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화. 징조
어린 집사의 우려와 달리 당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상이 전쟁이고 생존이 승리인 겨울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엿새 동안 내리다 말다 반복한 첫눈이 발목까지 쌓였다. 지붕이 무너질까 걱정스러운 마을 주민은 사다리를 찾아 앞집 옆집 뒷집과 친분을 다졌고, 성 밖에서 수레를 끄는 상인은 푹푹 꺼지는 바퀴와 투정부리는 짐말에 한탄했다.
“북군이 7피트짜리 눈사람을 만들었어요.”
“응?”
“그래서 발가락이 이끄는 남군이 8피트 눈사람을 만들겠다고 난리예요.”
“와.”
늑대성의 제설은 경쟁이 붙은 울프 용병단이 해결해주었다. 성문 좌우에 빗자루와 넉가래를 쥐고 늠름하게 선 7~8피트 눈사람은 늑대성을 방문하는 농가 아낙과 아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눈이 내리면 불편한 것은 비단 사람만이 아니었다.
아야와 이야카는 따뜻한 주방 화덕에 똬리를 틀고 귀한 고기와 계란을 축냈고, 모닝스타와 우람한 전투마들은 마구간에 갇혀 구슬프게 울다가 어린 집사한테 혼이 났다.
“말도 운동은 해야 해.”
로벨이 훈련용 바위를 어깨에 이고 말했다. ‘으라차차!’ 소리 내며 들어야 할 큰 바위를 마른 짚단 마냥 줍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겉보기와 달리 가벼운 돌인가 싶어 살폈지만 속이 꽉 찬 현무암이었다. 족히 120파운드는 되었다.
“폐하는 필요 없어 보이는데요?”
“응?”
“아니, 아니에요. 계속하세요.”
로벨은 훈련용 바위를 아래로 받힌 후 어깨와 허릿심으로 힘껏 던졌다. 연병장 맞은편으로 멀리 날아갔다. 그리고 잠시 뒤 쿠우웅- 소리와 함께 땅바닥이 진동했다.
“대포도 필요 없어 보이고요.”
“자꾸 무슨 소리야?”
어린 집사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정 그러면 운동 삼아 산책을 다녀오세요.”
“그래도 돼?”
로벨은 웬 떡인가 싶어서 물었다. 그러자 어린 집사가 음흉하게 웃었다. 그냥 나가서 놀라는 뜻이 아니었다.
“...어디를 가야 하는데?”
“뉴-뉴 로드릭 마을이요.”
“그 이름 별로라니까.”
“그렇다고 듀라한 마을이라 부를 수 없잖아요.”
뉴-뉴보다 이상한 이름이 나왔다. 로벨은 잠깐 침묵했다가 물었다.
“듀라한?”
“그 왜 유명하잖아요. 죽음의 정령, 안개의 괴물, 머리 없는 기사...”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 마도의 수호자였다. 그러나 어린 집사는 대수롭지 않게 별명을 읊었다. 로벨이 긴장하자 어린 집사가 피식- 웃었다.
“겁쟁이 농부들이 헛것을 본 거예요.”
“헛것? 왜?”
“저 따뜻한 남쪽에서 올라와 추위와 눈을 상대하며 거친 땅을 일구잖아요. 보나 마나 술을 왕창 마실 텐데, 취해서 동구 밖을 다니면 이것저것 헛것을 보죠. 눈 쌓인 나무가 유령처럼 보이고, 이끼 낀 바위가 트롤처럼 보이고...”
“그런가?”
“그렇다니까요. 공왕 폐하가 가서 겁쟁이들 안심 좀 시키고, 그 뭐냐, 겨울나기에 부족한 게 없는지 살펴도 봐요.”
평소답지 않은 이해와 배려였다. 로벨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다 부끄러운지 슬며시 외면했다.
“지금까지 투자한 게 있는데, 보리수확도 못 하고 동사하거나 아사하면 손해잖아요. 나중에 먹고 살만해지면 세금 왕창 거둘 거니까 그때까지는 신경 써야죠.”
충분히 잘 먹고 잘 사는 로드릭 시티와 성 밖 마을도 세금이 무겁지 않으니 빈말이었다.
로벨은 부끄럼 많은 의동생 머리를 쓰다듬고 화내기 전에 얼른 도망갔다.
“지금 바로 출발할게! 하루 자고 올 수 있어!”
