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화. 낙승
결투를 피하는 것은 명예롭지 못하다.
그러나 아랫사람과 결투하는 것도 명예롭지 못하다.
농민은 농민하고만 결투하고, 자유민은 자유민하고만 결투한다. 하찮은 농민이 고귀한 기사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경우는 없으며, 설령 신청해도 응하는 것은 기사의 불명예였다. 자기 자신을 농민 수준으로 낮추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공왕 폐하가 나설 상대가 아닙니다. 제가 가서 혼쭐을 내겠습니다.”
“나입니다. 나는 싸웁니다. 아주 잘입니다.”
볼탄 반도의 왕인 로벨도 비슷했다. 성(姓)과 깃발이 있으니 조롱받을 불명예는 아니지만, 왕의 위엄을 스스로 해칠 수 있었다. 게다가 로벨만 모욕받은 것이 아니었다.
“본인은 공왕의 기사가 아니오.”
슐츠 경이 북풍을 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들의 피가 조금 식었다.
“따라서 허락이 필요 없지. 본인이 나갈 것이오. 힘으로 막으시겠소?”
로벨은 몇 안 남은 친구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가로젓자 호른 경 이하 수행기사들이 탄식했다. 슐츠 경은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었다.
“겸사겸사 공왕 폐하의 명예도 주워담아 오겠소.”
그 명예는 핏물 속에 담겨올 것이다.
고귀한 기사들의 의견이 정리되자 허풍쟁이가 방벽 아래로 소리쳤다.
“성문을 열어! 슐츠 나으리가 나가신다!”
로벨이 나가지 않는 것에 의아해하는 용병도 있지만, 왕이 상대하기에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한 용병이 더 많았다. 사기는 흔들리지 않았다.
슐츠 경은 구식이 된 통짜 헬름을 쓰고 샛별의 이름을 가진 몽둥이를 잡았다. 마상창에 자신이 없는지, 혹은 전투마가 전력질주할 거리가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랜스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슐츠 경은 좌우로 열리는 성문을 지나 유유히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 고래고래 소리치던 쉬폰 경은 진짜로 기사가 나오자 입을 꾹 다물었다.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눈알 굴렸다.
슐츠 경은 정확히 10야드 앞에 전투마를 세우고 헬름을 벗어 얼굴을 보였다.
“본인은 슐츠 가문의 고르크 슐츠요. 결투를 받아들이겠소.”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고 하나 아군보다 적이 가까운 곳이었다. 기사와 프리랜서가 우르르 달려들면 속절없이 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슐츠 경의 목소리는 평온하고 자세는 흔들림이 없었다. 경험이 많거나 안목이 좋은 기사라면 상대방의 실력을 미뤄 짐작했을 것이다.
“슐츠 경? 돌연변이 새끼 뱀을 잡아놓고 용살자라 자칭하는 사기꾼인가?”
쉬폰 경은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더 나아가 굉장한 모욕을 주었다. 기사 세계에서 원색적인 욕설 수준이었다.
“사기꾼...”
슐츠 경은 방벽을 힐끔 보았다. 진짜 기사들과 어울리다 이런 자를 마주하니 처지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쉬폰 경은 다르게 생각했다.
“왜? 후회되나? 저 멍청이들한테는 허풍이 통했을지 몰라도 나 쉬폰 가문의 5대 당주 체인 쉬폰에게는 어림도...”
오래 상대할 가치가 없었다. 슐츠 경은 헬름을 고쳐 쓰지 않고 애마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누구처럼 콩만 골라 먹는 명마는 아니지만, 수년간 기사와 호흡을 맞춰온 영리한 말이었다. 주인 뜻을 이해하고 바로 달려들었다.
“어, 어억?”
쉬폰 가문의 주인이 내뱉은 마지막 유언이었다.
슐츠 경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가시가 촘촘한 철퇴를 머리에 박아주었다. 로벨이나 늑대왕 만큼은 아니지만, 경이로운 힘을 가진 슐츠 경이 전투마의 가속을 담아 휘둘렀다. 코뼈가 부러지고 광대뼈가 주저앉고 이빨이 대여섯 개 튀어나가며 뒤로 넘어갔다. 허풍쟁이가 순수하게 의문을 표시했다.
“결투인데 저래도 됩니까요?”
