벨 로드릭은 죽는다.”
“예옛?”
“그럴 수도 있다는 뜻이야.”
허풍쟁이의 눈코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누가 해도 황당한 말인데, 로벨이 하니까 더욱 황당했다.
‘불사신 코셰이...’
둠 노릭스 후작처럼 마도의 왕이 탐탁지 않은 수호자일 것이다. 그래도 갑자기 기습하거나 야밤에 숨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마도의 수호자를 죽이려면 현실 세계가 아니라 인지의 세계에서 지워야 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필히 전쟁이 일어날 거야.”
“검은 숲의 잡것들이 감히 덤빌까요?”
“응. 덤빌 거야.”
로벨이 확신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거기서 불사신과 싸우겠지.”
로벨은 어리둥절한 용병과 마을주민을 보고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중요한 것은 마을 이름이야. 뉴-뉴 로드릭 마을은 더 이상 못 들어주겠어. 빨리 의견을 내.”
인간의 왕이기도 한 로벨은 현실이 중요했다. 새 마을의 이름은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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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라 하기는 짧고 산책이라 하기는 긴 1박 2일은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 곧 다가올 검은 숲 전쟁에 마도의 수호자가 개입했다는 것과 ‘새롭고 새로운 개척 마을’에 제대로 된 이름이 생긴 것이다. 어린 집사가 실소하며 물었다.
“호프 마을이 뭐예요?”
“왜? 좋잖아?”
희망(Hope)처럼 들리기도 하고 홉(Hop)처럼 들리기도 했다. 다시 말해 고향을 떠나온 남쪽 농부들의 바람이자 리암 수사표 맥주의 재료를 공급하는 마을의 상징이었다.
약 150년 뒤, 맥주 순수령으로 리암 수사표 맥주가 유일하고 보편적인 맥주로 자리 잡자 지금의 작고 가난한 호프 마을은 맥주의 본고장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데, 거기까지 내다본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머리가 빈 기사는 어떻게 됐어요?”
“어감이 좀 이상하데?”
“제가 좀 직관적이죠.”
어린 집사는 하프 아머를 벗기며 으쓱였다. 무기와 갑옷에 싸운 흔적이 없으니 가볍게 농담할 수 있었다.
“역시 헛소문이었죠?”
“아니. 진짜야.”
“...헛소문이란 게 진짜라고요?”
“아니. 마도의 수호자가 있었어. 그것도 둘이나.”
로벨은 가벼워진 몸을 좌우로 풀며 보고 들은 것을 알려주었다. 어린 집사 얼굴이 붉어졌다가 파래졌다.
“에이! 말도 안 돼요! 머리통 없는 기사는 그냥 전설이잖아요?”
“늑대의 왕이랑 흡혈귀의 군주도 원래 전설이야.”
그래서 마법과 신비를 지키는 수호자였다. 어린 집사가 손바닥을 펼치고 말했다.
“가만, 가만, 정리 좀 할게요. 그 괴물 기사가 나타난 것이 전쟁의 징조라 하면...”
“그 전쟁에 불사신 코셰이가 개입할 거야. 어쩌면 더 많은 수호자가 나타날지도 몰라.”
싸움을 못하고 마법에 관심이 없어도 마도의 수호자가 끔찍이 강하다는 것은 알았다. 로벨 역시 마도의 수호자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어린 집사는 덜컥 겁에 질렸다.
“그러면 어떡해요? 그, 금광을 포기할까요?”
어린 집사 입에서 나온 말이라 충격적이었다. 로벨은 입을 벌리고 ‘흐헤?’ 소리를 내었다. 체통이 부족한 모습인데 비밀스러운 침실이라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금광뿐만 아니라 혓바닥 성도 포기해야 해. 그래도 결국은 전쟁이 일어날 거야.”
“어째서요?”
“듀라한이 나타났잖아.”
거듭 말하지만, 머리 없는 기사는 죽음을 알리는 정령이자 전령이었다.
“인간의 전쟁이 아니야.”
어린 집사가 아무리 똑똑해도 마법사는 아니었다. 그래서 로벨의 말은 이해하지 못했다.
“왕을 섬기는 자와 부정하는 자의 전쟁이야.”
그리고 마도의 수호자가 전면에 등장하는 전쟁이기도 했다. 뱀파이어 군주의 바람이 점차 이루어지는 듯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