“제가 어린애인 줄... 앗! 잠깐만요! 혼자 가지 말고요! 외팔이하고 허풍쟁이 데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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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성에서 뉴-로드릭 마을까지 한나절이 걸렸다.
모닝스타 혼자 달리면 한두 시간으로 충분하지만, 중무장한 용병을 거느리고 눈 쌓인 오솔길을 걸으면 어쩔 수 없이 세 배쯤 걸렸다.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무기가 많아?”
하프 아머 차림에 칼 두 자루를 찬 로벨이 물었다. 그것도 경무장이라 할 수 없으나, 손가락부터 발가락까지 쇠사슬로 꽁꽁 싸매고, 크로스보우, 쿼럴, 숏스피어, 클리버 등을 잔뜩 짊어진 외팔이&허풍쟁이와 비교할 수 없었다.
“듀, 듀라한이 나온다잖습니까요!”
허풍쟁이가 질색하며 말했다. 로벨은 잘난 척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거 헛소문이래. 눈 내린 동구 밖 나무 이끼... 뭐라더라? 아무튼 그런 분위기 때문이야.”
“제가 십여 년간 공왕 폐하를 모시며 깨달은 게 있는데, 공왕 폐하와 같이 가면 없는 소문도 사실이 됩니다요.”
“그런데 소문부터 죽음의 기사라니요? 으아! 완전 좆된 느낌이야!”
로벨이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라니까. 진짜 아니야.”
“어떻게 확신합니까요?”
“어린 집사가 아니랬어.”
로벨의 눈에는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허풍으로 악담을 쏟아내는 허풍쟁이와 솔직해서 악담을 달고 사는 외팔이가 말을 잃었다. 고용주와 싸우는 것은 멍청한 일인데, 멍청한 고용주와 싸우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폐하가 멍청하다는 뜻은 아닌데... 그러니까... 음... 어린 집사 말을 너무 믿는 것도...”
“응?”
“...아닙니다. 가보면 알겠지요.”
“기왕이면 안 갔으면 하지만요.”
듀라한이 무서운 것은 외견이 아니라 전설 때문이다. 듀라한을 본 자는 반드시 죽는다.
사실 듀라한을 봐서 죽는 건지, 죽을 때가 되어서 듀라한을 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전설, 민담, 설화, 동화마다 제각각 이유가 달랐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된 것은 죽음이었다. 그래서 듀라한은 저승의 기사이자 죽음의 정령이었다.
“가장 큰 특징은 머리가 없다는 거죠?”
“머리를 말안장에 차고 다닌다는데?”
“투구가 아니고?”
“머리가 없는데 투구를 왜 가지고 다니냐?”
“멍청아! 머리가 없으니까 투구를 걸 데가 없잖아.”
“넌 머리통이 투구걸이냐?”
계속 걷다 보니 긴장이 풀렸는지 잡담이 새어나왔다. 로벨은 마녀 키르케를 데려올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이런 이야기는 본래 마법사가 전공이었다.
이른 점심을 먹고 출발해서 초저녁이 되기 전에 뉴 로드릭 마을에 도착했다. 어둑어둑한 동녘 하늘에 저녁 요리 겸 난방 목적의 굴뚝 연기가 그려졌다. 새로운(New)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옛날 로드릭 마을을 빼다 닮았다. 보릿짚을 얹은 농가가 정겹고 그리웠다.
히이이이잉-!
외팔이와 허풍쟁이가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먹고 마시자’며 의기투합할 때 스산한 말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겨울바람이 귓가에 스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 마을에... 말이 있습니까요?”
로벨은 어린 집사 강요로 몇 번이나 읽은 영내 재산목록을 떠올렸다.
“응. 농사짓는 말이 있어. 두 마리. 아니, 세 마리인가?”
“아, 그렇군요?”
두 용병이 안도하자 로벨도 덩달아 안심했다. 재차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히이이잉- 푸릉-! 솜털이 곤두섰다. 기사와 용병이 동시에 멈췄다.
“저, 폐하 나리, 뭔가 좀 이상한뎁쇼?”
“...뭐가?”
“마을은 앞에 있는데... 울음소리가 왜... 왼쪽에서 들리죠?”
신비에 속하는 모닝스타조차 긴장해서 움찔했다. 눈 내리는 저녁, 마을 밖 외딴 장소,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 소리가 심장을 옥죄였다. 로벨 일행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나무그늘이 진 둔턱 위로 우뚝 솟은 실루엣이 보였다. 큰 칼을 차고 해진 사슬갑옷을 입은 기사였다.