“뭐, 이름과 가문을 밝혔으면 결투가 시작된 거니까. 잡소리가 긴 상대 잘못이지.”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라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 비겁한 놈! 기습을 하다니!”
관절의 성능은 계곡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쉬폰 경이 일격에 쓰러지자 분개하며 무기를 빼들었다. 계곡 기사들의 두 번째 실착이었다.
결투 결과에 수긍하는 척 물러나 무기와 병사를 다시 모으는 쪽이 현명했을 것이다. 전쟁을 마무리하는 명예로운(?) 결투를 치른 만큼 로벨도 추격할 명분이 없었다.
‘그런 머리를 쓰면 기사가 아니지.’
로벨과 호른 경이 똑똑해서 깜박깜박하는데, 기사의 뇌는 쇳가루와 말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호른 경, 도너반 경, 아자르 경, 슐츠 경을 도우시오.”
로벨의 명령이 떨어지자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와 전공에 목마른 기사와 그냥 몸이 근질근질한 기사가 즉시 전투마로 달려갔다. 먼저 나간 슐츠 경과 전투가 허락된 기사 종자까지 총 8명이었다.
“아니야. 9명이야. 나도 나갈 거야.”
로벨은 옆구리에 낀 파나케아 투구를 머리로 옮겼다. 휘하 기사들이 활약할 시간을 조금 주고 직접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적을 과대평가했거나 수행기사를 과소평가한 생각이었다. 먼저 나간 슐츠 경이 연거푸 기사 셋을 때려잡고, 곧장 합류한 호른 경 이하 늑대성 기사들이 하나씩 창으로 꿰뚫었다.
뱀의 계곡의 기사 종자들은 하늘 같은 주인이 힘 한번 못 쓰고 낙마하자 덜컥 겁이 나 도주했다. 고용주를 잃은 프리랜서는 즉각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싸움개가 어이없어서 중얼거렸다.
“뭐야, 이렇게 쉽게 이길 거면 요새를 준비할 필요 없었잖아?”
허풍쟁이 제이콥 생각은 달랐다. 로벨을 따르는 기사들이 대단한 탓도 있지만, 수십 명의 피로 기선을 제압한 탓도 있었다. 붉은빛에 흥분하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비슷했다.
“그리고 금광을 노리는 것들이 저들만은 아닐 거야. 요새를 더 크게 지어야 할지도 몰라.”
싸움개가 질색했다. 그러나 불길한 예언은 이상하게 잘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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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계곡에 자리한 기사 가문은 대부분 항복을 선언했다.
기사의 아내, 아들, 동생 등이 찾아와 포로와 시신의 몸값을 지불했으며, 로드릭 가문과 슐츠 가문의 금광 소유권을 인정하는 각서를 남겼다.
“쉬폰 가문만 빼고 말이지요.”
“그 가문은 대체... 욕심이오?”
“공포입니다.”
호른 경이 몸값으로 받은 은화자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린 집사 대행 리암 수사가 작게 신음했다.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다른 가문을 선동해 전쟁을 주도한 가문입니다. 이제와 항복한들 공왕 폐하의 처벌을 피할 수 없지요.”
“처벌할 생각 없는데?”
로벨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호른 경은 순수한 주군을 위해 웃었다.
“저라도 믿기 힘든 말입니다.”
로벨의 명성 중 8할은 피와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비로운 왕이란 평가는 로드릭 시티 인근에서만 통했다. 리암 수사가 주판알을 옮기며 물었다.
“볼탄 반도가 아니고요?”
“흠. 동부평야 주민들이 동의하지 않으니까.”
잠시 잡담이 오간 뒤 대책을 논의했다.
“쉬폰 가문이 위세가 높다 해도 일개 기사 가문입니다. 뱀의 계곡을 벗어나면 하찮은 시골 기사지요.”
“여기가 뱀의 계곡이니 문제 아니오.”
“그냥 무시하면 안 돼요? 시간이 지나면 슬그머니 용서를 빌러 올 것 같은데...”
“앙심을 품고 다시 덤빌지도 모르지.”
“기사님, 기사님, 슐츠 기사님은 왜 맨날 부정적이에요?”
“북방계 출신은 원래 저렇다.”
“싸우자! 죽이자! 때리자! 혼내자!”
“외해 출신도 원래 저렇소?”