“으... 으아...”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어깨 위가 평평하다는 것이다. 머리 없는 기사였다.
“듀, 듀라한이다!”
“진짜 나왔잖아!”
무서울 때 도망가는 것은 하수였다. 늑대의 왕, 죽은 자의 왕, 동방의 마녀 등을 상대해 온 기사와 용병은 일단 무기부터 꺼냈다.
“먼저 죽이면 죽지 않겠지?”
살인과 폭력으로 얼룩진 인생이 엿보였다. 오히려 괴물쪽이 평화적이었다. 머리 없는 기사는 로벨 일행을 쭉 훑어보고-사실 머리가 없어서 확신할 수 없다- 말머리를 돌렸다. 달이 차오르는 언덕 너머로 조용히 사라졌다.
“어, 어쩝니까요? 쫓을깝쇼?”
“너 임마, 미쳤어?”
“그냥 보내는 게 더 위험하잖아?”
두 용병이 병장기를 들고 투닥거렸다. 로벨은 사라진 듀라한의 행적을 쫓았다. 별빛이 어두운 시간이지만 지금껏 동쪽으로 왔기에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북쪽... 북쪽에 뭐가 있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이 있어 가장 가까운 것을 우선 짚었다.
“뉴-뉴 로드릭 마을이요?”
로벨 일행의 목적지였다. 그리고 소문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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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뉴 로드릭 마을에 짐을 풀었다.
한 시간 정도 더 걸으면 ‘새롭고 새로운 로드릭 마을’이 나오지만, 밤이 깊고 생각할 것이 많아 일찍 쉬기로 했다. 거짓말을 못하는 기사 로벨 로드릭이 우울하게 말했다.
“핑계야.”
진짜 이유는 듀라한이었다.
외팔이와 허풍쟁이는 듀라한의 전설이 무서워 꺼리지만 로벨은 아니었다. 그런 것을 무서워하기에는 마도(魔道)와 너무 가까이 지냈다.
‘역시 수호자일까?’
요정왕이나 드루이드 족장처럼 인간에게 우호적인 수호자도 있지만, 늑대의 왕이나 버그베어처럼 인간에게 적대적인 수호자도 있었다.
‘혹은 그림 리퍼와 바바 야가처럼 중립적이거나...’
로벨은 자세를 바꿔서 턱을 괴었다. 콩껍질과 마른 나무가 모닥불 열기에 갈라지며 따닥- 딱-! 소리를 내었다.
“공왕 폐하, 혹시 불편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뉴 로드릭 마을의 촌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집을 빌려주고 먹을 것을 내줬는데 표정이 안 좋으니 안절부절못했다. 로벨의 성품을 잘 알기에 칼부림하거나 채찍질할 걱정은 하지 않지만, ‘합법적인 불이익’을 당할 수는 있었다.
“혹시 마을에 안 좋은 일이 있어?”
촌장의 걱정을 비웃듯 로벨이 도리어 질문했다. 그래서 촌장은 안심했다.
“안 좋은 일이라 하시면...”
“곡식이 썩거나, 가축이 병들거나, 사람이 실종 되거나...”
“그런 일은 매년 있지요.”
“올해도?”
“올해도 있었습니다. 저 아랫집에 셋째 아들이 개울에 빠져 죽었고, 건넛집의 새끼양이 옛 성터에서 행방불명되었지요.”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과 방목하는 가을에 종종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로벨은 다시 자세를 바꾸며 ‘끄응-’ 소리를 내었다. 마도의 수호자가 양을 잡아먹으려고 왔을 것 같지 않았다.
“뉴 뉴... 개척 마을은 어때?”
“보리 종자와 농마 때문에 몇 번 찾아갔는데, 잘 살고 있습니다. 본래 농사짓던 사람들이라 적응이 빠르더군요.”
새로운 마을도, 새롭고 새로운 마을도 별 탈이 없었다. 머리 없는 기사가 출몰한다는 괴담에 어린아이들이 겁먹은 것이 유일한 이슈였다.
‘그냥 지나가는 중이었을까?’
진짜 그러면 재미있을 텐데,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마녀 키르케에게 이것저것 많이 배웠음에도 간과한 것이 있었다. 듀라한은 죽음을 알리는 징조(徵兆)였다. 죽은 후에 찾아오는 사신 그림 리퍼와 성향이 달랐다. 저승에 발을 담그고 있으나 산 자를 위한 정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