“...저자만 이상한 거면 좋겠소.”
용감한 기사와 노련한 용병이 머리를 맞댔지만 뾰족한 수가 안 나왔다. 자기 집에 숨어서 으르렁거리는 개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로벨이 착잡하게 중얼거렸다.
“목줄을 채우려면 개집을 부숴서라도 끄집어내야 해.”
“개집이요? 깔깔!”
마녀 키르케가 아야와 이야카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웃었다. 재미난 농담이란 반응이었다. 하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쉬폰 가문의 본거지가 북쪽이라 했소?”
“계곡 하구의 작은 마을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혓바닥 성에 숨어있을 겁니다.”
“그럼 마을부터 점령합시다.”
용병들이 눈을 반짝였다. 적을 죽이고 전리품을 챙기는 것보다 마을을 약탈... 아니, 징발하는 게 편하고 돈이 되었다. 로벨은 찬물을 조금 끼얹었다.
“약탈이 아니라 점령이야.”
“그, 그래도 먹고 마실 것은 챙겨야...”
“어린 집사가 준 페닝 있잖아. 그걸로 사.”
로벨은 광산과 광부들을 지킬 소수 용병만 남기고 출진을 준비했다. 금광 하나 지으려다 지역 하나를 접수하게 되었는데, 워낙 자연스러워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째 익숙하기도 하고...”
샘 포클처럼 정복왕이 될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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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따라 북쪽으로 북쪽으로 올라갔다.
급격한 경사나 거센 물살은 점점 뜸해졌지만, 겨울이 코앞이라 살을 에는 추위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동계물자를 가져오긴 했지만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면 오래 버티지 못해요. 눈이 내리면 발이 묶일 수도 있고요.”
리암 수사가 걱정을 표시했다. 이 험하고 황량한 계곡 기슭에 왕을 가두는 것은 수행원의 죄였다. 어린 집사가 알면 직업상 허전한 정수리를 물어뜯을 것이다.
“우리보다 쉬폰 가문이 먼저 쓰러질 거야.”
“저들은 성이 있는데요?”
“길잡이가 한 말 까먹었어?”
리암 수사는 랑트 가문의 수다쟁이 청년을 떠올리고 혼란에 빠졌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전부 기억할 수 없었다.
“농사지을 땅이 부족하고, 바다 가까운 곳이라 작물이 잘 자라지도 않아.”
“그래도 겨울을 날 수 있으니 오랫동안 이 땅을 다스리지 않았을까요?”
“연어야.”
로벨의 한마디에 리암 수사도 깨달았다.
“이맘때가 되면 강을 따라 연어가 올라와. 겨울을 날 식량을 비축할 수 있지.”
“아... 그래서 마을을...?”
“응. 겨울 식량을 빼앗을 거야.”
로벨은 전략과 전술의 천재였다. 기억력이 좋지도 않으면서 전쟁에 써먹을 만한 것은 까먹지 않았다.
“역시 공왕 폐하는...”
“응?”
“아, 아닙니다. 정말 대단해요. 우리 폐하가 최고입니다.”
“에헴. 내가 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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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예상은 적중했다.
쉬폰 마을에 도착하니 갓 잡은 연어가 뱃가죽을 까고 줄줄이 널려있었다. 겨우내 먹을 수 있게 절이고 말리는 중이었다.
“로, 로벨 로드릭 군이다!”
“으허억! 도망쳐!”
그리고 연어를 징발하는 혓바닥 성의 병사들이 있었다. 시기적절하게 찾아왔다.
“됐어. 쫓지 마.”
울프 용병단은 허겁지겁 계곡 위로 도망가는 적을 비웃었다. 광산에서 해치운 농민병과 별반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다. 호른 경이 미소를 띠고 말했다.
“용병을 고용하지 못한 모양이군요.”
“가진 게 없으니까.”
“제정신이 박힌 놈이면 십만 페닝을 줘도 우리 나으리와 안 싸우죠.”
성이 있어도 지킬 병사와 먹일 식량이 부족하면 무용지물이었다. 전쟁 경험이 풍부한 로벨의 기사들은 낙승을 예감했다. 겁먹은 마을주민을 다독이며 연어요리나 맛보면 될 것이다.
까마귀 성에서 사람이 올 때까지 그리 생각했다.